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두 #
지하엔 꽤 크고 깊은 공간이 있었다.
자연적으로 물이 드나들며 생긴 공간을 인공적으로 손봐서 넓힌 것 같은데, 성인 남성 30명쯤 움직여도 전혀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게 하나가 아니다. 사방으로 굴이 뚫려 있는 것을 보면 다른 곳에도 이런 방들이 있거나 혹은 여기로 오는 통로가 더 많을 거라는 말이 된다.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어.’
놈들이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최근일 것이다. 번이 그걸 확신하는 것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일단은 그들이 사용하는 도구들에서 오는 새것 느낌이었다. 하나하나 고장 나서 교체했다고 보기엔 전체적으로 너무도 말끔한 것이다. 또한, 수많은 선반과 장欌, 의자 같은 것들은 곰팡이 하나 쓸지 않았다. 유리병들도 깨끗했고.
번은 주변을 꼼꼼하게 훑으며 생각했다. 등불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는 사내들은 그리 교양있어 보이지 않았다. 차림과 생김만 봐도 어디 시장통에서 주먹질이나 하며 살아가는 양아치들 같았다. 그런 놈들 중간중간에 초승달처럼 끝이 길고 휜 고깔모자를 쓴 사내들이 드문드문 보였는데, 아무래도 저놈들이 관리 감독을 하는 것 같았다.
호리병처럼 생긴 공간의 4미터 이상 높은 안쪽에 번이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대화를 나눌 리 없었을 테니까.
“보름 안에 무조건 맞춰야 해.”
30대 후반의 사내가 그리 말하자, 그보단 좀 더 어려 보이는 사내가 끄덕였다.
“알고 있어. 나도 노력하고 있다고.”
“인원을 더 늘려야 하지 않을까?”
“그랬다간 눈치챌 수도 있어. 지금은 몸을 사려야 할 때야. 사업은 시작도 안 했다는 걸 명심해. 우리에겐 힘이 없어. 걸리면 훅 간다고.”
이들의 대화를 들어보자면 이곳은 뭔가를 만드는 제조소, 혹은 연구소 같은 개념이었는데, 이제 사업을 시작해서 첫 번째 물건이 만들어지는 단계인 것 같았다.
‘당당한 거였다면 이렇게 숨어서 하진 않았겠지.’
이 세계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아름다운 엘프나 귀여운 드워프, 묘猫족같은 것들이 성노奴로 팔려 다니기도 하고, 해적들이 대놓고 설치며 몬스터의 부산물이 거래된다.
‘저게 대체 뭘까?’
번은 궁금했다.
그래서 좀 더 파보기로 했다.
사라라락.
“음?”
“왜 그러나?”
위에서 떨어지는 흙가루를 느끼던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야. 박쥐인가 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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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하다고 하기엔 너무 늦어버려서 이제 곧 아침이 밝을 시간. 하지만 이 시간까지 잠 못 들고 있는 이들이 있다.
“효과는 어떻던가요?”
황궁.
이곳은 궁에서도 권력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7황비의 처소였다.
“만족스러웠습니다.”
“오! 그래요? 어떻던가요? 상품성이 확실하나요?”
“아마 제국으로 넘어가기만 한다면 물건이 없어서 못 구할 겁니다.”
7황비와 독대하고 있는 자는 제국에서 꽤 명성을 얻었던 용병이다. 루퍼스의 검을 본 사람은 무조건 죽는다라는 말까지 나돌게 한 실력자.
“좋아요. 이번 일만 잘되면 우리 미래는 그 누구보다 장밋빛일 거예요.”
“하지만 아직 유통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판로는 그렇다 쳐도 물건을 옮기지 못하면 전부 헛수고가 되는 겁니다.”
“그건 제가 알아보고 있어요. 조만간 집정관이 바빠질 거에요. 그의 눈이 걷히면 본격적으로 움직여보려 해요.”
“알겠습니다. 그 일은 믿고 있겠습니다.”
“그래요. 당신은 물건이 제시간까지 차질없이 완성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주시기만 하면 돼요.”
7황비는 새로운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건 아주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정보에서부터 출발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7황비가 용병 루퍼스를 황자의 검술선생으로 초빙한 줄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미라클 레인보우.
