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은 틈 #
그날 밤.
번은 다시 그 수상한 지하에 와 있었다.
통로마다 경계가 철저했지만, 땅을 파서 이동하는 번을 예상하는 자는 없었다. 누가 상상이나 할까? 이 작은 몸이 지렁이처럼 흐물거리며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확실히 대단한 마약임엔 틀림없어.’
방 하나에 도달하자, 어제완 다른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부랑자로 보이는 늙은 남자가 약을 조금씩 투약받고 있었는데, 코로 빨려 들어가자 인세의 근심·걱정이 모조리 사라진 표정으로 사지를 떨어대고 있었다.
“오늘까진 다 끝내야 해.”
“알아, 알고 있다고.”
잠시 지켜보던 번은 고깔모자 사내들의 대화를 멀리하며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이 녀석들의 주인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 약을 제국으로 가져갈 생각인 것 같다. 확실히 에비뉴보다는 부자도 많고, 중산층도 두꺼운 제국에선 이런 약의 수요가 많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이제 막 황국으로 올라선 에비뉴가 개발도상국 정도라면 제국은 완성된 미국이다. 400년이나 제국으로서 다져진 기술과 문화, 자본은 인접국과는 상대도 안 되는 부와 예술을 축적하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번은 이제 고작 아홉 살이다. 특별한 세력도 없고, 아직은 몸을 사려야 할 때라는 걸 직시하고 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성장할 때까지의 시간이었으며 과한 행동은 삼가야 했다.
‘대외적인 위험을 감수할 순 없어.’
집정관이나 법무장관쯤 되는 자에게 슬쩍 정보를 흘려볼까 하다가도 그리해서 얻는 게 없었다. 자칫 역추적 당할 수도 있었고. 그렇다고 2황비가 잘되는 꼴은 못 봐주겠으니..
‘어쩐다..’
번은 지금 창고 비슷한 곳에 서 있었다. 보라색 가루를 상자에 넣고 차곡차곡 쌓아둔 곳이었는데, 수레 하나에 가득 실릴 정도로 양이 많았다.
‘아직 시간은 있으니.’
생각을 정리한 번은 자루 하나에 가루를 2kg정도 담아, 그곳을 나왔다. 이 약의 제조법 같은 것을 입수하면 좋겠지만, 그건 아직 요원한 일 같다.
‘전부 옮길 순 없겠고.’
오늘처럼 많은 양이 아니라면 남은 시간 동안 조금씩 빼돌릴 순 있을 것 같지만, 이게 반복되면 분명 눈치를 챌 것이 분명했다.
우선 자신만의 공간으로 돌아온 번.
가루를 앞에 놓고,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불을 질러버려?’
문득 떠오른 생각이지만, 이내 접는다.
보통 이런 약들은 불에 약하고, 휘발성이 강해 불이 크게 번질거다. 게다가 오갈 때 없는 지하. 수상한 놈들을 일망타진할 기회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이쪽도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불이 붙어 연기가 나면 어떤 작용을 할지도 모르고, 자칫 통구이가 될 수도 있다.
“흐음..”
번은 다시 생각에 잠긴다.
이 가루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분명 돈이 되니까 이걸 만든 놈이 있을 거고, 실란 역시 빼앗으려 하는 거겠지.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번 역시 언젠가 많은 돈이 필요할 때가 올 것은 분명하다.
'이걸 이용할수만 있다면, 그보다 좋은게 없을텐데..'
일단 이 약이 어떤 효능을 지녔는지는 실험을 통해 봐왔다. 지나치게 쓰면 완전 맛이 가버릴 정도로 강력한 효과를 지녔으며, 소량을 쓰면 아까 그 부랑자처럼 쾌락만 느끼는 것 같다.
“······.”
지그시 보라색 가루를 보던 그.
스윽 손을 가져갔다.
이미 독이나 저주 따윈 몸이 버틸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조금만.’
한 꼬집 혀에 가져가 본다.
놈들의 실험실에선 이런 방식으론 복용시키지 않았지만, 뭐든 일단 입에 넣고 보는 번이었기에, 작은 도박을 감행해본다.
