# 두 번째 #
하지만 놀라움에 그치지 않은 이가 있었으니.
“뭐하는 짓이냐! 사람을 죽이다니!”
카이사르가 버럭 외쳤다.
잔뜩 튀어나온 주둥이를 보면 생명의 존엄보다는 방금 번이 한 행동에 시기를 느낀 것이었다. 나는 왜 저리 하지 못했을까? 라는. 그만큼 번의 행동은 충격적이고,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네놈! 무엄하고, 무엄했다! 감히 어찌..! 너는 그럴 권리가 없다! 아버님께서 지켜보는 자리에서! 신성한 경연장에서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이냐!”
순간, 너무도 기세등등한 카이사르에 다른 황자들도 얼떨떨한 얼굴에서 벗어나 동조하려고 할 때, 집정관이 그들을 막아서며 번에게 말한다.
“번 황자님께선 대답을 행동으로 하셨군요. 하지만 규칙은 규칙. 그리하신 이유를 말씀으로 풀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번은 집정관의 말에 크게 끄덕이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곤 최대한 엄숙한 목소리를 내어 말을 시작했다.
“이자는 세 가지 중죄를 지었습니다. 첫째, 제 살겠다고 전우를 죽인 죄. 그들 역시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무슨 죄입니까? 이자의 이야기를 듣고 감상에 빠지기 전에, 죽은 이들의 가족을 생각해보는 것이 먼저일 것입니다. 둘째, 이 자는 탈영을 함으로써 전군의 사기를 꺾었습니다. 그 역시 수만의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 지대하게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한 사람의 행동이 가끔은 집단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주기도 하는데, 이번 사건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나만 살겠다고 모두가 도망쳤다면 이번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을까요? 모두가 개인 사정이 있다며 도망친다면 적과 누가 싸우겠습니까?”
여기까진 예상할 수 있는 모범적인 답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이자가 저지른 가장 큰 죄라 한다면, 감히 철鐵의 군대를 욕보였다는 것입니다.”
“전시의 탈영은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조용히 듣던 집정관이 참견하듯 말했지만, 번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다 해도 우리 황국의 병사들은 그리해선 안 됩니다. 저는 이번 원정에서 큰 피해를 보았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전투를 승리했죠. 대륙은 지금 철鐵의 군대를 두려워하고 꺼립니다. 이것은 피해를 입으면서도 진군하여 승리를 거머쥔 용맹함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철의 군대를 죽일 순 있지만, 이길 순 없다!’ 라는 소문이 돌 정도라죠? 헌데 이자는 그 위명에 흠집을 낸 것입니다. 많은 전우가 목숨 바쳐 이룩한 그것을 혼자 살겠다는 이기심으로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직접 목을 칠 이유가 있었습니까?”
집정관의 질문에 번은 몸을 돌려 저편을 보았다. 아버지를 말이다.
“제가 군주가 되면 이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허..!”
부들부들 떨어대며 나설 기회를 잃은 카이사르가 혀를 찼다. 뭐? 군주? 벌써 제 놈이 후계자라도 된 양 말하고 있지 않은가?
“······.”
하지만 번은 당당했고, 대범했다.
넓게 편 어깨는 움츠리지 않았고, 고개도 뻣뻣하게 들었다.
이곳은 경연장이다. 후보들의 모든 것을 보고, 평가하며 이 나라의 기둥이 될 수 있을지, 생각은 어떠한지, 정치이념이나 사상은 어떻게 품고 있는지를 따지는 자리였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은 짧고 그 안에 모든 것을 보여야 하니, 그저 단순하다면 필시 다른 이들에게 묻혀 빛을 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기에 번의 계산은 여기까지 깔려있었다. 사람을 직접 내 손으로 죽인다는 것이 찝찝하긴 했지만, 어차피 그가 아니었어도 죽을 자 아닌가.
“이렇게 나약한 사람은 제 군대에 필요 없습니다. 나는..! 내가 군주가 된다면, 지금보다 더 강력하고! 강인한 군대를 만들 것입니다! 철鐵을 두드려 검劍을 만들 것입니다! 그 어떤 적 앞에서도 부러지지 않고, 신神이라 할지라도 벨 수 있는 예리한 검의 군대! 그것을 나의 군대로 가질 것입니다!”
번은 마치 아버지에게 들으라는 듯 외쳤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9살 꼬마의 것이라곤 믿을 수가 없었다.
“······.”
