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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12화 (12/177)

# 개화開花 #

복도를 빠르게 가로지르는 번의 모습은 놀라웠다. 아무런 소음도 나지 않고, 마치 미끄러지듯이 뛰었다. 고양잇과 동물의 능력. 그의 발바닥이 지면과 닿을 때 모든 충격을 흡수하고 있어서 그렇다.

파라락.

옷이 나부끼는 소리는 났지만, 이 정도를 눈치챌 사람은 없으리라. 적어도 이 집에서는 말이다.

‘네년이..!’

거리가 가까워지자, 번은 수상한 자의 정체를 알아냈다.

사람마다 몸무게가 다르고, 걸음걸이도 다르다. 이건 마치 지문 같아서, 걸을 때 나는 소리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확실한. 그년이다.

어머니의 젖가슴에 독을 바르던 그년. 7년이나 번을 지켜보던 그년! 결국, 그년은 야심한 시간, 동생 방으로 스며든 것이다. 다른 시녀가 움직였다면 동생 방에 뭔가 처리할 일이 있나?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환생을 거듭하며 야생에서 갉고 닦은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살금살금.

‘날 원망하지 마.’

여자는 한없이 독해질 수 있다. 반대로 한없이 희생할 수도 있다. 이것이 모성애란 이름이 되기도 하고, 한恨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아프진 않을 거야.’

새근새근 잠든 샨에게 다가서는 시녀는 오늘 아침 밀명을 받았다. 첫째가 아닌, 둘째를 노리라고 말이다.

그녀는 위태로웠다. 지난 7년간 노력했지만,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독을 쓰고 저주가 걸린 물건을 놓아도 이 집의 첫째 아들은 전혀 지장을 받지 않았다.

‘내가 살려면 어쩔 수 없단다.’

사람을 죽여보는 것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세상모르고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며 약간의 죄책감이 들기도 했지만, 이게 다 번이란 놈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놈이 곱게 중독되었다면 이런 상황까지 오진 않았겠지,라며 말이다.

‘나도 이러기 싫어. 이해해 줄 거지?’

그녀는 언제나 남의 탓을 했다. 어릴 때 보석을 훔치다 잡혀 노예로 팔린 것도, 그때 보석금을 내주지 못한 것도, 가난한 부모 탓. 남자 잘 만나 시집간 친구들을 보면서도 미운 얼굴을 물려준 엄마 탓을 했다. 예뻤으면 벌써 팔자 펴고, 2황비처럼 떵떵거리며 살았을 텐데라며.

남들이 자신을 ‘먹구름’이라고 부르는 것이 왜인지 그녀는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표정만 밝게 했어도 그런 별명은 언제든 날려버릴 수 있었을 것이었는데 말이다.

스윽.

그녀의 손이 움직였다.

손엔 독을 듬뿍 먹인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이게 샨의 코와 입을 막으면 불과 몇 분 만에 끝날 것이다. 사인도 밝혀내지 못할 것이고. 요맘때 아이들은 자다가도 영문을 모르고 질식사하는 경우가 있으니까 자신이 걸릴 위험도 적다.

9황비의 장남도 그리 죽었고. 그때도 같은 방법이 쓰였으리라.

‘잘 가렴.’

그녀의 눈이 번들거렸다.

빨리 이 지긋지긋한 집구석을 떠나, 좀 더 편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이번 일만 잘 해결하면 그리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흐읍..?!”

막 내려가던 그녀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흐으으으으억..”

벼락을 맞은 듯 전신이 경련하고, 다리에 힘이 쭈욱 풀렸다. 등허리부터 시작된 고통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이 끔찍해서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허물어지는 그녀의 몸을, 뒤에 서 있던 누군가가 부축했다.

“······?”

고통 속에서도 목이 돌아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은 의문이 가득했다.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담기니, 기괴하기까지 하다. 쇼크가 관통한 그녀의 눈동자에 한 사람이 비쳤다.

번이었다.

키 135cm, 몸무게는 31kg. 번의 몸은 그녀보다 한참이 작고, 가볍다. 그러나 그의 몸에 숨긴 힘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개미는 제 몸의 10배나 무거운 물건을 번쩍번쩍 든다. 단순히 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장시간 옮길 수도 있다. 물론 인간의 육체 구조로 그 힘을 100% 끌어낼 순 없지만, 완전히 못 쓰는 것도 아니었다.

“흐읍!”

번은 뒤쪽에서 팔을 뻗어 시녀의 입에 걸레를 쑤셔 박았다. 비명을 지르지 못하게 하는 거다.

힐끔.

그러더니 곤히 잠든 동생을 보곤, 다시 그녀의 머리채를 쥐었다.

투투툭, 투투투툭.

번의 몸속에선 근육과 살, 혈관과 뼈가 빠르게 재구성되고 있었다. 최대한의 힘을 끌어내기 위해 변형되고 있는 것이다.

질질질..

시녀는 번에게 머리가 잡혀 끌려가며 고통에 발버둥 쳤다. 칼 맞은 등허리는 끊어질 것 같았고, 잡힌 정수리가 통째로 뜯겨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기운이 빠져갔다. 필사적으로 저항해 보지만, 어느 순간 축 늘어졌다.

