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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14화 (14/177)

# 지켜보고 있다 #

시체를 끌고 10여 분쯤 더 내려가니, 넓은 공간이 나왔다. 그래 봐야 지금 번이 쓰는 방보다 약간 더 큰 것일 뿐이지만, 앞으로 계속해서 넓어질 것이고, 아직까진 사용하는 데 문제는 없었다.

한눈에 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벽에 설치된 장欌에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고, 유리병도 많다. 거기에 틈틈이 수련을 위해 사용하는 도검刀劍류도 보인다.

“후우.”

개미의 힘이 없었다면 이곳까지 시체를 끌고 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피를 뽑지 않은 성인 여성의 무게는 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이미 사후 경직까지 진행돼, 돌처럼 아주 딱딱했다.

'더 강해져야 해. 꼬리가 잘렸다는 걸 눈치채면 이전보다 쎈 걸 보낼 테니까.’

시체를 한쪽에 밀어두고, 번은 잠깐 숨을 고르며 벽을 바라보았다.

벽엔 빈 곳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빡빡하게 글자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름난 화가의 작품 같기도 하고, 실력 있는 건축가의 도면 같기도 한 이건 지도였다. 황궁의 가계도이며 수도의 전략적 요충지를 표기해둔 것.  사람의 기억력이 아무리 좋다 해도 이렇게 기록해두지 않으면 잊기에 십상이다. 7년은 긴 시간, 비록 그 절반은 몸뚱이가 따라주지 않아 쓸모가 없었다고 할지라도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놓았다.

번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몸을 컨트롤 하는 것은 문제없어.'

이 세계를 대한민국 사고의 틀에 맞추면 아주 곤란하다. 여긴 마법이 있고, 정령이 있다. 성기사나 사제도 있는 걸 보면 ‘신’이 실존할 가능성까지 있다. 하긴, 신이 없었다면 지금 번의 인생이 이리 꼬인 것도 이해 불가다. 분명 누군가 장난치는 놈이 있을 거다. 그게 뭐든 간에 말이다.

그뿐인가? 번은 인간뿐 아니라, 그가 지금까지 겪었던 종種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삶을 겪으며 매번은 아니더라도 한 가지씩 특수한 능력까지 전이되어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는 일도 해낼 수 있었다. 가령, 여기까지 오며 한 것처럼 번은 흙을 먹을 수 있었다. 물론 맛은 보장하지 못하지만, 어디 황무지나 사막에 떨어져도 땅 파먹고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렁이의 특성으로 흙을 먹고, 그 안의 미생물과 영양분을 소화흡수 하는 것이지만, 어쨌든 일반인이 할 수 없는 것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소화기관이 달라서 자잘한 문제가 생기긴 하지만.

'정작 막히는 건..’

번은 독수리보단 못하지만, 사람보단 더 멀리 볼 수 있었고, 개처럼 잘 들을 수 있으며 뱀처럼 몸이 유연했다. 게다가 관절을 180도 뒤틀어도 무리가 없었다. 이것들은 무예를 익히는 데 있어 아주 큰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나..’

하지만 '마나'가 문제였다.

그렇게 죽고, 죽고 또 죽으면서도 번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마나를 느껴보지 못했다.

‘느껴야 해. 마나 없이 외공이나 기술로만 성장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거야.’

사실 미물微物 따위로 살아서 가장 크게 바뀐 점은 그들의 특성을 하나씩 얻은 것보다는 ‘집중력’이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물은 ‘본능’을 우선한다. 적이 나타나면 싸울 생각, 배가 고프면 먹을 생각, 암컷이 나타나면 교미할 생각밖에 안 한다. 좀비는 내일 먹을 식량을 비축해두는 법이 없고, 매미는 땅 밖으로 나와 그 짧은 생의 마지막 볕을 쬐면서도 죽기 전에 짝을 찾으려고 그렇게 울어댄다.

‘강해져야 해.’

계속해서 그 말을 입안에 굴렸다.

‘지금보다 더..’

번의 의식은 점차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는 좌절하지 않는다.

당장 마나가 없다고 해도 다른 것으로 부족함을 채우려고 시도할 뿐.

얼마나 지났을까? 번이 눈을 떴다.

“…….”

무심한 눈으로 걸어가 시체 머리맡에 앉았다. 그러더니 손을 뻗었다. 그의 손바닥이 달팽이의 미끈한 몸통처럼 흐물흐물하게 변했다. 그걸 시체의 이마에 대자, 괴사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사기邪氣를 흡수합니다.」

「사기死氣를 흡수합니다.」

번의 손바닥이 닿은 부분부터 시체가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

.

.

-임무를 변경한다.

-하명하십시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저놈을 봐라.

