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상 처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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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근처로 이동한 번은 자신만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내 몸이 낼 수 있는 한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부터.’
번은 알몸으로 자세를 잡았다. 땀을 흥건하게 흘릴 것이 뻔하기에 옷 따윈 거추장스럽기만 하다.
그의 왼손엔 마약을 담은 포대가 있다. 정좌하고 앉은 번은 무아지경에 빠져들어 간다.
‘이것만 통제할 수 있다면 해볼 만해.’
때론 어떤 작은 단서가 모든 문제를 해결한 열쇠가 되기도 한다. 물론 이게 마나에 대해 해결책이 되어주진 않겠지만, 이전보다 조금이라도 강해질 수 있다면 무엇이든 도전하고 봐야 했다. 다른 황자들에겐 그저 시험으로 인식될 경연일 수도 있겠지만, 그에겐 생존이었으며 전투였다.
스스스스..
번의 손바닥에 흐물흐물한 액체가 맺히기 시작했다. 슬라임의 흡수능력이 발동하고 있는 것이다. 전에는 다른 사람처럼 입으로 먹거나 코로 흡입했지만, 이젠 좀 더 효율을 극대화할 방법으로 바꾼 것이다.
「대상을 흡수했습니다.」
손바닥을 통해 혈관으로 흘러들기 시작하는 약의 성분이 그의 몸을 빠르게 돌았다. 이젠 익숙할 만도 한데, 아직 약의 기운을 완전히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고, 머리는 핑핑- 현기증이 났다.
‘조금 더.’
흡수하는 양을 늘려본다. 아직 1kg짜리 포대 하나도 다 못 썼다. 앞으로 19포대나 남아있고, 이걸 다 쓰기 전까진 어떤 성과를 내야만 했다.
‘이걸 쓰면 정신과 육체가 완전히 따로 놀아.’
마약은 뇌의 여러 기능을 마비시켰다. 몸을 통제할 수 없게 하며 쾌락과 환상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작용은 몸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메커니즘을 따를 것이 뻔한데, 이걸 마음대로 조종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 모든 잠재력을 100% 발휘해 육체를 컨트롤 할 수 있게 되리라 믿었다. 그리고 이런 도전을 가능케 한 것은 어젯밤 약을 흡수하며 얻은 두 가지 발견 덕분이었다.
「누적된 성분이 신장에 축적됩니다.」
「약藥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이것!
독을 계속 먹다 보니, 송곳니로 독을 뿜을 수 있게 된 것처럼 약도 그게 가능해졌다. 그런데 이건 기존의 마약과는 다른 특수한 것이었다. 번의 몸으로 한번 여과해 부작용은 없애고, 순수한 장점만 담은 ‘약’으로 재탄생 된 것이다.
「해로운 성분에 좀 더 강한 면역을 가집니다.」
「혼란 내성이 올랐습니다.」
「고통에 좀 더 익숙해졌습니다.」
게다가 흙이나 돌 따위를 먹으며 그 안의 성분을 흡수해 뼈가 단련되었듯, 번의 혈액은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미라클 레인보우에 함유된 많은 성분이 하나하나 번의 몸에 누적되며 전혀 다른 효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원소 하나만 들어가거나 빠져도 산소, 이산화탄소, 수소 등 완전 다른 물질로 변신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는데, 그의 피는 이제 비릿한 철분 향이 아닌 향긋한 꽃내음이 더 강했고, 땀에서조차 묘한 향기가 풍기기 시작했다.
‘아직은 버틸 수 있어. 더 가보자.’
번은 그렇게 달려가고 있었다.
정신이 육체를 잡아두는 그 끝 지점을 향해서 아슬아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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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연을 시작한다!”
3개월이 빠르게 지나갔다.
어느덧 해가 바뀌어 황자들이 한 살씩 더 먹었고, 너무 어리거나 병약한 이들을 제외한 8명의 황자가 경연에 참여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경연은 축제처럼 진행되었다.
거대한 콜로세움, 1만 명에 달하는 관중이 함성을 질렀고, 람보르도 이 시간은 문을 닫았다.
“참으로 든든하시겠습니다.”
콜로세움의 가장 상上석에 자리 잡은 황제 뒤로 측근들이 병풍처럼 섰다. 스캇의 말에 황제가 비릿하게 웃었다.
“진심으론 안 들리는데?”
“저리 많으니 대가 끊어질 걱정은 없지 않습니까?”
질보다 양이란 말에 황제가 큭큭 웃었다.
“병신에게 물려줄 생각은 없다. 차라리 공주들에게 기회를 주는 한이 있어도.”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황제의 의중을 모르는 군중들은 그저 좋다고 환호할 뿐이다.
-황제 폐하 만세!
-누가 이길까?
