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상이몽 #
번은 고민했다.
여기서 포기해야 할까? 아니면 좀 더 뒤를 밟아보아야 하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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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인가요?”
실란이 의외라는 듯 주크버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드레스를 손질하던 시녀에게 턱짓으로 나가라고 하며 사내를 빤히 보았다.
“지식의 거울에 레인보우 립에 관해 검색된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요?”
실란은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잠시 사내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요?”
뭐가 문제냐는 뜻이다.
주크버그는 순간적으로 입맛을 다셨다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저쪽에서 자료를 뒤질 이유가 없으니, 제삼자가 끼었을 확률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깁니다.”
“흐음, 그렇군요. 그럴 수도 있겠어요. 하지만 아닐 수도 있는 거죠?”
“그렇긴 합니다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미 진행하고 있는 일을 멈출 순 없어요. 고 앙큼한 계집이 승승장구하는 꼴은 못 봐주니까. 게다가 잘된 거 아닌가요? 우리 말고 다른 누군가가 개입하려고 한다면 그쪽에 뒤집어씌울 수도 있는 거잖아요?”
주크버그가 놀란 듯 끄덕였다.
확실히 그건 꽤 좋은 수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나? 실란은 가면 갈수록 모략과 정치에 능숙해져 가고 있었다.
“물건만 확보하면 뒷일은 어떻게든 끼워 맞추면 돼요. 그것만 차질없이 진행하는 것에 집중하세요.”
“알겠습니다.”
실란은 배시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크버그의 앞에 다가섰다. 그녀의 손이 살며시 올라 그의 턱을 매만졌다.
“나는 당신이 걱정이에요. 그 용병이 무척 강하다던데.”
7황비의 수작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 멍청한 것이 대놓고 수도 인근 농부들에게 레인보루 립 따위를 재배하게 하는데, 당연히 이상하지 않나? 참으로 보잘것없어 관상용으로도 안 쓰는 꽃을 말이다.
“충분히 준비하고 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정은 변함없는 거죠? 벨버른의 그 보이른 나무 군락지.”
“예, 그곳이 놈의 무덤이 될 것입니다.”
주크버그의 손이 그녀의 작은 손을 감싸 쥐었다. 둘의 시선이 뜨겁게 맞부딪혔다.
그때. 똑똑똑-!
노크. 화들짝 두 사람이 멀어지고, 실란의 목소리가 뾰족하게 울렸다.
“누구야?”
-어머니. 카이사르입니다
주크버그와의 시간을 방해받아 표독하던 그녀의 얼굴이 봄눈 녹듯 화사하게 풀렸다.
“나가보세요.”
“예.”
문이 열리고, 주크버그와 카이사르가 교차했다. 서로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스쳤다.
카이사르.
실란의 장남이자, 에비뉴의 차기 황제로 지목되는 가장 주목받는 황자. 평민 출신의 실란을 지지하는 백성들도 많았기에 카이사르 역시 그 후광에 힘입어 인기가 많았다.
“우리 아드님, 이런 시간에 어쩐 일이신가요? 검술 연습할 시간 아니던가요?”
실란은 벌써부터 아들에게 말을 높이고 있었다. 이건 아들이 황제가 될 것을 한점도 의심하지 않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제가 소문을 하나 들어,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아 확인차 들렀습니다. 어머니.”
실란은 갸웃하며 근심 어린 표정으로 아들의 뺨을 손으로 훑었다.
“무슨 소문이 우리 아드님을 심란하게 했을꼬?”
“..아버지께서 돌아오신다는 것이 진짜입니까?”
잠깐 멈칫했던 실란이 화사하게 웃었다.
“그렇답니다.”
“왜..”
제게 미리 말씀 안 해주셨습니까? 라는 눈빛의 카이사르를 보며 실란은 미소 지었다.
“알아서 달라질 게 있나요? 그분의 눈에 들기 위해선 지금 이런 잡담을 나눌 시간조차 아껴야 한답니다.”
카이사르의 미간이 움푹 팼다.
“저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건 이 어미가 누구보다 잘 알지요. 하지만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잖아요?”
“저는 강합니다. 어머니. 다른 형제들은 제 발끝도 따라오지 못할 겁니다.”
