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밀의 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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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온 번은 하루를 준비했다.
간밤에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은사의 정체를 확인했고, 수상한 사람들도 봤다. 그들이 무얼 하는진 모르겠지만, 결코 옳은 일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랬다면 그렇게 숨어서 일을 도모할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번! 일어났니? 아침 먹어야지!”
"네, 가요!"
어머니의 목소리에 번은 크게 대답하며 아침을 시작한다. 식탁은 단출했다. 어머니가 과소비를 하는 타입도 아니었고, 아침은 언제나 가볍게 시작했기에 빵과 채소 수프가 전부였다.
“형, 오늘도 나가?”
"응? 왜?"
이제 제법 자란 샨. 핏줄이 좋아서 그런지 샨도 영특했다. 다른 아이들은 한창 뛰놀 시기에 녀석은 벌써 책을 읽기 시작했달까. 하지만 그건 일반인 기준에서 말할 때고, 이미 번이라는 괴물이 옆에 있으니 그저 아이로 보일 지경이었다.
"오늘은 나랑 같이 놀면 안돼?"
샨은 형인 번을 무척 따랐다.
하지만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쓰는 번. 어린 동생과 놀기엔 너무도 바빴다. 그런데 그런 번이 뭔가를 생각하는지 눈을 가늘게 떴다가 말했다.
“같이 할아버지 보러 갈까?”
“진짜?”
샨이 놀라 눈을 크게 뜨자, 번이 어머니를 보았다. 허락을 구하는 눈빛이었다.
“할아버지 바쁘실 텐데..”
“늘 그러시잖아요. 그러니 틈틈이 뵈면 좋죠.”
번은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웠다. 어린 동생을 맡긴다고 해도 불안하진 않다. 문제는 할아버지가 귀찮아할지도 모른다는 거였는데, 번이 재차 말하자 어머니의 표정도 풀렸다.
“할아버지께서도 샨을 보면 좋아하실 거에요.”
"그래, 그렇게 하려무나."
"와아!"
-다녀오겠습니다!
잠시 후, 집을 나선 두 꼬마는 손을 꼭 잡고 길을 걸었다.
번이야 숱하게 람보르를 드나들었으니 이젠 눈감고도 찾아갈 수 있었지만, 샨은 처음이었다. 한국이었다면 이제 유치원에 갈 나이. 하지만 집에서만 자랐던 샨은 에비뉴 황국 최고의 정부기관에 들어서자, 입을 떡 벌리고 눈이 휘둥그레 주변을 둘러보기 바빴다.
엄청난 규모와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거기에 마치 이곳의 일부라도 된 듯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인사하며 나아가는 형의 모습은 정말이지 멋졌다.
“번 왔구나.”
람보르의 총책임자라 할 수 있는 요만이 번을 보며 웃었다.
“오! 네가 샨이냐? 엊그제 태어났다고 들은 것 같은데, 벌써 이렇게 자랐느냐?”
황자라곤 해도 아직 꼬마들. 여기서 조선이나 영국 왕실의 예법을 찾으면 곤란하다. 에비뉴는 에비뉴만의 문화가 있으며 다른 제국들도 각기 그들만의 독특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머리를 꾸벅 숙이며 예를 갖추는 샨을 요만이 귀엽다는 듯 허허 웃으며 반겨주었다. 그런데 샨은 아까부터 뭐가 그리 궁금한지 한쪽으로 계속 눈길을 주었다.
정령이다.
“물의 정령을 처음 보는구나?”
“네!”
요만은 빙긋 웃었는데, 그의 입꼬리엔 장난기가 매달려 있었다.
“본래 이 정령은 법무차관 집무실에 있던 거란다. 4년 전까지만 해도 관리들의 방에 하나씩 배정되어 있었는데, 어떤 똘똘한 녀석 덕분에 이렇게 모두가 사용할 수 있게 바뀌었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번을 바라보는 요만이다.
“그래서 이젠 출퇴근길에 다들 여기서 몸을 씻고 가는 진풍경이 펼쳐진단다. 허허허! 줄까지 선다니까?”
말이 길어질 것 같자, 번은 냉큼 샨의 손을 잡았다.
“올라갈게요!”
“그래라! 또 보자! 샨!”
