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치 #
거울이 세상 모든 지식을 아는 건 아니었다. 이건 뭐랄까, 일종의 컴퓨터로 보면 된다. 도서관이 보유한 책의 정보를 기록한 일종의 저장장치. 30만 권이나 되는 책을 다 뒤질 순 없으니, 거울에 물어보는 편이 더 빨랐다.
“레인보우 립으로 뭘 만들 수 있지?”
마법은 참으로 편리하다.
버퍼링도 없이도 거울은 곧장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해낸다.
-고대의 대마법사 카이져 이드그라실의 연구에 의하면 레인보우 립이 보라색 꽃잎으로 변할 때 특수한 성분을 품는데, 그것이 인간이나 동물의 중추신경을 교란하는 작용을 한다는 기록이 있음. 관련 연구가 7건 진행되었으나 이렇다 할 결과는 도출되지 않았음.
‘중추신경 교란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마약이 맞는 것 같다. 특별한 약을 개발한다고 하기엔 놈들이 너무도 수상했으니까.
번은 다시 묻는다.
“이 보라색 가루에 대한 것은?”
번이 본 이미지가 다시 작은 빛으로 변해 거울로 스며들었다.
-관련 정보 없음.
“이 정도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약에 대한 것은?”
아까 고블린이 죽어가던 이미지도 떠올렸다.
-유사한 약물에 관한 12건의 정보가 있지만, 일치하는 것은 없음.
“음..”
번은 잠시 턱을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이곳에 너무 오래 머물 순 없었다. 자리를 오래 비우면 의심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을테니.
‘역시 좀 더 정보를 모아야 하나?’
이왕 온 김에 다른 것에 관해 묻기로 했다.
“공동묘지 지하에 굴이 있던데, 이것에 대해 자료가 있나?”
답은 바로 나왔다.
-에비뉴 왕국 건국 당시 초대 왕은 수도 지하에 많은 비밀통로를 뚫은 것으로 유명한데, 그것의 일부가 아직도 남아 있다는 설이 있음.
“비밀통로?”
-반역과 반란이 빈번했고, 왕좌를 지키기 위한 정통성이 부족했던 초대 왕은 편집증에 시달려..
“아아, 그 통로에 관한 더 자세한 자료는 없어? 지도라든지.”
-관련 자료 801건이 있음. 완벽한 전도는 없음.
그때였다.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번의 예민한 청각에 잡혔다. 번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자세한 자료만 띄워.”
-46건의 자료 검색됨.
거울에 책의 한 부분들이 떠올라 빠르게 지나갔다.
그건 대부분 어떤 기록이었다. 몇 년도에 공사하다 지반이 무너졌는데, 굴이 나왔다더라. 언제 홍수가 났는데, 물이 흐르는 지하의 통로가 있었다더라. 같은 것들 말이다. 빠르게 머릿속에 넣고, 문에 바짝 다가섰다.
뚜벅 뚜벅 뚜벅.
누군가 걷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번의 이마가 가볍게 굳어졌다.
번이 사람을 기억하는 방식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족적足跡이나 발걸음은 지문과도 같아서 각기 전혀 다른 고유의 성질을 보인다. 얼굴이나 체형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음성, 특징, 걸을 때 나는 소리 따위를 전부 포함한다. 당연히 이 도서관의 관리자들은 모조리 번의 머릿속에 있었고, 은사가 보낸 그 감시자도 그렇게 파악해왔다.
하지만 저 발걸음은 낯설다.
“자료 지워.”
번의 작은 목소리에 거울이 다시 처음 상태로 돌아갔다. 번은 빠르게 이동했다. 하지만 복도로 나갈 순 없었다. 게다가 발소리는 더욱 가까워져만 가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창문으로 나가는 번. 밖에 매달려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잠시 후, 번이 있던 방문이 열리고,
“…….”
한 사내가 방으로 들어왔다.
딱딱한 표정의 중년 남자였는데, 그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더니 거울 앞에 섰다.
“대지의 모든 지식에게 묻겠다.”
그는 팔짱을 끼고 말했다.
“벨버른이 에비뉴에 함락되어 국경이 사라졌다. 제국까지 가장 빠른 루트가 어디지?”
-안전한 길과 빠른 길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 정해야 함.
“빠른 길.”
거울에 지도가 하나 펼쳐졌다.
그러더니 빨간 점이 지도 위에 찍히기 시작했다.
“예상 소요시간은?”
-말을 타면 79일. 도보는 177일 예상됨.
“흠..”