「혼란 내성이 발동합니다.」
「환각 내성이 발동합니다.」
「신경이 마비되었습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돌연, 아드레날린과 엔도르핀이 무섭게 솟구치는 게 느껴졌다. 각종 내성이 번의 정신과 육체를 방어하고 있었지만, 그조차 뚫고 들어오는 강력한 성분이 번의 얼굴을 구겨지게 했다.
“이, 이런..?”
목구멍으로 넘어간 약이 문제가 아니었다. 잇몸과 혀가 흡수한 약이 미세혈관을 따라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게 뇌를 때릴 때 번의 입에선 침이 질질 흘러나왔고, 통제를 잃은 거미줄이 3개의 침샘에서 모차렐라 치즈처럼 늘어졌다. 거기에 송곳니가 자란다. 순식간에 고인 독이 방울져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흐으, 흐으..”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했다. 마약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으니, 다 이런 건가? 생각이 들다가도 이랬다면 21세기 지구는 멸망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고작 한 꼬집으로 아무 생각도, 어떤 대항도 할 수 없이 무력화시켜버리는데.
「해독이 완료되었습니다.」
「성분 분석이 완료되었습니다. 이제 같은 효과에 대해 좀 더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화학물질 2종을 흡수했습니다.」
「새로운 성분 3종을 흡수했습니다.」
“후우..”
번은 모르고 있었다. 번은 그나마 한 꼬집의 양이었지만, 3g의 양이면 성인 남성을 즉사시킬 수 있는 약이라는 걸. 물론 혈관으로 직접 투약했을 때의 기준이지만, 9세 번에겐 아주 미량으로도 치명적이었다는 거다.
그런데도 그걸 이겨냈다. 게다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물질이 대거 몸속으로 들어오며 그의 신체가 묘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시신경이 향상됩니다.」
「동체 시력이 활성화됩니다.」
「세밀한 기관의 성장이 가속합니다.」
환생을 거듭하며 얻은 번의 능력은 수백, 수천 가지가 그의 육체와 정신에 잠들어 있었다. 흙을 먹지 않으면 지렁이의 흡수 능력은 발동하지 않듯, 몸에 상처를 입어보지 않으면 파충류의 재생능력을 확인할 길이 없듯 말이다. 그렇게 모든 능력은 선행되어야 할 방아쇠가 있었는데, 인간이기에 불가능한 것도 존재했다.
날개가 없는데, 비둘기의 비행능력이 발동할 순 없지 않나? 수컷 포유류로 태어나서 개구리처럼 알을 낳을 순 없는 것 아니겠는가?
기이이이이잉-
그런 능력 중의 하나가 깨어났다.
번은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약의 성분이 그의 뇌와 육체의 특정한 부분을 자극해 인간은 가질 수 없는 재능을 선물했다. 그리고 이건 번이 고양이로 태어나 아주 짧은 생을 살았을 때 얻었던 「동체 시력」이 발현되는 것이었다.
동그란 것이 아닌 세로로 길게 찢어진 눈동자. 모든 사물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손을 들어보아도 느린 화면으로 재생해놓은 영화처럼 현실감이 떨어진다.
“대단해..”
이런 결과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약이 도움되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거기에 추가적인 정보도 얻었다. 성분의 이름은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뭐로 만들었는진 앞으로 먹어보면 알 거다. 물론 조제법과 배합법을 알아야 만들어낼 수 있겠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큰 소득이었다.
“으음..”
고통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강렬한 쾌락에서 깨어난 번은 침을 꿀꺽 삼키곤 다시 가루에 손을 가져갔다. 조금 전과 비슷한 양이었지만, 이번엔 입이 아닌 코로 마실 생각이었다. 실험실에서 그렇게 투약하는 걸 봤으니까.
번은 잠시 멈짓하는가 싶더니,
“흐읍..!”
들이마셨다.
그러자 뇌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수억의 뉴런이 일제히 깨어나는 기분. 그의 동공이 한껏 커졌고, 고개는 위를 향해 치켜 졌다.
그러면서 본다.
기억 속 어딘가의 지점을 또렷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