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적必敵 #
“자네도 앉지?”
황제가 집정관을 보며 말했다.
“아닙니다. 좋은 시간 나누소서.”
집정관은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기 싫다는 얼굴로 방을 나가버렸다.
“쯧.”
황제는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어째 부하란 놈들이 하나같이 다 저런단 말인가? 통제가 안 돼요. 통제가.
“그래, 잘 지냈느냐?”
“덕분에 그랬사옵니다.”
황제는 쓰게 웃었다.
녀석의 말에 가시가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날 원망하느냐?”
“아닙니다. 자식이 어찌 부모를 원망하겠사옵니까.”
5살. 이맘때 아이들은 이제 머리가 트고, 호기심이 왕성해진다.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대책 없이 집을 어지르기도 한다. 빠른 아이들은 학문을 익히기도 하고, 반대로 느린 아이들은 아직도 개처럼 뛰다 곧잘 넘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 녀석을 보라. 완전히 차원이 다르지 않은가? 배움이나 그런 영역을 떠나, 어른 한 사람이 마주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내 자식인데, 내 자식 같지 않은 묘한 기분. 그래서일까? 황제는 어떤 위화감을 맛보며 입술을 뗐다.
“네가 보낸 편지는 모두 읽어보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나이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
번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으니까.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겠지.
“놀라지 않는구나.”
“그리 바라고 보냈던 것이니까요.”
“내가 읽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려고 했느냐?”
“실망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제겐 그럴 여력조차 없사옵니다.”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나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두통이 밀려올 정도다. 잠을 자면서도 자객이 숨어들어 날카로운 칼을 목젖 아래로 찔러넣지 않을까 밤사이에도 몇 번씩 깨야 했고, 날이 밝으면 어떤 방법을 써야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지 계속 궁리해야 했다.
“원, 녀석..”
번의 표정을 읽은 황제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래서 자식을 만나지 않으려 했다. 아무리 독하게 마음을 먹어도, 그도 인간인 이상 얼굴을 보면 마음이 물러질 것이 뻔했으니까. 심지어 이렇게 영특한 녀석을 보면 더욱.
“······.”
황제가 번을 빤히 바라보았다.
“······.”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 흘렀다.
아비는 아비 역할이 처음이었고, 자식 또한 이런 쪽엔 서툴다. 아빠! 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얼굴로 매달릴만한 정신연령이 아니었으니까. 이때, 번은 품에 작은 손을 찔러넣었다. 잡혀 나온 것은 편지였다. 번은 그걸 아버지 앞에 내려놓았다.
“열한 번째이옵니다.”
편지는 매일 밤 써서 이른 아침 할아버지에게 전달했다. 당연히 황제가 받아본 것은 어제의 것. 그리고 오늘 이것은 부치지 못한 11번째 편지였다. 아침까지만 해도 직접 들고 오게 될 줄은 번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기회가 있을 때 전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했다.
“······.”
황제는 편지를 집어 들었다.
“내가 지금 읽어보길 원하느냐?”
“그것으로 마음이 바뀌신다면요.”
황제가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면, 번은 이 방에 들어설 때부터 직감했다. 나는 전장으로 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말이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
번이 입술을 꾸욱 다물자, 황제는 코를 찡긋거리며 편지봉투를 뜯었다.
「아버님, 오늘도 소자 번이옵니다.」
편지 내용은 이전 것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앞서 군대, 람보르에 관해 썼다면 이번엔 군주에 관해서 기술하고 있었다. 스캇과 얘기하고나니, 확실히 보였다. 그리고 알았다. 이놈이 도발하고 있다는 것을. 일국의 군주에게 참된 군주의 표상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그러하지 않은가?
「백성이 없으면 국가도 없고, 백성이 사랑하지 않는 군주는 역사에 폭군으로 기록될 뿐이옵니다. 부디 굽어살피소서.」
현재 부족한 점이 있고,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는 뜻 아닌가? 황제의 부덕으로 인하여 말이다. 아들이 아니었으면 당장 목을 쳐버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황제는 편지를 끝까지 읽고, 내려놓았다. 분노한 기색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동조하는 표정도 아니다. 그저 담담한 얼굴로 번을 바라본다.
“······.”
그의 기세가 아주 무겁게 변해갔다. 존재감은 서서히 주변을 먹어치웠고,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다른 힘을 쓰지 않고 오로지 기도만으로 이런 형상을 만들어내는 경지. 제왕의 그것이었다.
“나는 너를 데려가지 않을 것이다.”
“알고 있사옵니다.”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냐?”
“결과가 바뀌지 않는다면..”
“아니다.”
황제는 번의 말을 잘랐다.
“그래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이번 일을 계기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사내는 실패에서 배워야 하고, 성장해야 한다. 나는 그리 싸워왔다.”
번이 움찔하며 머릴 숙였다.
“경청하겠사옵니다.”
황제는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짓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묵직했고, 상냥하진 않아도 울림이 있었다.
“세 번째 편지까진 너를 데려가려 했다. 그것이 다른 아이들에게 편애로 보일지라도 감수할 생각이었다.”
“······!”
번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하지만 그 후엔 생각이 바뀌었지. 나는 네가 생각하는 군주가 아니다. 폭군이라 했지?”
“예.”
오늘 편지에 썼던 단어다.
“나는 폭군이 될 것이다.”
번은 고개를 들어 황제를 똑바로 보았다. 이것이었나? 번의 머릿속이 빠르게 정리되고 있었다. 답이 나오기 전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사람을 너무 작게 봤다.’
