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준비 #
번은 기억한다.
약 4년 전, 아버지와의 독대 직후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복도를 걷는데, 아버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은사.
번이 마지막으로 그 방에서 나왔으니, 아버지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낯선 목소리가 대답했다.
-예, 주군.
-저 아이 어떻게 보나?
보는 눈이 있어 자리를 뜨느라, 그 이후론 더 듣지 못했지만, 이름은 확실히 기억했다.
‘은사!’
아버지에겐 4명의 조력자가 있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그날 이후,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는 것이었다. 아니, 들렸다고 하는 게 맞겠지. 번의 예민한 청력에 걸렸으니까 말이다.
‘이걸로 측근은 다 본 건가?’
스캇과 딘딘, 집정관은 이미 보았고, 은사를 오늘 보았으니, 아버지의 그림자는 전부 본거다.
‘좀 더 조심해야겠어.’
혹시 몰라 1시간이나 기다렸다. 심지어 은사가 뭔가 눈치를 챈 것 같아, 더욱 사렸다. 아무리 황자의 지위가 있다지만, 이런 곳에서 그에게 발각당했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다. 그는 개국공신이자, 집정관처럼 강력한 힘을 가졌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꼬마 하나,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는 것은 일도 아닐 거다.
그때, 일어나려던 번의 몸이 다시 후욱! 꺼졌다. 눈도 내리깔았고, 호흡도 멈췄다.
“……!”
두근! 두근. 두근..
심장 박동조차 서서히 멎어간다. 밀랍 개구리의 능력이 그의 육신을 죽은 것처럼 만들고 있었다.
‘빨리!’
하지만 번의 마음은 초조했다.
사하라 사막의 고대 민족들처럼 검은색 얇은 천을 온몸에 둘둘 말아 얼굴과 머리까지 전부 가린 차림의 사내.
“흐음..”
그가 돌아왔다.
은사.
고작 5미터 앞이었다.
어두운 밤이었고, 번의 체구가 작았다. 거기에 오목한 곳에 파묻혀 있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당장 눈에 띄었을 것이다.
두..근..
심장이 완전히 멎었다.
처음엔 이렇게 빨리 능력을 활용하지 못했지만, 지난 세월 거의 매일같이 훈련하다 보니 이젠 손발을 움직이는 것처럼 쉽다.
까악- 까아악-
“흐으음..”
은사는 저편 하늘 까마귀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럼 그렇지. 누가 있으려고. 야밤에 이 무슨 짓이더냐? 이놈의 성격 때문에 참 고생이 많다. 그나마 보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려나? 스캇이 알았다면 편집증이 도를 넘었다며 두고두고 낄낄댔을 것이다.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땅을 박찼다. 저편으로 5미터, 10미터 쭉쭉 뻗어 가는 그의 속도는 인간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단했다.
‘무서운 자야..’
번은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 상태 그대로 계속 기다렸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아버지가 돌아온다고?’
아직 그런 소문은 돌지 않았었다.
하지만 은사 정도 되는 사내가 빈말을 할 리 없으니 사실이라고 봐야 했다.
‘4년만인가..’
아직 마나는 느끼지 못했지만, 다른 부분에선 괄목할만하다 할 수 있는 성취들을 이뤄냈다. 올겨울이 지나면 이제 그도 10살이 된다. 한국이었다면 12살 정도 되었으리라. 그리되면 2차 성징이 시작될 것이고, 몸은 어른처럼 성장을 시작할 것이다.
좀 더 시간이 흐르자, 번은 차분하게 앉았다.
“후우..”
호흡을 가다듬고, 주변을 느낀다.
그가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인간이 하는 방식과 달랐다. 극도로 발달한 청각과 후각, 시력과 오감五感을 넘어선 다른 영역의 감각을 모조리 개방했다. 그러면서 그 밀도를 좁혀간다. 대지에 섞여 있는 것, 바람에 흩날리는 것, 그 안에 깃든 냄새와 위화감까지도 잡아냈다.
‘됐어.’
아무도 없다. 그는 경계심을 극도로 올려놓고, 작업에 들어갔다. 마침 머지않아 이곳에 왔어야 했는데, 겸사겸사 날이 밝기 전에 해결하고 가는 게 좋겠다.
까드드득.
그가 움켜쥔 흙이 입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우물우물 입에 든 것을 씹는 그의 모습을 누군가 봤다면 기절할 것처럼 놀랐을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하지만 그는 이 땅의 역사와 시간에 누적된 세월을 조금씩 조금씩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아니, 먹고 있다.
「사기邪氣를 흡수합니다.」
「사기死氣를 흡수합니다.」
「미량의 수분을 흡수합니다.」
「2종의 유익한 광물을 흡수합니다.」
「일정 이상의 광물을 흡수하여 다음 단계로 진입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광물 2종이 필요합니다.」
이곳은 무덤.
인간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참으로 무섭고, 불쾌하며 가까이하기 싫은 장소였지만, 번은 알고 있다. 이 세상은 반드시 누군가가 죽어야만 새로운 삶이 태어난다.