번은 묵묵히 자신의 방으로 시녀를 끌고 왔다. 개미의 능력을 활용하고 있어 힘에 부치진 않는다. 거기에 더해 몇 가지 힘이 더해지니, 7살짜리 꼬마라고 하기엔 믿지 못할 정도의 육체로 거듭났다.

벽장에서 밧줄을 꺼내 시녀를 단단히 묶어두고, 빠르게 복도와 이곳저곳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녀의 몸에서 칼을 뽑지 않아, 많은 피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

다시 돌아온 번이 문을 닫았다.

타악.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 시녀는 그것이 마치 생의 마지막 희망을 닫아버리는 것으로 보였다.

살인殺人.

번은 누군가를 죽여본 적이 없다. ‘인간’을 말이다. 하지만 그 범위를 생명체로 넓혀보면 이미 숱하게 겪어보았다. 어미가 물어온 쥐를 둥지에서 형제들과 함께 뜯어먹어도 보았고, 그 반대로 굴에 처박혀 산채로 여우 새끼들에게 먹혀도 보았다.

경험은 언제나 이성을 마비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발톱이라고 생각한 단도가 시녀의 등허리를 정확하게 뚫고 들어갔을 때, 번은 깨달았다. 나는 이 여자를 죽일 수 있다고. 그러나 번은 자연에서처럼 고기가 필요해 사냥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것을 원한다.

“······.”

아무리 여러 능력을 지녔다고 해도 기습이 아니었다면 육체적인 한계 때문에 꽤 소란이 있었겠지만, 지금 그녀는 무력했다. 마치 팔다리가 잘린 채 숨만 붙어 있는 싱싱하고 완벽한 먹잇감이랄까.

그녀를 바라보는 번의 눈동자에 어떤 기운이 넘실댔다. 인간은 절대 가질 수 없는 ‘맹수’의 그것말이다.

“······.”

번은 새우처럼 옆으로 널브러진 그녀의 머리 쪽으로 가서 쪼그려 앉았다. 입에 박아넣은 걸레를 빼내자,

“하아.. 하아.. 아파.. 제발..”

신음을 내뱉는다.

개미나 거미는 다리 하나가 떨어져도 잘 움직인다. 도마뱀은 꼬리를 자르기도 하고, 붕어도 웬만한 상처를 입어도 죽을 때까지 움직인다. 번은 그 모든 것을 다 경험해보았다.

하지만 인간은 이리도 약하다. 고작 얇은 쇳덩이 하나 몸에 파고들었다고 자빠져서 사지를 쓰지 못한다. 그런데 반대로 마음은 얼마나 독한지. 이년은 분명 조금 전 동생을 죽이려 하지 않았나?

“2황비가 시켰지?”

“하악, 하악.. 황자님.. 저 좀.. 제발..”

그간의 정을 봐서라도. 라는 말이 생략된 것 같았다. 하긴 번이 태어날 때부터 곁에 있었던 시녀다. 자식같이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더 화나지 않나? 조금 전 분명 이 여자는 샨을 죽이려 했지 않은가?

그때도 그랬다. 어머니의 젖가슴에 독을 바르던 그때도 이년은 망설임이 없었다. 지난 7년간 수많은 시도를 하면서도 죄책감이란걸 느끼긴 했을까? 번은 아직도 기억한다. 그가 3살 무렵, 마당에서 체력단련을 하고 있을 때, 이 여자가 다가와 건넨 음료. 거기에도 독이 들어 있었음을.

뻔히 그걸 알면서,

-어머, 이 땀 좀 봐. 시원하게 쭉 들이키세요!

웃던 그 가증스러운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번은 망설이지 않는다. 오늘이.

‘네년의 제삿날이다.’

번은 수천, 수만 번 이상을 혹독한 야생에서 살았었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고, 살려면 남의 살점을 뜯어먹어야 했으며 침입자로부터 영역을 지켜야 했다. 이런 행위엔 반드시 대가가 필요하다. 누군가의 생명 말이다.

죽음으로 다른 생을 이어가게 하고, 산 자는 그것을 먹고 새로운 생을 잉태한다. 그렇게 태어난 생은 다시 누군가의 먹이가 되고.. 반복되는 거대한 자연의 울타리는 잔인하리만치 정교했다.

“말해. 너는 누구의 사주를 받았지?”

짐작하는 곳은 있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야 송곳 끝을 어디에 겨눠야 할지 알 수 있으니까. 그걸 원동력 삼아 더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이니까!

“흐으으윽..!”

그녀의 몸이 뒤틀렸다. 소금 뿌린 지렁이 같다. 번은 비릿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머리채를 다시 쥐었다.

“엄살 부리지 마.”

즉사할 정도로 찌르진 않았다.

“이제 시작이니까.”

번의 목소리에 시녀는 우뚝 몸을 멈췄다. 고통보다 더 오싹하고, 서늘한 한기가 그녀의 온몸을 훑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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