실제로 4년 전, 번이 황제에게 보낸 편지 덕분에 람보르의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정령은 효율적으로 배치되었고, 구조도 변했다.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민원실이 1층에 집중적으로 자리 잡았고, 갑옷 입은 기사들의 발걸음 때문에 층간소음에 시달리던 어떤 남자는 탈모가 나았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똑똑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나비효과처럼 시작된 개선의 바람은 이제 매년 ‘어제보다 나은 내일’ 혁신총회가 열릴 정도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졌고, 그 이면엔 번이 있었다. 물론 대놓고 나서진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조금씩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가령, ‘강당이 두 개일 필요가 있을까요? 시간표만 제대로 짠다면 하나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요. 놀리는 시간이 너무 많다고 생각해요.’ 같은 의견을 슬쩍슬쩍 흘리는 거다. 어린 아이의 의견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가도 불현듯 다시 떠올리면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니, 한국의 선진 시스템이 조금씩 여기 람보르에 녹아들고 있게 되었다.
“할아버지이이이!”
계단을 올라 3층으로 가서 오른쪽 벽의 4번째 문이 열리자, 샨이 펄쩍 날아올랐다.
“어이쿠! 이 녀석! 할애비 허리 부러지겠다!”
말씀은 그렇게 하시면서도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샨을 받아들었다.
“어쩐 일이냐? 한동안 뜸하더니. 용돈이라도 필요한 게냐?”
샨이 신기한 듯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하자, 할아버지는 번에게 묻는다.
“아니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푼돈조차 요구한 적 없는 번이다.
“할아버지 보고 싶어서 왔죠.”
히죽 웃는 번을 보며 할아버지는 미소 지었지만, 머리를 흔들었다. 요 똑똑한 녀석이 아무 이유 없이 찾아오진 않았을 거란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다. 번은 자신이 9살 꼬마라는 것을 100% 이상 충분히 이용하고 있었으니까.
“도서관에 갈테냐?”
“예. 헤헤.. 샨도 좋아할꺼예요. ”
“고작 네 살인데, 무슨. 네가 가고 싶어 그러지?”
"진짜예요! 요즘 샨이 볼 책도 필요하구요."
할아버지는 샨을 힐끔 보았다.
저 나이 때부터 책을 가까이하는 것은 분명 좋은 경험이 되리라. 번의 진짜 속을 모르는 할아버지는 동생까지 챙기려는 번이 의젓하기만 하다.
“가자. 지금은 한가할 것이니.”
21세기와는 다르게 이 세계엔 책이 아주 귀했다. 일단 문맹률이 50%를 가볍게 넘겼고, 인쇄기술도 발달하지 않아 만 원짜리 한 장 들고 서점에 가면 원하는 것을 집어올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이 아니었다. 그래서 귀한 책들은 따로 보관하며 삭지 않게 관리해야 했고, 열람할 수 있는 사람도 제한되어 있었다.
물론 황자쯤 되는 번이라면 출입할 수 있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번은 그렇게 단순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오늘도 지켜보고 있구나.’
할아버지의 사무실에 들어가며 잠깐 끊겼던 ‘시선’이 계단쯤 오자 다시 붙었다. 저게 은사가 보낸 감시자라는 것을 이제 알았으니 더욱 조심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은사는 그 2황비와는 전혀 다른 사람일 테니까.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지금은 그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네가 좋아하는 동화책도 잔뜩 있어.”
“우와! 진짜?”
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번은 할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이 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꼬마 형제다. 하지만 번의 머릿속을 조금이라도 들여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놈들이 무슨 짓을 하는질 알아야 해. 그걸 이용할 수도, 밀고할 수도 있겠지. 어느 쪽이 더 도움되는진 정확하게 따져봐야 한다.’
번의 외가엔 힘이 없었다. 자산도 없고, 권력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져 있었다. 이런 상황을 반전시킬 기회가 되어줄지도 모르는 사건을 목격한 지금, 아주 냉정하고 차분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지하에 1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동원해 모종의 일을 꾸밀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누굴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소란피우면 안 된다. 알겠지?”
“네!”