주군이 떠나기 전, 그에게 새로운 임무를 내렸다. 꼬마 하나 지켜보는 것이 무에 어렵겠느냐마는 시일이 지날수록 생각보다 거슬리는 것들이 많았다. 명命을 내린 주군도, 그걸 받은 은사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어떻게 해독한 거지?’

주군이 출정하자마자 황비들의 암투는 재개되었다. 이러한 것을 알면서도 집정관은 나서지 않았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원칙을 바탕으로 깔고 가는 황제의 의중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수작이 너무 빤히 보이면 제재하지만, 비妃의 숫자가 하도 많아 자식도 많았다. 어쩌면 그분 역시 후계를 위해선 좀 줄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묘해. 아주 묘한 놈이야.’

독을 먹고도 꼬마는 멀쩡했다. 그것도 몇 번이나 말이다. 어떤 특별한 도구나 해독제를 지녔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일주일이 지나고 보름이 되어갈 즈음, 은사는 번이라는 꼬마에게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리고 그게 벌써 4년.

하지만 아직도 은사는 그 꼬마에 대해 완전히 안다 자신할 수 없었다.

“정기보고 드리겠습니다.”

수도 외곽의 공동묘지.

부하가 찾아왔다. 야심한 시간이라 이런 음산한 곳을 다니는 사람은 없다.

“해.”

“1황비도 용병을 고용했습니다. 그라칸이란 잔데, 사흘이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그라칸이라..”

“재작년 7황비가 용병을 고용한 뒤로 다른 황비들도 돈만 있으면 어떻게든 외부인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움직임이 포착됩니다.”

들어본 적 있다. 대륙 북부에서 꽤나 이름을 날린다는 검사라지? 여기까지 이름이 알려질 정도면 허명은 아닐 터.

“언제든 버릴 수 있는 패라 생각한 거겠지.”

“그런 것 같습니다. 직접적인 충돌은 쉽게 일어날 것 같진 않지만, 대비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잘 감시하다가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선 제거, 후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래. 다른 건?”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은사의 아래엔 12명의 수하가 있고, 그들은 모두 지난 10여 년 동안 은사가 직접 키워낸 자들이었다. 그라칸이란 자가 소문대로 그리 강하다면 홀로 붙어선 어려울지 몰라도 셋 이상 모이면 문제는 없으리라.

“헌데..”

“왜?”

“21황비 쪽이 수상합니다.”

부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수상하다?”

자세히 말해보라는 눈빛에 사내는 보고했다.

“21황자의 움직임을 놓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황자의 숫자는 더 적었지만, 편의상 어미의 서열을 따서 이리 부르고 있었다. 살아있는 12번째 황자였지만, 번은 21황자다.

“그게 말이 되는가?”

“..죄송합니다.”

“죄송하다 말하면 해결되고? 주군께서 직접 내리신 명이다. 그분께도 죄송하다 말할 건가?”

부하는 황급히 머릴 숙였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죽여주십시오!”

“뭘, 죽이기까지야. 더 노력하면 되는 일이다. 긴장 풀지 말라고. 알겠나?”

은사는 가볍게 웃으며 부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 휘적휘적 걸었다. 그러다가 우뚝 서서 휙! 뒤를 돌아보았다.

“……?”

시선을 느낀 부하가 갸웃하며 은사를 마주 보는데, 뭔가 이상하다. 은사는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왜 그러십니까?”

“흐음.”

은사는 갸웃하다가 눈꼬리를 으쓱했다.

“아니다. 내가 너무 예민해졌나 보군.”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기분이 드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시선이 느껴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수도에서 자신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손가락 안에 든다. 설마 누군가가 자신의 뒤를 밟고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곧 주군께서 돌아오신다. 그전까진 최대한 조용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은사는 끄덕이며 다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왜 이리 찝찝할까?

“쉬십시오.”

“그래.”

그는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역시 착각이었나?’

파팟-

둘의 신형이 빠르게 사라졌다.

까악- 까악-

둘이 떠나자, 달빛 아래 움직이는 생명체라곤 썩은 고기조각이라도 한 점 주워 먹어보려는 까마귀뿐이다. 실체도 확인 안 된 귀신 따위를 무서워해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꺼리는 장소. 하지만 여긴 좀비나 흡혈귀 같은 실존하는 괴물들이 있으니, 더욱 인적이 있을리 만무하다.

1시간쯤 지났을까?

“…….”

바닥으로 내려오던 까마귀 한 마리가 다시 하늘로 후두둑 올라갈 때, 스윽- 그림자 하나가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림자의 감았던 눈이 번쩍 뜨이자, 부리부리한 안광이 폭사되었다. 그 눈동자엔 두려움 따윈, 단 한 조각도 깃들어 있지 않다.

그림자의 정체.

이제 제법 소년 태가 나는 9살 번이었다.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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