“······.”
적막감이 사방으로 퍼진다.
8명의 황자 중 저렇게 자신을 드러낸 이는 없었다. 이건 포부였다. 내가 황제가 되면 이렇게 할 것이다라는 확고한 신념. 누군들 그걸 말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저 모두에겐 마땅한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번은 스스로 그걸 찾아냈고, 말했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다.
“철을 두드려 검을 만들겠다라. 아주 좋은 말씀이십니다.”
집정관은 유쾌하게 웃으며 팔을 들었다.
“자! 이것으로 첫 번째 경연을 끝내겠습니다! 탈락자는 오늘 중으로 개별 통보될 것이며 다른 경연은 3일 후 이곳에서 펼쳐질 것입니다!”
집정관이 말이 끝나자마자, 번이 물었다.
“다음 주제는 무엇입니까?”
"······."
잠시 번을 향해 눈을 내리깔던 집정관은, 사람들 모두가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말했다.
“대련對鍊! 3일 후, 열리는 두 번째 시험은 바로 대련입니다!”
"······!"
번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
한편, 경연장을 내려보던 황제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하실 말씀이라도?”
스캇은 웃음을 참듯 얄미운 표정으로 황제에게 다가왔다.
“저놈. 많이 컸군.”
전에 봤을 땐, 참된 군주 어쩌고 지껄이기에 유약한 놈이라 여겼건만, 직접 죄인의 목을 쳐버릴 줄은 몰랐다.
“눈빛이 남다릅니다.”
“남다르다?”
“예, 폐하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르다는 거지?”
“뭐든 손에 넣겠다는 욕망으로 들끓는 점은 핏줄을 타고 잘 이어받은 듯 합니다. 허나 훨씬 더 영악하고, 참을성이 강합니다. 그러면서도 움직여야 할 때는 움직이죠.”
“허! 하지만 오늘은 과했다. 내 눈에 들고자 하는 의도는 알겠으나, 모두를 적으로 돌렸어. 군주는 포용할 줄 알아야 한다.”
“마주하는 모두를 굴복시키는 폐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설득력이..”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일반적으로.”
황제는 다리를 꼬고, 아래를 보았다. 황비들이 주섬주섬 일어나고 있었다. 제 아들이 오늘 보여준 것들에 대해 옆 사람과 얘기도 나누고, 아쉬워하기도 하며 말이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황제는 몸을 일으키고, 스캇의 앞에 섰다.
“더 지켜보자고. 이제 시작이니까.”
.
.
집으로 돌아온 번은 안색이 좋지 못했다.
사람을 죽였으니 누군가 물고 늘어지면 곤란했는데, 아무도 그것에 관해선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지만, 다음 경연에 마음이 복잡하기만 했다.
대련.
어떤 방식으로 치러질진 모르겠지만, 무조건 몸을 써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리라.
‘내가 이길 수 있을까?’
그가 경쟁해야 하는 모든 황자는 어려서부터 마나를 다루었을 것이다. 2황비의 아들 카이사르는 수도 기사와 겨뤄도 팽팽하게 맞설 수 있다는 소문까지 돌지 않나? 그런데 번이 가진 무기라곤, 드러낼 수도 없는 독이나 아직 숙련도를 올리지 못한 전생의 특성 몇가지 뿐이니 걱정이 앞서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질 순 없어.’
불리하다고 포기해버리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무조건 틈을 만들어 그걸 기어코 벌려서라도 비집고 들어가야만 했다.
‘아니, 이길 거야.’
첫 번째 경연은 나름 만족스러웠다. 1등은 아니어도 그리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으니, 꼴찌는 면할 것이다. 하지만 이 분위기를 이어가려면 어떻게든 다음 시합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해보자.’
결심을 한 순간, 살기가 피어오르듯 눈을 번뜩이는 번이었다.
.
.
누군가에겐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더디게 흐르는 3일이 번에겐 쏜살같이 흘렀고, 이윽고 번은 다시 그 콜로세움에 와 있었다.
-우와아아아아아!
-번! 번! 번!
-카이사르! 카이사르!
지난번과는 달리 군중에는 패가 생겼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팬덤이 형성된 것이었다. 여전히 카이사르의 인기가 압도적이었지만, 드문드문 번의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두 번째 경연을 시작하겠습니다!”
집정관의 말과 함께 북이 두웅-! 울렸다.
이제 남은 황자는 일곱.
그들을 훑어보는 번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