카이사르는 황자들 사이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다. 어려서부터 실란에게 독하게 교육받았기에 성취도 빨랐다. 하지만 실란은 만족하지 못했다.
-왜 웃는 것이냐?
-70권이라면 4번 읽었사옵니다.
-뭐라?
아마도 그날 이후 더 조급해져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그 꼬마놈이 아비에게 인정받으려고 거짓말을 했다 생각했는데, 지켜보면 볼수록 아주 묘한 놈이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그건 천재성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는 5살 때 그리 못했으니까. 그 말은 놈이 카이사르의 나이가 되면 훨씬 더 앞설 것이란 말과도 같다. 황제가 그걸 모를 리도 없을 테고.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자만이랍니다. 특히 큰일을 할 사람에겐 더더욱!”
실란은 아들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표정을 바꾸었다. 웃음기는 사라지고, 근엄함만 남았다.
“더 노력하세요. 그 누구도 당신의 그림자조차 밟을 수 없을 만큼 멀리 가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너는 아직 멀었다. 그런 뜻이었다. 아들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감히 어머니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그녀가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기 때문에.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아들을 꼭 안아주고 등을 토닥였다. 그러면서 실란은 생각한다.
‘노력하세요. 그래도 안 되면 나머지는 이 어미가 해결해 줄 것이니.’
내 아들보다 뛰어난 놈이 있다? 답은 이미 나오지 않았나? 싹을 잘라버리면 된다. 그리하면 다시 2등이 1등이 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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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란의 처소에서 약 1km 떨어진 담벼락 아래.
“…….”
부스럭거리며 땅이 들썩였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묘한데?’
번이었다.
그의 청각이 아슬아슬하게 미치는 지점. 운 좋게도 실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게다가 그놈, 카이사르의 것까지 함께.
-네놈은 누구냐? 여기가 어디라고 그 누추한 발을 디디느냐?
-번이라고 합니다. 황비께서 부르셔서 왔습니다.
-네가 그 번이라고?
몇 년 전 실란이 청해 처음으로 이곳에 왔을 때, 카이사르와 마주쳤었다.
번은 잊지 못한다. 그 오만하고 높은 콧대 위의 눈빛에서 쏟아지던 경멸의 시선을. 뭐, 그런 놈 신경 쓸 시간조차 아까웠기에 빠르게 잊고 지금 중요한 것에 다시 집중한다.
‘실란이 직접 도모하는 일이 아니었나?’
그들의 대화로 유추해 보건대, 실란은 아마도 누군가의 뒤통수를 치려고 계획 중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번은 빠르게 집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와서 침대 아래 자신만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슥슥슥.
그새 잊힐까, 목탄을 잡고 서둘러 벽에다 아까 거울에서 본 비밀통로를 그려 넣었다. 그리곤 작업을 마친 뒤, 구석으로 가서 망치를 잡아 들었다.
‘그 실란이 노리는 물건이라면 분명 큰 가치가 있겠지.’
그게 정확히 뭔진 몰라도 그년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꼴은 못 보겠다.
‘시간이 별로 없어.’
두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곧 아버지가 돌아오신다. 은사에게서도 확인했고, 오늘 실란의 입에서도 그리 나왔다. 그렇다면 이건 기정사실이란 얘기다.
또 하나.
‘더 강해져야 해.’
번이 선반에 왼팔을 올렸다.
그러더니 오른손에 든 망치를 사정없이 내리친다. 팔뚝을 향해서 말이다.
퍼억-!
“크윽..”
「고통 내성이 발동합니다.」
살이 찢어질 정도로 큰 충격이었고, 으아아악! 비명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아팠지만, 번은 꾸욱 참았다. 그리곤 고통이 가실새도 없이 다시 망치가 같은 부위로 떨어졌다.
“크..”
처음보단 줄어든 신음이 흘렀다.
일반인이라면 상상도 못 할 행동을 하고 있는 번의 눈빛은 아주 진지했다.
퍽퍽퍽.
하얀 뼈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망치질해댄 번이, 이를 악물고 잠시 심호흡을 했다.
“후우..”
독을 계속 먹었더니, 독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 작은 단서에서 시작된 행동.
「피부가 재생합니다.」
「혈관이 재생합니다.」
「뼈가 재생합니다.」
번은 그만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