-아무래도 카이사르님 아니겠어?
-하긴, 나이도 많고 검술도 대단하다지?
-카이사르님! 힘내세요!
-카이사르! 카이사르!
어미가 평민 출신이어서 그런지, 2황비의 아들이 유독 인기가 많았다. 게다가 다른 황비들이 대부분 황제에게 점령당한 왕국의 이민자들이었으니 에비뉴 출신의 2황비는 여기 토박이들에게 자부심이 되었다.
힐끔.
아래쪽엔 황비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그 중 한 여인이 뒤를 돌아 올려보았다. 2황비였다. 자신만만하게 웃는 그녀의 미소에 황제는 가볍게 화답하며 스캇에게 말했다.
“누가 이길 것 같나?”
“도토리 키재기에 그게 중요하겠습니까.”
“원, 말을 해도. 너는 도토리 시절 없었냐?”
“예, 저는 없었습니다. 폐하께서도 다섯 살 때 검기를 일으키지 않으셨습니까?”
“허..”
스캇은 황자들을 철저하게 깔보고 있었다. 그건 당연할지도 몰랐다. 황제를 포함해 딘딘, 집정관, 은사의 어린 시절을 보고 자랐으니까.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가 한 곳에 모여 서로에게 자극받으며 컸다. 지금 이 철의 나라가 만들어진 것이 우연은 아니었다.
“뭐, 그래도 굳이 한 명 뽑으라면 21황자에게 걸겠습니다.”
황제의 머리가 갸웃했다.
“그놈, 3개월간 도서관엔 코빼기도 안 비쳤다는데?”
이미 황자들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는 실시간으로 보고받고 있던 황제였다.
“똘똘하단 얘긴 들었지만, 어려.”
반면 2황비의 카이사르나 7황비의 두 형제는 나이도 훨씬 많고, 영민하다 소문이 자자했다.
“글쎄요.”
스캇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키득 키득거렸다.
“그래서 더 믿음이 가는데요.”
알쏭달쏭한 말에 황제는 콧등을 찡그렸다.
“내기할래?”
“얼마든지요.”
“······.”
너무 당당하게 나오자, 황제가 입을 다물었다. 이놈이 뭘 믿고 이러나 싶다가도 스캇과 내기하는 것만큼 멍청한 일은 없다는 격언과 같은 말을 떠올렸다.
“흐음.”
황제는 저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안 하십니까?”
뒤에서 스캇이 물었지만, 무시하며 경연장에서 외치는 집정관을 보았다. 그 뒤로 작은 꼬마가 보였다.
‘번..’
그래, 보자.
그간 얼마나 컸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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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경연의 우승자에겐 금 100골드와 미누스의 화관을 상품으로 드릴 것입니다.”
금 100골드면 4인 가족이 1년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물가가 높은 여기 수도에서도 그러하니, 아마 산 너머 시골이라면 평생 놀고먹을 수도 있는 돈이기도 했다.
‘5천 정도인가?’
자연스럽게 한국식으로 환전된 돈의 양을 가늠하며 번도 끄덕였다.
“미누스의 화관에 대해선 모두가 익히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한 번 더 설명하자면..”
여성들이 머리에 착용하는 장식이었는데, 꽃으로 만든 것을 화관이라 하지만 이것은 정교하게 꽃을 장식해놓은 아이템이었다. 실제로 지혜의 여신 미누스가 축복을 내렸다고 전해지는 보물이며 이것을 착용하면 두통이 없고 머리가 맑아지는 효과가 있다고 전해진다.
“타고 난 재능도 부정할 수 없겠지만, 자식의 됨됨이는 그 어머니를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듯, 부디 이번 경연에 우승하시어 은혜에 효도로 보답하시길 바랍니다.”
성정은 아버지를 닮고, 머리는 어머니를 닮는다는 속설이 있었다. 그걸 어디까지 믿어야 할진 모르겠지만, 여기 황자들은 어차피 모두 같은 피를 받아 태어났다. 절반은 공평하다는 것이었고, 이제 나머지 절반이 승부를 가를 거라는 것이었다.
‘지독하네.’
번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황자들의 경연에 그 어머니까지 끌어들여 자존심 싸움으로 만들어버리는 수에 감탄과 비정함을 동시에 느꼈다.
황자들의 앞에 선 집정관은 밝게 웃으며 족자 하나를 펼쳐 들었다. 저기에 이번 경연 첫 번째 문제가 적혀 있을 것이다.
“제한 시간은 10분!”
그가 좌르르륵 아래로 펼쳐진 족자를 황자들에게 돌려 보이며 외쳤다.
“순서는 나이순으로 할 것입니다!”
두둥-!
북이 울리고, 번은 족자를 보았다.
[일문일답一問一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