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8화 (8/177)

# 듣고 있다. #

-저 아이가, 그 아이라지?

-폐하께서 부르셨다는 소문이 사실일까?

-전장에 따라가겠다고 말했었다지?

-어쩜! 고작 다섯 살이라던데!

사방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이라면 절대 들을 수 없을 거리였지만, 번의 귀엔 속속 박혔다. 개로 태어나 얻었던 능력. 그간 이것으로 아我와 적敵을 구분해왔기에 컨트롤이 능숙하다. 사람이란 본래, 몰래 뒤에서 남을 평가할 때 속마음이 드러나기에 아주 유용한 능력이었다.

“무엇을 보는 것이냐?”

집정관이 뒤를 돌며 물었다.

“신기해서 그렇습니다.”

아이답지 않은 차분함이 마음에 든다. 집정관은 본래 소란을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무엇이 신기하지?”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저 높은 성벽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완벽히 통제되고 있는 보이지 않는 힘까지 경이롭습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집정관이 지나고 있어서가 아니다. 모두가 열심히 맡은 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감히 집정관이 지나는데, 망치 두드리느라 예조차 갖추지 않는 대장장이가 있을 리 없었으니까.

“그런 것이 보이더냐?”

집정관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이게 어디 5살 아이의 안목인가? 무릇 세상은, 아는 만큼만 보이고,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런데 이런 것들에 관심을 두었다는 것은 평소 생각을 했다는 얘기가 되지 않겠는가. 달콤한 사탕 따위나 또래 친구들이 아닌 사회를, 그걸 이루는 인간군상을 말이다.

‘과연 폐하께서 관심을 둘만한가?’

오래 전, 다섯이 모였다. 다섯은 왕국을 황국으로 만들었고, 이젠 제국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었다. 땅은 커졌고, 사람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났지만, 아직도 다섯은 숫자를 늘리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그 다섯 중 하나가 타인에게 호기심을 드러냈다.

집정관은 번의 표정을 살피며 노파심에 한마디 했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 했다.”

“뾰족한 송곳은 가만히 있어도 주머니를 뚫고 나온다는 뜻이지요.”

“그렇다. 내가 왜 이 말을 했는지 아느냐?”

번은 이 순간 선택해야 했다.

패를 보일 것인가? 감출 것인가? 고민은 짧았고, 선택은 더욱 빨랐다.

“제가 올해 마신 독그릇이 세 번입니다.”

“······.”

집정관의 발길이 우뚝 멈췄다.

“끝이 뾰족하다 말한 적 없어도 누군가는 저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바보 행세를 하다간 진짜 바보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생각했습니다.”

독 내성이 아니었다면 몇 해 전, 이미 그리되었을 것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찌르겠다?”

“아직은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그럴 힘도, 배경도 제겐 없습니다.”

‘아직은’ 이란다.

집정관은 아주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한 사내가 대륙을 통일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다섯 중 하나가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직은 불가능한 일이겠지. 하지만 내가 살아있는 한 반드시 그리될 것이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해준다면 나는 계속 강해질 것이니까.

그는 황제가 되었고, 아직 꿈은 진행 중이다.

“하지만 제게 시간이 허락된다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집정관은 번을 바라보았다.

이 어린 것이 자신의 어림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애석해하며 그 짧은 팔다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소국의 왕자로 태어나 한탄하던 어떤 남자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인가?’

“큭큭큭..”

집정관은 웃었다.

재미있는 놈이다.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일단은 마음에 든다.

“네가 받았다는 독그릇에 관해선, 내, 따로 알아보마. 가자.”

“예.”

집정관은 다시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

내성의 중심.

황제가 기다리는 곳으로.

.

.

.

“어떻게 보나?”

황제의 집무실.

두 사람이 앉아있었다.

“흐음.”

얼마 전, 번이 대륙제일창이라고 추켜세웠던 딘딘이 무武장이라면 스캇은 지智장 포지션이었다. 실제로 그가 없었다면 무패의 대기록을 이어가지 못했으리라.

“흐으음.”

열 개의 편지를 보며 스캇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간을 좁히기도 하고, 눈썹을 꿈틀거리기도 해가면서 몰입해있을 뿐.

“어떻게 보냐니까?”

“······.”

보는 사람이 없을 때, 둘은 친구 같다. 그만큼 서로 믿을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번에도 대답이 없자, 스캇의 손에 들린 편지를 황제가 낚아챘다.

“······?”

갸웃하며 황제를 보는 스캇.

왜 빼앗느냐는 표정이다.

“허..”

그 모습에 황제는 기막히다.

“그 정도인가?”

“무엇이 말입니까?”

“네가 그렇게 심취할 정도로 대단하냐는 말이다.”

스캇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아! 하며 탄성을 질렀다.

“이걸, 그때 그 아이가 썼다고 했습니까?”

“그래.”

“열두 번째 아들이죠?”

“그렇다니까?”

“으으으음..”

스캇은 턱을 쓰다듬으며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게 답답했을까? 황제가 가슴을 두드렸다.

