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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23화 (23/177)

# 왕의 귀환 #

‘재미있게 흘러가는데?’

이렇게 쉽게 걸려들지는 생각도 못 했다. 잘하면 둘 사이를 이간질하는 정도로 기대했었는데, 당장 전쟁이라도 터질 조짐 아닌가?

‘저놈이 뒤를 밟다, 제 발이 저려 그런가?’

주크버그란 놈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실제로 놈이 약을 가로채려 한 것일 수도 있을테고. 뭐 어찌 됐든, 번에겐 아주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당분간 2황비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것이고.

‘아무래도 좋아.’

불은 지폈으니, 얼마나 활활 타오를지는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거다. 여기서 더 간섭하는 것도 위험할 테고. 번은 우선 집으로 돌아왔다. 혹시 약이 새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해서.

“후우.”

자신만의 공간으로 돌아오자,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벽 한쪽엔 약 포대가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이걸 보릿자루와 바꿔치기하느라, 최근 3일 동안 무덤가를 몇 번이나 오갔는지 모른다. 그는 이마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한쪽으로 가서 목탄을 주워들었다.

아까 2황비의 거처 인근의 땅을 파며 새로운 지하통로의 흔적을 찾은 것이다. 그걸 잊기 전에 기록해두려는 것.

번은 수도 지하에 잠자고 있는 과거의 흔적을 찾아가고 있었다. 이것이 언젠가 누구도 인지하지 못한 자신만의 전용 고속도로가 되어 줄 것이리라 믿었다. 그렇게 되면 그 효과는 어마어마할 것이고.

물론 그대로 쓸 생각은 없었다. 더 정밀하고 들쑥날쑥하게 만들어서 다른 사람은 알아도 쓸 수 없게 만들어야 했다.

“음..”

약 포대를 보며 번은 절로 입가에 침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절로 반응하는 거다. 참으로 강력한 마약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게 도시에 풀렸다면? 그 여파는 짐작도 못 하겠다.

‘내가 좋은 일에 써 주지.’

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도둑질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죄책감은 없다. 그놈이나 저놈이나 죄다 마찬가지니까.

‘천천히 가자. 천천히.’

얼마 전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과다복용하면 몸이 버텨내질 못한다. 200kg에 육박하는 엄청난 양. 서두르다 자칫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한 걸음씩..’

걷다 보면 언젠간 목적지에 도착할 것을 아니까.

.

.

.

얼마 후.

떠났던 아버지가 돌아왔다.

2만의 상급병사와 5천의 친위대, 8만의 일반 병사를 이끌고 동북쪽을 향했던 군대는 포로들을 앞세워 거의 두 배가 넘는 인원으로 불어 금의환향했다.

처음 1년, 군대는 협곡을 뚫고 전승하며 계속 진격했고, 이듬해 여름. 왕실을 완전히 점령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내친김에 그대로 북쪽을 향해 기수를 돌린 철鐵의 군대는 이웃 나라 벨버른까지 함락해버렸다.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황국의 모든 백성들은 승리를 축하하며 마중을 나섰고, 전쟁과 승리의 신 ‘샤’에게 감사를 드리는 3일제가 열렸다.

‘아버지..’

모두가 축제 분위기에 들떠있을 때, 단 한 사람은 그러지 못했다. 번이었다.

이미 황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약도 흡수하고 있었고, 람보르에서 인맥도 넓혀놨다. 현자의 서는 고시를 앞둔 노량진 수험생처럼 하도 봐서 달달 외울 지경이었고, 여러 가지 은밀한 일도 슬슬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이번에도 훌쩍 가시려나? 저번엔 보름만이었지?

-글쎄, 이 기세를 몰아야 하지 않겠나?

-나야 워낙 무지렁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이러다가 진짜 대륙을 통일하시는 거 아니야?

-자네, 대륙이 얼마나 큰지 알고서 하는 말인가?

-나야 모르지.

-에잉, 그럼 조용히나 있게!

사람들은 온통 귀환한 황제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었다. 주 관심사는 다음 목적지가 어디냐 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새로운 황비에 대해서였다.

황금빛으로 치장된 아름다운 대전.

오늘은 황궁의 모든 황비와 자식들이 모이는 날이었다.

