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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11화 (11/177)

# 남자의 시간 #

향수병을 품 안에 깊이 찔러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번! 번이니?”

마당에 들어서니, 안에서 어머니가 나왔다.

그녀의 품엔 천으로 돌돌 말아놓은 작은 아기가 있었다. 재작년 아버지가 떠나며 남긴 씨. 번에게도 동생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순 없었다. 이 나라에서 배경 없고, 힘없는 황족 남자아이로 태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으니까. 차라리 여자로 태어났다면 목숨을 위협받진 않았을 것인데, 녀석도 쉽지 않은 운명을 타고났다.

“무슨 일이에요?”

“낮에 집정관이 다녀가셨어!”

“집..정관이요?”

번의 눈에 놀람이 스쳤다.

그를 본 건 2년 전, 아버지에게 불려갔을 때가 마지막이었다.

“직접요?”

“그래! 직접!”

아버지가 전장으로 나가 자리를 비우면, 집정관은 수도의 1인자나 다름없다. 어머니가 이리 허둥대는 것도 당연했다.

“왜요?”

“그건 잘 모르겠는데, 이걸 전해주라더라!”

품에서 편지 하나를 꺼내 아들에게 건넨다.

얼마나 열어보고 싶으셨을까? 하지만 그녀는 번을 한 사람의 인격체로 대하셨다. 품 안의 자식이라고 여기기엔 번이 너무도 어른스러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말로 전하지 않은 연유가 있을 것 같더구나.”

"네."

번은 편지를 갈무리한 뒤, 어머니에게 다가가 동생의 볼을 손가락으로 쓸어주었다.

꺄르르.

웃는 얼굴이 너무도 예쁘다.

“샨이 검거나 짙은 갈색 설사를 하진 않았죠?”

샨 리갈 드 요르간드 바야흐.

99신 중 자비와 은혜를 상징하는 ‘번’ 다음 태어난 아이는 바다의 신 ‘샨’의 이름을 따게 되어있었다. 곱고 둥글둥글한 외모의 어머니가 아닌, 선이 굵은 아버지의 얼굴을 더 많이 닮은 샨. 벌써 뼈가 굵고, 또래 아기들보다 몸집이 컸다. 잘 자라주기만 한다면 어엿한 대장부가 되리라. 잘 자라주기만 한다면..

지금은 번이 최대한 막고 있긴 한데,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모르니 경계를 철저하게 해야 했다. 샨은 번과 달라서 독에 대한 내성이 없었으니까.

‘지켜주마.’

거미로 태어났을 때도 형제가 있었고, 암컷 수달로 태어났을 때는 자매도 있었다. 알에서 깨어난 적도 있었고, 태어나지도 못하고 어미의 뱃속에서 포식자의 위장에 모자母子가 한 번에 들어가 버린 적도 있었다. 이제까지 수많은 생을 반복하며 가졌던 핏줄. 하지만 이번엔 느낌이 아주 많이 달랐다.

내 동생. 내 가족.

내 울타리 안의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가슴속 울림이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어머 얘 좀 봐. 뭐가 이리 좋을까.”

형을 보며 씨익 웃는 샨. 그 모습을 보며 가슴 안쪽이 알싸해진 번이 미소 짓다가 집으로 들어갔다. 놀고 있을 시간이 없다.

자신의 방에 들어서자, 주변부터 살피기 시작한다.

‘또 뒤졌군.’

샨이 태어나 이제 시녀가 셋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아버지의 여자가 되면 시녀 하나가 붙고, 아이가 하나 태어날 때마다 하나씩 더 하사된다. 물론 돈이 많으면 열이든 백이든 부릴 수 있겠지만, 그런 여유가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

시녀 중 하나가 첩자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어머니의 젖가슴에 독을 바르던 그년이 아직도 여기 있었으니까. 물론 마음먹으면 언제든 제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던 이유. 눈에 띄기 싫어서가 첫째고, 죽여봐야 새로운 첩자가 또다시 올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더 교활하고, 강한 년으로 대체되겠지.

“······.”

번은 분노를 참으며 눈으로 흐트러진 곳을 확인하곤, 침대에 앉아 집정관의 편지를 펼쳤다.