람보르 본청 옆엔 따로 탑처럼 생긴 도서관이 자리해 있었다. 약 30만 권 이상을 보유하고 있었고, ‘학문’과 ‘지식’을 중요시하는 황제의 성향에 따라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기관이기도 했다. 이미 여러 번 드나들었기에 번은 관리자들과 인사를 나누며 도서관 안쪽으로 걷다가 샨에게 동화책 10권을 골라준 뒤 의자에 앉게 했다.
이때 ‘시선’이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됐어.’
감시자도 알 것이다. 번이 도서관에 한 번 자리 잡으면 4시간이고 5시간이고 계속 몰두한다는 것을. 꼬마들이 책 보는 걸 지켜보는 것만큼 지루한 일도 없을 테고..
“다들 조용히 책 보는 거 보이지? 절대 떠들면 안 돼.”
“응!”
이제 막 글을 읽기 시작한 샨이 무섭게 동화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녀석도 나이답지 않게 영민했다. 어려서 영재를 구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저 집중력의 차이니까.
“형도 볼 책 골라 올게. 얌전히 있어.”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번은 웃으며 샨의 머리를 헝클어준 뒤 계단을 올라갔다. 탑은 총 7층으로 이뤄져 있었는데, 층마다 화장실이 있었다. 그렇다고 깔끔한 양변기가 비치되어 있을 거란 착각은 버려야 한다. 여긴 아직도 대부분이 재래식 변소를 쓰니까. 일정량이 쌓이면 퍼내야 하는 그런 구조 말이다.
화장실로 들어간 번은 빠르게 기척을 살피며 옷을 벗었다. 볼일이 급해서 온 것이 아니다. 그에겐 다른 목적이 있었으니까.
드르르륵.
바닥 한쪽을 들추자, 작은 공간이 나왔다. 거기에 옷을 찔러넣고, 재빨리 창문으로 다가선다. 그러더니 휘익! 단숨에 뛰어올라 밖으로 나갔다.
무려 10미터가 넘는 높이. 내려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오싹하게 저릴 위태로운 곳에서 난간 하나 없이 번은 잘도 옆으로 슬금슬금 이동했다. 어느새 그의 손과 발엔 거미줄이 붙어 있었다. 그러더니 7층 높이까지 대각선으로 올라서 한 곳으로 쏘옥 도마뱀처럼 들어갔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고작 5분여.
기막힌 움직임이 아닐 수 없었다.
“휴우..”
하지만 긴장을 놓을 순 없었다. 누가 보기라도 했다면 위험했을 테니까.
번은 잠깐 서서 주변의 기척을 감지해보았다. 그의 청각은 사방으로 뻗어갔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번이 복도 하나를 지나 안쪽으로 돌아 들어갔다.
7층.
이곳은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는 곳이다. 집정관의 직인이나 도서관장이 허락한 자에 한해 출입이 제한된 곳이었다.
번의 걸음은 아주 특이했다. 아주 조심해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속도는 뛰는 것처럼 빨랐고 발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 걸음 하나에도 그의 각종 능력이 전부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스윽.
원하는 곳에 도착한 번이 마지막으로 주변을 살피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통제구역이라곤 해도 보물 따위가 있는 것은 아니어서 잠겨있거나 하진 않았다. 기사들이 대거 호위하고 있는 람보르 바로 옆 건물에 도둑질하러 들어오는 간 큰 사람도 없을테니 말이다.
할짝.
입술에 침을 바른 번이 한곳에 섰다.
벽에 걸린 큰 거울이 번을 반겼다.
거울은 괴상했다. 크기가 그의 2미터에 달했고, 분명 거울인데 번의 모습을 비추질 않았다. 대신 어두운 밤하늘처럼 면이 꾸물거리며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대지의 모든 지식에게 묻겠다.”
번의 목소리가 흐르기 시작하자, 거울이 반응했다. 왜,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이쁘니? 라고 물었던 동화 속 여왕의 그것처럼.
“이 꽃이 뭐지?”
번이 새벽에 본 것을 떠올리자, 그의 이마에서 작은 빛이 하나 떨어져나와 거울로 흡수됐다. 그러자 거울 속에 꽃 한 송이가 피었다. 아까 번이 그 수상한 지하에서 몰래 훔쳐본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레인보우 립.
거울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