황제는 번이 가늠한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남자였다.
“역사? 그런 건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역사를 쓰려 하는 것이 아니다. 전설을 만들 것이다. 신화를 구축할 거다. 창세가 필요하다면 그리할 것이고, 혼돈이 필요하다면 주저 없을 것이다.”
꿀꺽. 침이 절로 넘어갔다.
“그렇게 나는 세상 전부를 발아래 둘 것이다.”
아버지의 포부를 들으며 번은 느낀다. 어쩌면 그가 훗날 상대해야 할 적중 가장 무서운 사람은 바로 이 남자가 아닐까 하는.
“그래서 너와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나에 대해 너무 몰랐다. 그것이 네가 실패한 원인이다. 적을 바로 아는 것. 승리는 언제나 그것에서부터 나온다.”
적敵이란다. 아버지와 아들인데!
욱 해서 그럼 죽으란 것이옵니까? 라고 말하려다 쓰게 웃은 번. 투정부릴 때가 아니지 않나?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 것이고, 아버지는 천 냥이 아닌 만 냥도 쉽게 내어줄 수 있는 권력자다.
“명심하겠습니다. 애초에.. 제 전장은 이곳이었습니다. 비록 바뀌는 것이 없다 하여도 살아남아 전부 가질 것이옵니다.”
이미 그는 황비들의 암투를 알고 있었다.
“그래, 그게 내가 원하는 대답이었다. 사내는 언제나 칼날 위에 서서 살아야 한다. 나태하고 게을러지는 순간, 이미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게 당연하다고 말한다. 세상에 이런 부자父子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서운할 정도의 독심毒心이었다.
“너의 무기를 가져라. 너의 군대를 만들어라. 쉽지 않겠지만, 그리할 수 있으면 누구보다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내가 그리했다.”
“노력하겠사옵니다.”
“가진 게 없다면 두 배, 재능이 없다면 세 배, 욕망이 있다면 네 배를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남들과 같아선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 알겠느냐?”
번은 말을 끝까지 듣고,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축객령이 떨어지지 않았건만, 허리를 깊이 숙이며 예를 갖춘다.
“다시 뵐 그 날까지 부디 옥체보중하소서.”
뭉클!
“······!”
황제는 이때 심장 안쪽이 쥐어짜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오래전 한 여인에게 비슷한 감정을 느껴본 적 있었지만, 그 후론 없었는데.
피로 이어진 가족. 혈연. 그것에서 오는 당김이 그의 팔을 들게 했다.
“······?”
번의 작은 팔을 쥔 황제가,
“으음..”
신음한다. 스스로도 이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것 같다.
“아니다. 나가보거라.”
“예.”
번은 그렇게 방에서 나갔다.
빈자리가 묘하게 황제의 마음을 울렸다.
“거참.”
전장에서 적의 피를 마시고, 술로 목욕하며 포로의 목을 단박에 뽑아버리는 그가 이런 감성에 빠지다니? 이런 건 아주 오래전에 다 털어버렸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묘한 녀석이란 말이지..”
그는 중얼거리며 옆쪽을 보았다. 그러면서 누군가를 불렀다.
“은사.”
분명 홀로 있었건만, 아무것도 없었던 허공에서 황제의 시선 끝에 한 남자가 스윽 나타났다. 온몸을 검은 천으로 두르고 그걸로 얼굴까지 가렸다. 눈만 내놓고 있는 괴인.
“예, 주군.”
“저 아이. 어떻게 보나?”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캇, 딘딘, 집정관과 함께 같은 꿈을 시작한 사내 중 하나다. 황제가 몇 년씩 황국을 비워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던 까닭은 집정관의 능력도 있었지만, 은사의 역할도 컸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른다. 은사가 무슨 일을 했는지. 그의 모습을 본 사람조차 최근엔 없을 정도였으니까. 아니, 본 사람은 모두가 죽었다.
“어떻게 보냐니까.”
“······.”
-너는 앞으로 생각하지 말고 살아라. 그 어떤 선택이나 판단도 용납하지 않겠다. 그저 내 칼이 되는 거다. 갓 난 아이라도 죽이라면 죽이고, 철천지원수라도 살리라면 살려라. 알겠느냐?
오래전 당신이 그리 말해놓고, 이리 묻는다. 은사는 입꼬리를 씰룩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크게 될 아이입니다.”
“아아, 그건 딱 봐도 다 아는 거고.”
황제가 짓궂게 웃으며 은사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찍었다. 슬쩍 피하며 다시 대답하는 은사. 이번에도 원하는 대답을 못 하면 다음엔 발이 날아올 거다.
“동同으로 물으신다면 구할. 적敵으로 물으신다면 일할입니다.”
“일할이라..”
녀석이 골칫거리로 성장할 확률이 10%라는 거다.
“꽤 후한데?”
“저는 본 것만 말했을 뿐입니다.”
똑똑한 녀석인 만큼 큰 무리수를 두지 않을 거다. 은사가 판단한 번은 그랬다.
황제의 미소가 짙어졌다.
“재미있군.”
은사가 흠칫했다. 이 남자가 이런 표정을 지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내기할까?”
“안 합니다.”
“거참..!”
역정을 내는 황제 곁에서 은사가 슬쩍 멀어졌다. 김이 샜는지 황제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임무를 변경한다.”
“하명하십시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저놈을 지켜봐라.”
“그것이 전부이옵니까?”
“알잖아?”
아니라는 거.
은사는 꾸벅 머리를 숙였다.
“나는 필적必敵에 구할. 거기에 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