“거, 시원하게 말해보래도!”

“······.”

하지만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스캇에겐 시간이 더 필요했다. 약 5분쯤 지났을까? 신중한 스캇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완벽합니다.”

평소 타인에 대한 평가에 인색했던 그를 볼 때, 대단한 결과였다.

“무엇이?”

“전부요. 첫 번째 편지부터 열 번째까지 가치관과 신념이 단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약자의 눈으로 보며 큰 틀에서 어떤 것을 취하고, 어떤 것을 버려야 하는지 너무도 명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이건 일종의 철학이나 사상이 정립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마지막 이 정령에 대한 건까지. 군주가 어떻게 백성에게 다가가야 하는지까지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군요. 게다가 이 애민이란 개념. 확실히 잘 쓰면 백성을 통제하는 데 좋겠습니다.”

그랬다. 군대에 관해 조언할 때도 지휘관의 편의보다는 병사를 먼저 생각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효율을 높이고 사기를 올릴 수 있도록 행군과 보급, 식량의 배식문제까지. 거기에 이 꼬마 녀석은 틈틈이 자신을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이 정도로 쓸만합니다. 그러니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라고 말이다. 물론 노골적으로 그런 문구가 들어간 것은 아니었지만, 스캇은 이미 눈치챘다.

“무엇하나 버릴 것이 없습니다. 군대나 람보르에 전부 바로 적용해도 될 정도입니다. 물론 람보르의 그 노인네들이 물의 정령을 빼앗길까는 의문이지만. 큭큭.”

당장 녀석의 할아버지부터 반대하고 나설 것이다.

“쓰읍.”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황제는 입맛을 다시고 묻는다.

“협곡은?”

“이 내용대로 그들이 대비했다면 우리 쪽이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은 확실합니다.”

“으음..”

꼬마의 말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스캇이 수렴하는 계책을 냈다는 것이 대단한 거다.

“그럼? 진로를 바꿔야 하나? 시일이 두 달은 더 걸릴 터인데.”

황제의 말에 스캇이 피식 웃었다.

“진다곤 안 했습니다.”

아주 매력적인 미소가 짙어졌다.

“그리고 우리가 지름길을 놔두고, 돌아가면 놈들이 얼마나 우습게 알겠습니까? 이번 원정은 대륙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초입의 첫 포문입니다. 보여줘야죠. 이깟 함정 따위.”

“얼마든지 힘으로 뚫을 수 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해야 한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의 첫째는 공포입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소小를 희생해 대大를 얻는 것은 언제나 옳습니다.”

피해가 클 것이라 했다. 그 말은 병사가 적잖게 죽을 거란 말과도 같다. 그런데도 스캇은 뚫자 한다. 세상에 무적의 군대의 위용을 보여주기 위해.

“독한 놈.”

“폐하만 하겠습니까. 크크크.”

번이 군을 위해 요목조목 따져 조언했지만, 애당초 이 두 남자는 생각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뭐, 그래도 쓸만하긴 합니다. 잘 이용하면 협곡에서 놈들의 뒤통수도 칠 수 있을 것 같고요. 이대로 흘러간다는 전제가 붙긴 하지만, 상황을 봐서 써먹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피해드릴까요?”

스캇의 말에 황제가 끄덕였다.

“만찬에서 뵙겠습니다.”

저녁에 지휘관들과의 식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 전에 짧게 가지는 부자父子의 시간. 번이라는 녀석에 대한 호기심이 있긴 했지만, 여기 끼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스캇은 발걸음을 뗀다. 그러면서 본다. 집정관과 함께 서 있는 꼬마를.

‘오호라.’

과연, 두 번째 보니 느낌이 또 다르다. 전장에 따라가겠다 말했을 땐, 그저 어린 애의 치기로 보았다면 이제 편지를 보고 나니, 괴물로 보였다. 그래서 확인해보고 싶다. 아주 잠깐이면 될 테니까.

그의 눈이 살짝 짓궂게 변하자, 집정관이 먼저 나섰다. 스캇을 향해 팔을 들어 손바닥을 편다. 다가오지 말라는 뜻이다.

“거기까지.”

“왜? 내가 뭘 어쨌다고?”

“뭐든 거기까지.”

“쳇.”

김 샜다는 듯 혀를 차며 스쳐가는 스캇이 번을 뚫어지게 보았다.

-또 보자. 꼬마야.

입 모양으로 그리 말하고, 머릴 돌리는 스캇의 등을 보며 번은 끄덕였다. 황국을 지배하는 다섯 중 셋이 여기 이 공간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 불호라기보단 아직 호에 가깝다.

-무엇하나 버릴 것이 없습니다. 군대나 람보르에 전부 바로 적용해도 될 정도입니다. 물론 람보르의 그 노인네들이 물의 정령을 빼앗길까는 의문이지만. 큭큭.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번은 이미 그들의 대화를 밖에서 다 들었다. 앞은 몰라도 뒷부분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이 기회를 살린다!

번의 눈이 별처럼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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