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다음 #
“거..”
전직 왕은 번을 보며 혀를 찼다.
“쓸데없는 것을 자꾸 물어보는구나. 싸움이라는 것이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것이지. 강한 자가 항상 이긴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
“오..!”
번이 박수를 짝! 쳤다.
“약점을 찾아낸 건가요?”
노인 페트릭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번의 말에 그 또한 지난날의 어떤 지점이 떠오른 거다.
-아버지. 저는 괜찮아요. 항복하지 마세요.
왕은 딸을 사랑했다.
라일락. 그녀는 어려서부터 그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과분한 사랑 받고, 후회 없이 살았어요. 오늘 죽는다 해도 저는 원망하지 않는답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착한 아이.
아버지는 딸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다. 이 아이만 지킬 수 있다면..!
“차이가 있었다면.. 그의 욕망보다 내 사랑이 더 컸던 것이겠지.”
번의 눈이 반짝였다.
노인이 처음으로 마음을 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대단하세요! 그래서요? 그 순간에 어떤 깨달음을 얻었나요?”
번의 관심사는 오직 이것이었다.
강해져야 하는데, 마나를 느낄 수 없다.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앞으로의 경연에 차질이 생길 거다.
“그게 뭐가 중요하냐? 이럴 시간에 공부나 하거라! 나중에 내 원망 말고!”
“다 했어요.”
“뭐?”
“할 수 있는 공부는 다 했다고요.”
페트릭은 기막힌 듯 번을 보았다.
공부에 끝이 어디 있는가? 하지만 이놈의 표정을 보면 거짓말이 아닌 듯하다.
“이번 경연은 제가 이길 거에요.”
“허..!”
아무리 못해도 꼴등은 하지 않을 거다. 그래서 번은 벌써 다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첫 경연이 지혜라면 그 뒤는 무조건 체력적으로 승부할 것이 분명했다. 그 싸움에서 마나로 무장한 황자들과 겨루려면 어떻게든 그 안에 깨우쳐야 했다.
환생하며 얻은 능력과 마약으로 강해지는 정도로는 안된다. 이건 일종의 본질 차이다.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자면, 구리가 아무리 단단해 봐야 구리다. 철과 부딪히면 반드시 구리가 휜다. 이런 격차가 존재하는 것이다. 마나가 있고 없고는.
“참 재수 없는 말을 태연하게도 지껄이는구나. 하늘 높을 줄 모르고 펄떡이는 개구리마냥!”
무시하듯 말하지만, 번이 아무렇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이제까지 그래 왔으니까.
확실히 이 당돌한 꼬마는 어딘가 남달랐다. 어떤 질문을 해도 막힘이 없고,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며 놀랄 정도로 기막힌 답을 줄줄 쏟아내기도 했다.
“자만하는 것보다 못난 것도 없느리라.”
“알고 있어요. 조언 감사합니다.”
하지만 번의 처지에서 보자면 이건 당연한 것이었다. 지혜를 겨루는 승부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람보르를 매일 오가다시피 했고, 현자의 서 따윈 이제 몇 권, 몇 줄에 뭐가 쓰여 있는지까지 짚어낼 정도였다. 도서관에 수많은 책이 있긴 해도, 그것들은 그가 아는 21세기 대한민국의 교과서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것들로 가득했고, 방정식을 하는데 분수 따위에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었다.
고3 과정을 마쳤는데, 초등학교 교과서에 매달릴 시간이 있을까? 산 아래에서 바라보는 세상과 정상에서 보는 시야가 분명히 다르듯, 어느 경지에 오르면 할 수 있는 사고는 차이가 있었다. 공자, 맹자를 익혔는데, 초등학교 3학년 도덕책을 공부하며 낭비할 여유 따윈 그에게 없었다.
“뭘 알고 싶은 것이냐?”
“페트릭 경께서 아버지의 턱에 상처를 낼 수 있었던.. 저는 그것이 알고 싶어요.”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방법.
번에겐 그게 필요했다. 당장 마나를 깨우칠 수 있다고 해도 이미 어려서부터 수련한 황자들에겐 한참 뒤질 것이 분명했으니까.
“말했지 않느냐. 마음가짐의 차이라고.”
“세상만사가 그것으로만 결정된다면 억울한 이 하나도 없겠죠. 자식을 지키려는 부모는 무조건 이겼을 테고, 사랑하는 연인의 힘은 군대도 이길 수 있을 테니까요.”
