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쟁의 시작 #
‘경연?’
생각지도 못한 말에 번조차 입을 떡 벌렸다.
아버지는 후계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이건 황국으로 거듭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인 동시에 날로 번창하는 이 거대한 나라의 차기 주인을 결정하겠다는 말과 같았다.
사람들이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아버지는 말을 이었다.
“집정관의 주관하에 3개월에 한 번씩 경연이 행해질 것이다. 에비뉴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영토는 넓어지고, 인구는 늘어난다. 나는 이 나라를 제국으로 키울 것이고, 그 영광을 물려받을 자격이 있는 사내를 원한다.”
아버지의 말에 황자들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기 시작했다. 아니 황비들의 얼굴은 더 심했다. 내 아들이 후계자로 간택되기만 한다면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아닌가? 어떻게든 따내야 하는 승부였다!
“아직 어린 황자들이 경연에 참여할 수 없어 서운할 수도 있겠지만, 앞일은 모르는 것이다. 늦은 만큼 더 절치부심하여 분발한다면 언제든 기회는 올 거라 생각한다.”
아버지의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모두가 궁금한 것 투성이인 얼굴이었지만, 감히 그의 말을 자르고 질문할 생각조차 못 했다.
“집정관.”
“예.”
아버지의 부름에 옆에 서 있던 집정관이 두 걸음 앞으로 나와 두루마리를 펼쳤다. 저것이 언제 준비되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회군하기 전부터 이미 이것을 준비했다는 뜻이 된다.
“첫 번째 경연은..!”
집정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지智덕체 중에 군주에게 가장 필요한 지혜를 겨루는 것입니다. 사물의 도리, 시비, 선악을 잘 판단하고 슬기롭게 처리하는 능력! 이것이야말로 헛된 낭비를 줄이고, 무고한 사람이 생기지 않게 조절하는 군주의 필수불가결한 덕목입니다. 하여, 모든 황자님들께선 3개월 후 있을 경연에 대비하여 최선을 다해 공부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결과가 좋지 못한 분은 기회가 다신 없을 것입니다.”
경연의 꼴찌는 탈락한단다. 경연이 진행될수록 매번 숫자는 줄어들고, 결국 마지막엔 가장 오래 살아남는 이들끼리 붙는 방식. 마치 한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유행하던 오디션 프로그램을 차용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모두 집정관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지고, 뜨악하는 표정이다. 이때, 2황비의 눈이 초승달처럼 가늘어지며 웃음기를 감추지 못한다. 이런 방식이라면 나이가 가장 많은 축에 속하는 그녀의 아들 카이사르에게 아주 유리하지 않나? 이제 10살, 14살쯤 되는 다른 꼬맹이들과는 살아온 세월 자체가 다르니 말이다.
‘지혜라.’
하지만 2황비는 번의 속을 들여보지 못했다.
‘잘됐어.’
검술이나 마나 능력. 혹은 그 비슷한 어떤 것들로 경쟁해야 했다면 아직은 곤란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혜라면 번도 자신 있었다. 그는 그들이 아는 고작 9살 꼬맹이가 아니었다. 수많은 환생으로 무장한 정신력에 대한민국 수험생으로 살며 갈고닦은 지식까지. 그에겐 저깟 꼬마들의 머리쯤이야 이길 자신 있었다.
“자세한 것은 오늘 중에 정식으로 공문을 내리겠습니다. 기회를 꼭 잡으시길 바랍니다.”
말을 마치고, 의미심장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집정관. 문득 번에게 눈이 가는가 싶더니, 이내 뒤로 물러난다. 그러자 아버지가 기다렸단 듯이 의자에서 일어나 말했다.
“앞으로 에비뉴는 대륙 최고, 최강을 지향하며 나아갈 것이다. 그에 걸맞은 황자가 내 뒤를 이을 것이며, 이 말은 대륙의 모든 이들의 머리 위에 선다는 것과 같다. 노력해라! 공부해라! 싸우고 또 싸워라! 언제나 가장 큰 적은 바로 자기 자신임을 명심하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네! 노력할 것이옵니다!
황자들의 대답을 들으며 아버지는 가늘게 웃었다. 그리고 이 순간 모두는 직감했다. 칼 없는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여기 황궁에서 모두의 미래가 걸린 치열하고, 피 튀기는 일전이!
.
.
.
나흘이 지났다.
“공부하러 왔느냐?”
람보르는 이제 매일같이 드나드는 황자들로 문턱이 닳아 없어질 지경이었다. 번이 9년을 살며 마주친 횟수보다 최근 하루에 보는 경우가 더 많을 지경으로 말이다.
“네!”
황자들에겐 도서관이 24시간 개방되었다. 본격적인 경연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 열심히 하려무나!”