「..네가 영민하다는 이야기는 계속해서 전해 들었다. 사방에서 들리더구나. 오늘 람보르에 다녀오는 길에..」

오호라?

「마침 밑에서 일하던 아이가 병에 걸려 더는 수발을 들지 못할 것 같아 생각난 김에 네게 들렀다.」

“..이건?”

일자리다. 게다가 수발이라곤 하지만 집정관의 곁에서 하는 일 아닌가? 권력의 핵심에서 온갖 잡학 다식을 흡수할 수 있을 것이고, 이 나라 최고 권력자들에게 눈도장을 찍을 수도 있을 것이다. 확실히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으음..”

번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마냥 좋은 것도 아니란 걸 깨달은 거다. 집정관의 아래 들어가면 그만큼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하고, 이목도 집중될 우려가 있다. 자유롭지 못한 다는 것이다.

“젠장. 이거, 좋아해야 하는 건가?”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고.

“일단은..”

지켜보자. 손에 든 패는 많을수록 좋다.

그날 밤. 번은 침대에 누워 언제나처럼 명상을 시작했다.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번은 끊임없이 수련했다. 물론 과격하게 몸을 움직이거나 하진 못했지만, 오늘 보고 들은 것, 알아낸 것, 기억해야 할 것들을 복습처럼 정리했다.

「체력이 회복되었습니다.」

「정신력이 회복되었습니다.」

번은 젖을 뗀 이후, 잠을 자지 않았다. 언젠가 밀랍 개구리로 태어난 적이 있었는데, 녀석은 겨울잠을 자는 동안 의학적으로 완벽히 ‘죽은’ 상태로 지냈다. 하지만 봄이 오면 다시 깨어나고, 멀쩡하게 살아갔다. 그 녀석의 능력이 번에겐 이리 쓰이고 있는 것이다.

apparent death. 가사假死 능력이다.

우스스스스스.

밖에서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개의 청각으로 이런 밤엔 집 주변을 거의 1km까지 들을 수 있었다. 전엔 이런 능력들이 쌓여도 그리 의미가 없었다. 지렁이로 태어나서 무슨 청각 능력을 쓰겠나? 귀도 없는데. 그러나 이젠 하나하나가 아주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오늘도 수고 많았어!

-잘자! 고생했어!

-그래! 너도!

새벽 1시쯤. 이제 시녀들도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그녀들의 삶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가혹했다. 뭐, 시녀로 살아가는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2교대 근무 따윈 없다. 언제나 가장 늦게 잠들고, 가장 일찍 일어나야 한다. 조선의 하인들도 아마 이렇게 살았겠지. 하지만 번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그것이 당연한 세상이니까.

이제 15분쯤 지나면 너무 피곤해서 오히려 뒤척이던 시녀들도 완전히 곯아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때가 번의 은밀한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시간이었다.

스윽,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낮엔 공부하거나 도시를 다니는 이상할 것 없는 활동을 했지만, 밤엔 다르다. 그에겐 개발해야 할 능력과 비밀이 가득했으니까.

‘오늘은 꼭 완성하자.’

애는 하루가 다르게 큰다는 말이 있다. 돌아서면 부쩍 커 있다는 말도 있다. 그만큼 빨리 성장한다는 뜻인데, 번은 그보다 몇 배는 쑥쑥 자라고 있었다. 육체가 아닌 다른 부분들이 말이다.

순간, 번이 창가로 다가서는데, 그의 몸이 벼락 맞은 것처럼 움찔했다.

틱, 틱.

어떤 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었나?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 이젠 더 확실한 게 그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콩, 코옹. 콩.

사람이 조심조심 걸어도 뒤꿈치가 바닥을 찍는 소리는 반드시 나게 되어있다. 까치발로만 걸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번의 청각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었다.

“······?”

이 시간에 움직일 사람은 없다. 볼일이 있어도 요강처럼 생긴 오물통을 방으로 가지고 들어간다. 그런데도 인기척이 느껴진다는 것은 평소완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저건?’

가만히 서서 얼굴을 찡그리던 번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상한 발걸음이 동생이 있는 방으로 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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