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갚아줄 땐 확실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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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언제나처럼 해가 뜨고 어제와 같지만, 다른 일과가 시작되었다.
-어라? 설리가 어디 갔지?
-방에 없니?
-응!
보여야할 시녀 하나가 시간이 되어도 모습이 보이지 않자, 다른 시녀들이 방까지 찾아왔다. 하지만 설리라는 시녀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 설리가 아끼는 원피스가 없어!
-정말? 더 찾아봐! 또 뭐가 없는지!
번은 철저한 남자였다.
그녀뿐 아니라 몇 가지 물건도 함께 숨겼다.
-반지도 없고!
-구두도 없어!
7년이나 함께한 가족 같은 여자였기에 집안은 오전 내내 술렁였지만, 번은 아무렇지 않게 생활했다.
이윽고 다시 밤이 왔다.
그 누구도 설리의 행방을 몰랐고, 찾을 수도 없었다. 정황으로 봐서는 간밤에 몰래 도망쳤다는 얘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 몸집을 불려갔다. 어머니는 황궁에 그녀의 부재를 신고했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모두가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이 시각.
황궁의 다른 곳에서는 이 일로 두 사람이 심각한 얼굴로 마주 앉아 있었다.
“그게 말이 되나요? 그렇게 감쪽같이 사라졌다고요?”
2황비 실란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봤다는 사람도 없고요?”
“네, 없었습니다.”
그녀의 앞에 앉은 중년의 사내는 무표정으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황비의 침실. 남자가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그것에 대해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 그년이 어디로 증발했다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아, 골치야. 대체 그 집구석은 왜 이러는 거야? 되는 게 없네! 증말!”
모든 것을 마음먹은 대로 주무르고 있는 실란이다. 그런데 유독 그 눈엣가시 같은 모자母子만 뜻대로 안 된다.
“하아.. 당신이 미안해할 일이 아니죠. 사과할게요. 제가 너무 격해졌었네요. 이번 명령이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야반도주한 걸 거고.”
그녀가 손을 들어 그의 턱을 어루만졌다.
“쓸만한 아이를 찾아, 다시 보내겠습니다.”
“그러면 오래 걸릴 텐데.. 포섭하는 건 힘들까요?”
“몇 년씩 있던 사람들이라 자칫 밀고할 수도 있습니다. 21황비의 평판도 나쁘지 않고요.”
21황비 아스트리드는 아랫사람을 막 다루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오래도록 함께 생활한 시녀들을 포섭하기란 힘들 수도 있다. 또한 그 무서운 집정관의 눈을 피해야 하니, 대놓고 일을 벌이진 못한다.
하지만 그 잘난 집정관이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나, 어지간한 일들은 모른척 눈감아 준다는 것을 지난 경험으로 깨달았다. 조급해 하지 말자.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일은 다시 만들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다시 떠올리자,
‘고 앙큼한 년!’
실란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녀는 기억한다.
21황비 아스트리드. 그 계집이 처음 황궁에 들어오던 날을.
-아스트리드입니다.
첫 만남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스트리드, 고것은 잘 부탁한다거나, 눈을 내리깐다거나, 비위를 맞춘다거나, 빈말도 하지 않았다. 무너진 왕국의 공주였으니, 당연히 기분이 좋을 리 없었겠지만, 그 오연한 태도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다.
곱상한 얼굴로 차분하게 황제의 사랑을 받는 그녀. 그녀는 이쪽에 붙으려 하지도 않았고, 오직 집구석에만 처박혀서 생활했다. 쥐뿔도 없는 주제에 뭐가 그리 잘났다고!
심지어 나중엔 아들까지 낳았는데, 그놈은 제 어미보다 더 가관이었다.
-이미 제 삶은 전장이었습니다.
실란은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했다. 얼마나 똘똘한지 놈을 보고만 있어도 짜증이 치밀어 이가 갈렸다. 현자의 서를 다 읽었다고? 그게 말이 되나? 그 어린 것이?
‘거만한 애새끼! 제 어미랑 똑같아!’
실란의 표정이 사납다. 그러자 사내가 그녀를 풀어주려는듯 믿음직한 목소리를 낸다.
“내일 바로 람보르에 다녀오겠습니다.”
“고마워요. 당신이 고생 좀 더 해주세요.”
실란은 아련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람보르에 있는 줄을 이용하면 이쪽 사람을 그년의 집에 새로 넣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7황비는 어때요? 정말 그 용병을 고용하려고 하던가요?”