‘거의 다 됐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렇게 균형을 맞춰가는 것이 바로 자연. 그 관점에서 보자면 시체가 썩어가고, 살점과 장기가 부패 되는 이곳이야말로 뭔가 새로 태어나기에는 최적의 장소이기도 하다. 단순히 곰팡이 따위가 아닌, 수만 종種의 박테리아와 균菌이 이 흙에 담겨 있었다. 번을 위한 영양소가 듬뿍 담긴 보물창고와도 같은 곳이랄까?
번은 앉은 자세로 조금씩 이동하며 계속해서 흙을 주섬주섬 맛보고 다녔다.
그는 지금 어떤 경계에 있었다.
호기심 왕성한 2살짜리 아이처럼, 뭐든 입에 집어넣는 습관처럼, 지난 몇 년간 중점적으로 그렇게 많은 것들을 몸속에 축적했다. 누적된 각종 양분養分은 그의 신체를 조금씩 변화시켜간다. 그리고 그건 이제 지금의 육체를 탈피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는 지금 변태變態를 앞두고 있는 것이다.
‘이쪽은 별로야. 저쪽으로 가봐야겠어.’
번은 무덤을 이리저리 누비며 계속해서 자신에게 필요한 토양을 찾아내려 애썼다. 그가 찾는 것은 새로운 영양소다. 김치찌개에 조미료 약간, 어묵탕에 후추 약간, 밀가루 반죽에 소금 약간처럼 그 ‘약간’이 되어줄 열쇠가 있어야 했다.
그게 뭔지는 번도 몰랐기에 이렇게 무작정 찾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모래사장에서 사금砂金찾기나 다름없다 여길지 모르겠지만, 번은 알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시도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시간은 언제나 그의 편이었다.
우물우물.
얼마나 지났을까? 포기를 모르는 이 남자가 계속해서 무덤가를 배회하는데,
움찔!
그의 몸이 우뚝 멈췄다.
“……?”
분명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한데 방금 어떤 기척이 느껴졌지 않나?
번은 뒤를 돌아보았다.
설마 은사가 다시 온 건가? 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곧 사라졌다. 그가 왔다면 멀리서부터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 그것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왔다. 바스락거리는 것보단 좀 더 둔탁한. 차라리 삐거덕거리는 게 더 가까울 것 같은 어떤 기괴한..
“뭐지..?”
번의 눈이 한 지점에서 멈췄다.
묘비 하나.
들렸다. 소리가..
약 4미터 앞이었는데, 저 아래 깊은 곳에서부터 기척이 올라오고 있었다.
급히 바닥에 엎드리는 번.
밀랍 개구리의 능력을 끌어올려 인기척을 숨기고, 개의 청각만 극대화 시켰다. 사실 ‘개’과 동물의 능력 중 대표적인 것은 후각으로 알려졌지만, 개로 살아봤다고 무조건 가장 좋은 능력을 얻는 것은 아니었다. 무작위로 선택되는 것 같았는데, 어떨 때는 이미 얻은 다른 능력의 하위호환인 것을 얻어 쓸모가 없었던 적도 많았다.
하지만 번은 상심하지 않았다. 개에게 후각이 아닌 청각을 얻으면 어떠한가? 그것만으로도 보통 사람보단 월등한데. 지금처럼 위험을 사전에 감지할 수도 있고 말이다.
스으윽.
이윽고 묘비 위로 거짓말처럼 올라오는 머리 하나. 놈은 아주 천천히 움직였으며 교활한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땅을 뚫고 올라온 것은 아닐 거다. 그러기엔 너무도 말끔했으니까. 비밀계단 같은 것이 만들어져있는 것 같았다.
번은 기다렸다.
수상한 녀석이 사라진 뒤에도 한참을 더 기다렸다가 일어났다.
‘도굴꾼 같진 않고..’
번은 잠시 고민했다.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이다. 은사의 부하를 추적해 여기까지 왔지만, 그 이후론 변수가 너무 많이 발생하고 있었다. 변수는 언제나 위험을 동반하고, 계획을 벗어난다는 것은 노출될 위험도가 올라간다는 것과 같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 모든 것을 감수할 만큼의 기회가 찾아오기도 하지 않겠는가?
‘확인해보면 알겠지.’
번은 빠르게 옷을 벗었다.
놈이 사용한 길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 함정이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동료들이 아래에 있을 수도 있으니까.
벌거벗은 번이 옷을 잘 숨겨두고, 바닥에 납작하게 누웠다. 그러더니 땅을 파기 시작한다.
번의 몸은 아주 묘했다.
흐물흐물 뱀 같기도 하고, 손을 빠르게 놀리는 것은 개 같기도 했다. 그렇게 그의 몸이 아래로, 아래로 작은 구멍 하나만을 남기고 사라져 간다. 잠시 후, 그 구멍조차 아래에서 푸욱-! 올라온 흙으로 덮여버렸다.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린 것이다.
까악- 까악-
다시 인적없는 무덤가엔 까마귀 소리만 요란했다.
‘이게.. 뭐야?’
거미줄을 뽑아 발에 붙이고,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아래를 내려보고 있는 번.
그의 눈이 한껏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