3년 전 북부 라리실리온 공국에서 흑마법사들이 연구하던 약이었는데, 그들은 8년이나 미라클 레인보우를 연구했다. 마침내 그 결실을 맺으려 할 때, 제국에서 파병한 팔라딘 군대에 박멸당했고, 그들은 정말 운이 없었다. 제국의 파병 이유는 그저 이웃 국가 뉴헤슬과의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제국은 미라클 레인보우에 관해선 전혀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그저 불똥이 튀었을 뿐.
그때, 그 토벌대에 함께 참가한 것이 루퍼스였다.
그는 이 약의 잠재력을 봤다. 그리곤 자신 혼자 사업을 벌이기엔 너무도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몇 가지 우연과 인맥이 겹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사업을 시작하기엔 에비뉴의 입지조건이 최적이었다 말할 수 있었다. 최근에 에비뉴의 철의 황제가 벨버른 왕국까지 함락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것으로 제국까지의 직통 로드가 완성되었다.
“농장들은 문제없죠?”
“당연합니다. 제 부하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으니까요.”
에비뉴의 농가엔 남자가 거의 없었다. 죄다 전쟁터에 끌려갔으니, 있어도 어리거나 늙었다. 혹은 팔다리 하나 잘린 부상자들뿐. 그래서 여자들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필사적으로 농사도 짓고 가축도 키웠는데, ‘레인보우 립’은 새롭게 떠오르는 고부가가치 작물이었다.
일곱 색깔 꽃이 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레인보우 립. 사실 약이나 독으로 쓸 수 없어 그저 가끔 관상용으로나 키워질 뿐 그리 많이 찾는 식물은 아니었는데, 최근 흑마법사들이 이 꽃의 비밀을 밝혀냈다. 보라색 꽃잎이 필 때 특정한 조건을 만나면 강력한 ‘성분’을 발산한다는 것이다.
“좋아요.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더 노력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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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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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은 작은 구멍을 내고, 아래를 내려보고 있었다. 이번이 3번째 방이었는데, 규모는 조금 작았지만 다소 충격적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마약인가?’
21세기엔 대마초, 필로폰, 엑스터시 같은 마약들이 있다는 것을 TV나 영화로 접했기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세계엔 마약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마약이란 것도 먹고살 만해야 여가로 즐기는 거지, 당장 풀죽 끓여 먹을 형편도 안 되는데, 무슨 쾌락을 즐기겠는가? 있어 봐야 아주 극미한 환각 효과가 있는 열매를 잇몸에 문지른다거나 성적 쾌감을 높여줄 보조제가 전부였다.
부들부들..
고블린 한 마리가 나무로 만든 침대에 누워있었다. 녀석은 보라색 가루를 들이마신 뒤 조금씩 몸을 떨어댔는데,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손발이 단단하게 묶여 있었고, 입에선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지만, 자신의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지 두려워하는 눈도 아니었다. 하체엔 남성의 상징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역시 효과는 확실하군. 고블린도 되면 오크 같은 것들도 되겠지. 이놈 완전히 천국에 간 표정인데?”
“큭큭큭, 그럴 만도 하지.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쾌락일 태니까.”
고깔모자를 쓴 사내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부작용은 어때? 잘못해서 신관들에게 악마의 어쩌구로 찍히면 다 좆돼는 거야.”
“걱정 마. 조금씩 쓰면 전혀 문제없으니까. 놈들이 그렇게 몰아갈 껀덕지도 없다고. 진통제나 마찬가지잖아?”
“하긴, 괜히 미라클이란 이름이 붙은 게 아니니까.”
사내들은 웃으며 실험을 계속했다.
예리한 칼로 고블린의 몸 이곳저곳을 저미기 시작한 거다.
펄떡, 펄떡!
고블린의 몸이 들썩였지만, 녀석은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육체가 본능적으로 고통에 반응하긴 했지만, 정신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흐음.”
실험은 고블린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시체를 보며 고깔모자 사내 하나가 머리를 흔들었다.
“양을 좀 줄여서 다시 해보지.”
“과했나?”
“아마도.”
생명이 죽었는데, 두 사내는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고 있었다. 번은 거기까지 보고, 다시 위로 기어 올라갔다. 아직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곧 아침이 온다.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거지?’
지상으로 올라온 번은 옷을 입고 집으로 향하면서도 계속 생각했다. 당장 집정관이나 람보르의 고위 공직자들에게 사실을 알릴 수도 있었지만, 그리하진 않았다. 어떤 예감. 정보는 언제나 힘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며칠만 더 지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