황제의 여자는 3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1황비와 2황비 실란, 그리고 7황비가 가장 영향력이 강했다. 최근 21황비 아스트리드와 그녀의 아들 번의 이름을 말하는 이도 있긴 했지만, 아직 애송이일 뿐이었다.
“명목상 황자의 검술 선생으로 오는 것이니, 막을 순 없을 겁니다.”
최근에 마주쳤을 때, 7황비 고년이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이런 꿍꿍이를 숨겨두었을 줄이야. 이제까지 독이나 저주로만 서로를 견제했었는데, 그 유명한 용병이 오면 얘기가 달라진다. 7황비가 언제든 휘두를 수 있는 강력한 칼을 쥐는 셈 아닌가? 물론 아무 때나 휘두를 순 없겠지만, 여자가 눈이 돌면 뭐든 하는 법이다. 괜히 이쪽으로 불똥이 튀면 곤란하고.
“융을 만나봐야겠어요.”
그녀가 결심한 듯 말했다.
“직접 가시렵니까?”
“그래요. 이번에도 융이 만들어 준 독이 통하지 않았어요.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해요.”
사내는,
‘독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닐 겁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녀도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오늘은 그녀를 더 자극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융의 오두막을 처음 찾아갔을 때부터 함께였던, 2황비를 위해 살아가는 그의 이름, 주크버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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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시간 가량 가수면 상태로 피로를 해소하던 번이 스윽 일어났다.
어제 하려던 일을 못했다. 하루를 날렸으니, 오늘은 두 배로 바삐 움직여야 했다. 처리해야 할 일도 아직 남았고.
그의 몸놀림이 더욱 빨라졌다. 그렇지만 아주 은밀했고, 정교했다.
“······.”
서서 잠시 주변 기척을 확인하던 번이 옷을 모조리 벗어 이불 속에 넣어 두툼하게 만들고, 침대 아래로 들어갔다. 밑이 나무판으로 가려있었는데, 그걸 뜯어내니 음산한 어둠만 기다린다.
빠르게 그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침대의 머리 쪽으로 가서 카펫의 한 부분을 잡아끌었다. 도려낸 부분만 정확하게 들리고, 아래 덧대놓은 나무를 치우자, 작은 구멍이 하나 나왔다. 어른은 절대 몸을 집어넣을 수 없는 크기.
번은 눈을 감았다. 이제 시력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시간이 온다. 대신 다른 것들이 그것을 대신 할 것이다.
「몸이 유연해집니다.」
뱀처럼 각종 연체동물로 살았을 때, 얻은 것들.
「초음파를 발생시킵니다.」
박쥐로 살았을 때, 얻은 능력.
「땅파기를 사용합니다.」
두더지까지. 번의 손톱이 순식간에 길게 자라나며 그의 몸이 쑤욱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세상 모든 종種의 능력은 각기의 쓰임이 있다. 어느 것이 위대하고, 어느 것이 보잘 것 없다는 판단은 바보 같은 것이다. 어떤 것을 언제,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보물이 되기도 하고, 삶을 지켜주기도 했다.
지난 7년.
잘 뛰지도 못하는 아이가 새벽에 돌아다니는 것만큼 눈에 띄는 것도 없었다. 그래서 번은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갔다. 그의 몸이 머리부터 아래로 구불구불 내려간다. 입에 흙이 들어찼지만, 그냥 삼킨다.
「미생물 2종을 흡수했습니다.」
「광물 3종을 흡수했습니다.」
「뼈에 광물이 깃듭니다.」
「혈액에 미생물이 깃듭니다.」
지렁이와 슬라임의 능력이 동시에 발동한다.
번은 지난 세월 이것으로 부족한 영양분을 얻었고, 새로운 능력도 개발해갔다. 본래 흙이란 게 퍼내면 퍼낸 만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지만, 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먹어버리면 되었으니까. 물론 항문이 얼얼할 정도로 피똥을 싸야 했지만, 그 정돈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뼈는 울버린처럼은 아니어도 인간의 그것보단 강해지고 있었고, 이젠 가벼운 감기조차 걸리지 않는 면역력을 지녔다.
어느 정도 이동했을까, 안구를 이용한 시력 대신 머리에서 뻗어 가는 초음파로 사물을 구분하고 있던 그의 신경에 뭔가가 걸렸다.
알몸의 시체 한 구.
번은 능숙하게 몸을 움직여 시체를 밀고, 밑으로 이동한 뒤 잡아끌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토록 찾던 시녀, 설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