사내는 잠깐 고민했다.
더 빠른 루트가 없나 알아보러 왔는데, 그가 기존에 짜둔 것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제국의 통관 절차는 변경사항이 없나?”
-특별히 달라진 점에 대한 정보는 없음.
“그렇군.”
그는 헛수고했다는 표정으로 몸을 돌리다가, 문득 얼굴만 돌려 물었다.
“미라클 레인보우에 관한 자료가 있나?”
이 도서관은 하루에도 수많은 정보가 들어온다. 대륙 각지에서 상인이나 여행자들이 책을 팔러 오기도 했고, 황제가 타국을 정복할 때마다 그곳의 책이 죄다 넘어오기도 했다.
-없음.
노파심이었다.
피식.
그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하지만 거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레인보우 립에 관한 검색은 두 건 있었음.
“……?”
사내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언제? 누가?”
-사용자에 대한 정보는 공개 불가. 열람 시기에 관한 정보 역시 공개 불가.
순간, 거울을 깨버리고 싶은 마음이 울컥 들었던 사내였지만, 짜증을 꾹 참고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러다가 후다닥 창가로 뛰었다.
벌컥! 연 창문.
그의 머리가 휙휙 사방을 훑었다.
휘이이이잉-
바람에 그의 머리칼이 흔들렸다.
깎아지른듯한 절벽처럼 솟은 탑이다. 동아줄 같은 것의 도움 없인 쉽게 오를 수 없으리라.
“..바람이었나?”
분명 어떤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잘못 들었나 보다. 그보다..
‘누가 레인보우 립을 검색한 거지?’
여러 가능성은 많다. 최근 수도 인근 농부들에게 레인보우 립은 짭짤한 수입원이었으니까. 누가 단순히 호기심에 알아봤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문제가 생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레인보우 립이 필요한 곳은 오직 하나였으니까.
“크흠.”
그는 창문을 닫고 서둘러 방을 나섰다. 아무래도 이 건에 대해선 상의가 필요할 것 같았다.
.
.
.
“샨, 형이 잠깐 가야할 데가 있으니까, 여기서 얌전히 책 보다가, 점심 되면 할아버지께 데려다 달라고 해. 알았지?”
“응? 어디 가는데? 금방와?”
“응, 금방와.”
번은 샨의 머리를 헝클며 웃어주곤, 빠른 걸음으로 도서관을 나섰다.
‘저 사람이야.’
번의 눈이 한 사내의 등판에 박혔다. 아까 그 거울의 방에 있던 남자다.
‘그때 그놈이다.’
번은 기억한다. 아주 오래전 융이라는 마녀의 집구석에서 거미로 태어났을 때, 창밖으로 보았던 남자. 벌써 아득히 먼 옛날 일이었지만, 번의 기억력은 아주 비상했다. 어떤 장면을 포착하면 잊고 싶어도 잊히질 않았다.
-이미 끝난 얘기에요. 이럴 거면 가세요!
-으음..
-우릴 위해서라는 거 알잖아요. 주크버그. 나는 꼭 해야 해요.
기억을 더듬자, 사내와 관련된 장면이 떠올랐다. 어떤 여자와 마녀의 집을 찾아왔던 사내. 그 사람이 왜 여기에 있지?
‘지식의 거울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사람과 커넥션이 있어. 저자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수도에서 그런 권력을 도모할 수 있는 당장 떠오르는 인물은 집정관이나 세가 강력한 황비들 혹은 람보르의 관리 몇이었는데, 정확히 특정할 수 있는 정보가 없었다.
‘생각하자. 생각. 이건 기회야. 내가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바뀔 수도 있어.’
거리를 한참 벌린 뒤 사내의 뒤를 밟았다.
이미 그의 특징은 머릿속에 넣었기에 시야에서 잠시 떨어진다고 놓칠 염려는 없었다. 와글와글 오가는 사람도 많았고, 설마 9살짜리 꼬맹이가 뒤를 밟을 거란 생각은 꿈에도 못할 것이기에 번의 표정은 느긋했다. 물론 속은 바짝 긴장해 있었지만 말이다.
‘음? 여기는?’
약 1시간 15분쯤 걷자, 사내가 한곳을 향했다. 번도 너무도 잘 아는 곳.
‘역시 궁인가?’
황궁이었다.
그런데 그의 목적지는 너무도 뻔한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번도 몸을 사려야만 했다.
2황비 실란의 처소.
그곳으로 향하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그년의 수작이었나?’
번의 발이 우뚝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