요만의 응원을 뒤로하고, 번은 람보르의 2층으로 올라갔다. 다른 황자들이 도서관으로 직행하는 것에 비해 그는 다른 곳으로 향한다. 람보르 내에 행동은 제약이 있었지만, 모두가 번이 어려서부터 할아버지를 뵈러 드나드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딱히 저지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가 향하는 곳은 할아버지 사무실이 아닌 다른 쪽.
똑똑.
노크했지만 대답은 없다. 그러나 번은 주변을 잠깐 둘러본 후, 다시 똑똑 문을 두드렸다.
-에잉..
안에서 혀를 차는 소리에 번은 미소 지으며 문을 열었다.
“어르신! 들어가겠습니다!”
여기저기 상자가 빼곡한 사무실.
아직 정리가 끝나지 않아 부산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시작조차 안 했다는 게 맞다. 기골이 장대한 노인은 히죽 웃으며 들어오는 번을 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너는 이제 아주 제집처럼 드나드는구나?”
싫은 기색이 풀풀 풍겼지만, 번은 기죽지 않았다.
경연 기간 내엔 황자들은 그 누구도 스승으로 삼을 수 있었고, 질문할 수도 있었다. 물론 원한다고 해서 1:1 교습을 무한대로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쳐지진 않았다. 그 때문에 황궁 최고의 지식인이라던 집정관과 어딘가 기묘하지만 아버지의 군대를 전승으로 이끌고 있는 스캇 경에게 줄을 대보려는 황비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었지만, 번은 그들과 전혀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
“혼자서 하는 것보단 나으시잖아요.”
“누가 도와달라고 했느냐?”
눈살을 찌푸리는 그의 왼쪽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틱 장애처럼 수시로 경련이 일어나는 것이다. 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에선 더 했고.
썩 꺼져라! 내치지 못하는 것 또한, 황자들의 경연에 관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수도의 모든 사람은 황자의 질문에 답해야 했고, 그들의 공부에 필요한 모든 것을 협조하라는 공문 또한 이미 받았다. 황명으로 내려온 그걸 대놓고 어길 수 있는 간 큰 사람은 없었다. 노인이 비록 이곳 에비뉴의 수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이민자라 할지라도 말이다.
“에잉..”
아니, 그래서 더 잘 안다. 전장의 그를 보았으니까.
철鐵의 군대를 이끌고, 거침없이 타국을 점령하는 황제를 단 한 순간이라도 본 사람은 알게 되리라. 그를 거역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말이다.
“이건 어디에 둘까요?”
“됐다니까!”
번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이며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노인이 버럭! 소리쳤지만, 멈추지도 않는다. 도시락까지 싸 들고 도서관에 처박히는 다른 황자들과는 달리 번은 며칠간 계속 이곳만 찾아왔다.
“고얀..”
그는 저 꼬마의 똥고집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머리를 흔들며 의자에 앉았다. 고작 며칠이었지만, 이렇게 독한 놈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구박하고, 겁을 주어도 이 녀석은 절대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꼴보기 싫은게 이를 데 없건만, 뻔뻔하기가 그지없다.
“휴우, 좀 쉴게요.”
2시간 내내 열심히 움직인 번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상자 위에 걸터앉았다.
“······.”
노인은 기가 차서 그런 번을 바라보았다.
그도 일국을 이끈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수많은 인간군상을 봐왔고, 자식도 여럿이었다. 그런데 이런 놈은 못 봤다.
이 놈이 한 일을 보라. 그 많던 짐을 마구 쌓은 게 아니었다. 물건은 마치 자기 자리가 있었다는 듯 알맞게 찾아 들어가 있었고, 얼마나 꼼꼼한지 먼지 한 톨조차 모두 떼어내놨다. 전쟁터 막사 같던 사무실은 금세 말끔하게 변해갔으며 그림 하나 벽에 다는 것도 신중을 다하니, 고작 9살짜리의 솜씨라곤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한 호흡만 빨랐어도 아버지의 목을 벴을 거라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그게 어떻게 가능했죠? 객관적인 전력으론 아버지의 상대가 되지 않으시잖아요.”
9살짜리의 말투도 아니었고.
“······.”
“말씀해주세요. 저는 물을 자격이 있어요.”
참으로 뻔뻔하기도 하다. 원래 질문의 범위는 지혜 경연 한정해 내건 황명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놈은 역사나 지식에 관해 묻는 게 아니었다. 지난 며칠 내내 계속 ‘무력’과 ‘전쟁’에 대해서만 캐물었다.
“벨버른 왕국에 숨겨둔 비기라도 있던 건가요?”
그랬다. 최근 귀환한 황제의 턱에 생긴 상처. 그걸 만든 벨버른 왕국의 왕. 페트릭 드 오리온 살룬이 바로 이 노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