“······.”
“알려주세요. 생과 사의 순간에서 육체의 한계를 돌파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번은 결과를 신봉한다. 만약 이 전직 왕과 맞붙은 사람이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운이 좋았네. 뭐 그럴 수도 있지. 라며 어깨 으쓱하며 넘겼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가 턱을 벤 남자는 철의 황국의 군주다. 번이 생각할 때 아버지는 절대 그 승부에서 방심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던 이 노인은 겉보기완 다르게 엄청난 힘을 품고 있으리라 생각했고, 번을 이곳으로 이끈 원동력이었다. 아직 어느 쪽에도 붙지 않았으며 이제 막 람보르에 자리 잡아 의지할 곳도 없는 이민자.
“..마나를 느끼지 못한다고 했느냐?”
번을 가만히 바라보던 페트릭은 그리 물었다.
“예.”
“외공을 익힐 생각이냐?”
“치우칠 생각은 없지만, 뭐든 할 수 있는 건 다 해볼 생각입니다.”
무엇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일국의 군주로 살며 하나는 깨우쳤다면 그건 바로 사람을 보는 눈. 아직은 이 꼬맹이를 지켜볼까? 정도였긴 해도 확실히 범상치 않은 놈인 것은 틀림없었다.
“내가 도와주면 너는 내게 뭘 해줄 거지?”
그의 말에 번은 역시나 예상치 못한 답을 내왔다.
“그건 제가 후계자가 된 다음, 다시 말씀하세요. 지금 약속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가능성이 있을 테니까요.”
“하하하하..!”
확실히 별종은 별종이었다.
“그거, 가져와 봐라.”
페트릭은 번의 앞에 있는 상자를 가리켰다. 왕실에서 쓰던 촛대나 장식 같은 각종 사치품이었는데, 이젠 별 쓸모가 없는 것들이기도 했다. 번이 그의 발치에 상자를 옮기자, 안에서 쇠로 만든 그릇 하나를 꺼냈다. 그는 그걸 상자 위로 올리더니 물었다.
“내가 이걸 주먹으로 치면 어떻게 되겠느냐?”
“날아가 버리겠죠.”
“그건 당연한 거다. 내가 묻는 건, 이 그릇과 내 주먹 둘 중 어느 것이 상하겠느냐다.”
“뒤로 날아갈 공간이 없다면 주먹이 상할 것이고, 주먹에 마나를 두른다면 그릇이 부서지겠지요.”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내 머리는 이미 내가 이 그릇을 치기 전에 명령할 것이다. 아무리 최대한의 힘을 쓰려고 해도 일정 부분을 봉인하려고 하겠지.”
“손을 다치지 않게 말인가요?”
페트릭은 피식 웃었다.
확실히 이해가 빠른 녀석이다.
“육체는 일정 수준 이상 힘을 내면 방어기제가 작동한다. 몸을 단련하는 사람들은 혹독한 수련으로 그 한계를 조금씩 넓혀가는 작업을 하는 것이지.”
“아..!”
번은 뭔가 깨달은 듯 말했다.
“강한 마음으로 그 명령체계를 박살 낸 것이군요!”
사람이 진심으로 쇳덩이를 치면 어떻게 될까? 손목이 부러지고, 뼈가 튀어나올 것이며 살갗은 벗겨져 피가 철철 흐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무식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없지 않나? 인간은 100%의 힘을 발휘하고 살지 않으니까. 무슨 행동을 하든 언제나 자기보호본능이 1순위로 매겨진다.
그런데 이게 특정한 순간이 되면 해금된다. 위기에 처한 아이를 살리려고 트럭을 밀어낸 엄마의 이야기, 몇 초도 안 되는 순간에 번개처럼 움직여 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한 청년, 3시간 가까이 전력 질주를 해서 왕에게 적의 소식을 알리고 죽은 병사의 마라톤 같은 것들은 분명 한계를 넘은 것들이었다.
“안다고 해도 쉽진 않겠지. 사람 몸이라는 게 그렇게 마음먹는 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니까.”
페트릭은 그리 생각했지만, 번은 달랐다. 뭔가를 깨달은 듯 부리부리한 눈으로 고민하더니 벌떡 일어났다.
“또 올게요! 고마웠습니다!”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가는 번.
그의 눈동자에 어떤 실마리가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