지난번엔 없었지만, 이번 회군 때는 두 여자가 황궁으로 아버지를 따라 들어왔다. 한 명은 두 살쯤 되는 아이까지 품에 안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고작 열다섯쯤 되었을까? 번과 나이 차가 크지 않아 보였다. 이번 출정에서 점령한 왕국들의 공주들이었다. 어머니가 과거에 그러했듯, 그녀들도 불편한 얼굴로 인사했다. 우울하고 겁먹은 표정이 확연히 드러난다.

-비앙카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라일락이에요.

아버지는 씨를 뿌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점령지는 혈연으로 묶는다.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왕족은 다 잡아 죽였다. 아버지의 이런 부분을 두고 대륙에선 철鐵의 심장을 가진 사내라 손가락질했지만, 번은 그 말이 딱 맞는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만큼 차가운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이로써 23황비와 24황비가 새로이 추가되었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23황비가 안고 있는 아이는 여자애였다.

‘인구의 4분의 1은 칭기즈칸의 피가 흐른다더니..’

아버지가 지금처럼 승승장구하면 정말 그리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중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아버지가 건드리는 여자는 꼭 타국의 공주만이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번에게 아버지의 성생활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곳을 21세기 한국의 잣대로 바라보는 것도 웃기는 거고, 그 역시 수많은 환생을 거치며 많이 무뎌졌으니까 말이다.

‘실란..’

번이 노려보자, 2황비도 고개를 돌리다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이내 시선을 옮겨지고, 7황비에게 닿은 그녀의 눈에서 불길이 치밀었다. 그간 2황비와 7황비의 사이가 아주 좋지 않다는 얘기가 어머니의 입에서 나올 정도로 둘의 기 싸움은 치열했다. 하지만 지금을 그전에 비할까?

‘잘들 노는군.’

예상대로 두 황비는 서로를 향해 온갖 협잡을 다 하기 시작했다. 7황비는 빼앗긴 물건을 되찾고 싶어 했고, 2황비는 억울했다. 하지만 만나서 대화로 풀어볼 생각따윈 하지 않는다.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었으니, 물에 부은 기름이 순식간에 번지는 것은 당연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노골적으로 변해가는 차에 아버지가 돌아왔다.

“주목하라.”

아버지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리자, 모두의 시선이 한 곳에 모였다. 아버지의 턱엔 전엔 없던 흉터가 하나 생겼다. 이제는 24황비가 된 라일락의 아버지. 그러니까 벨버른 왕국을 점령할 때 생긴 상처라고 했는데, 벨버른의 군주이자 소문난 검사인 페트릭 드 오리온 살룬과 자웅을 겨루다 생겼다고 한다.

전군을 책임지는 지휘관이자 군주가 직접 칼을 쓰다니, 남들이 들으면 미쳤다고 할 테지만, 이것이 아버지의 힘이었다. 군대를 광기에 물들게 하는 원동력. 9강 3중 18소국이었던 대륙은 이제 아버지에 의해 9강 2중 17소국이 되어버렸으니, 참으로 대단한 남자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의 모두가 그걸 알고 있었고.

꿀꺽, 꿀꺽.

사방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태사의에 앉은 아버지는 마치 웅크린 호랑이 같았다.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진 투기가 자연스럽게 뻗어 나오고 있었고, 시선만으로도 사람들을 숨 막히게 하고 있었다.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황자들은 앞으로 나오라.”

뜻밖의 말에 황비들이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번이 가장 먼저 세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자 허둥지둥 다른 황자들이 따라나선다. 애매해진 것은 번의 어머니다. 샨이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샨은 됐소. 아직 이른 것 같으니.”

“예.”

아스트리드가 샨을 안고, 뒤로 조금 물러났다.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고 갸웃갸웃하는 샨의 표정이 참으로 귀엽다. 그 모습에 아버지가 빙긋 웃는 것만으로 주변에서 웃음이 나도록 분위기를 풀더니, 단박에 다시 무거운 목소리로 좌중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본래 재작년쯤 하려고 했으나, 일정이 길어졌다. 그 이유는 모두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회군하지 않고 벨버른 왕국을 치는 바람에 그러했다. 몇 년의 세월은 허비했지만, 아버지는 더 넓은 영토와 백성을 얻었고, 황비를 늘렸다. 누군가의 말처럼 전쟁을 위해 태어난 남자라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해서, 경연競演을 시작한다.”

“······!”

“······?”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릴 때, 아버지는 쐐기를 박으셨다.

“이제 후계後繼를 정해야 할 때가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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