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7화 (7/177)

# 딜. #

『아버지. 소자 번이옵니다.』

편지를 누가 보냈는지는 바로 알아보았다.

“고놈 참..!”

-올해 다섯이옵니다.

고작 다섯 살이라 하였다. 그도 4살 때 검을 처음 잡은 이후로 신동이란 소릴 곧잘 듣고 자랐지만,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문文과 무武를 비교할 순 없겠지만, 사고와 통찰력이 참으로 남다르지 않은가? 현자의 서를 읽는다고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과연..”

그는 어느새 9번째 편지를 보고 있었다.

편지는 같은 내용이 단 하나도 없었다. 첫 번째 편지에 모든 내용의 핵심이 들어있었고, 2번째부터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보강으로 이뤄져 있었다. 거기에 여섯 번째부턴 대규모 군사가 움직일 때, 좀 더 효율적으로 보급과 이동, 관리할 수 있는 방법론까지 기술되어 있었다. 이건 현자의 서 53권의 병법론을 봤다고 알 수 있는 지식이 아니었다.

“허..! 허어..”

그는 9번째 편지까지 다 읽고, 다시 첫 번째 편지를 들고 물끄러미 앉아있었다.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진 아무도 모르겠지만,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때였다.

똑똑-!

노크와 함께 열리는 문.

“폐하.”

황제를 수행하는 집정관이다.

“시간이 다 되었는데, 기별이 없으시기에..”

“아.”

황제는 집정관을 돌아보며 묻는다.

“이 편지, 누가 가져왔지?”

집정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람보르에서 보내온 것들을 제가 옮겼습니다.”

황제는 매일 같은 시간 새로운 서류 더미가 쌓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은 곧 초기화될 거다. 본래 일정대로 막 여기서 나갔다면 말이다.

“가져오게.”

“어떤..?”

황제는 번이 보낸 편지를 들었다.

“이것과 같은 것이 있다면.”

“예. 바로 찾아보겠습니다.”

집정관이 나가자, 황제는 다리를 꼬고 생각에 잠겼다.

번이라 했다. 자식이지만, 얼굴이라곤 한번 본 것이 전부. 물론 그 한 번의 만남에서 녀석이 아주 영특하다는 것은 느꼈다.

‘배후에 누가 있는 건가?’

의심도 든다. 그의 아내들은 대부분 점령한 왕족의 딸이나 여왕이었다. 외척이 람보르에 살아 있는 경우도 있고, 번의 어미 역시 그 중 하나다.

‘그가 나섰는가?’

5살짜리 꼬마가 이런 편지를 쓸 수는 없을 것이다. 허면 누군가 도왔다는 얘긴데.

‘좋지 않은 수를 두는군.’

어미는 아닐 것이다. 그런 야심을 품은 여자로 느껴지진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남은 외척은 하나. 번의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그가 사납게 웃었다. 정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린 애를 이용해 이렇게 노골적으로 야심을 드러내는 얕은 수는 짜증만 치민다.

“폐하.”

“들라.”

나갔던 집정관이 편지를 하나 들고 왔다.

“곧 나가겠다.”

“예. 천천히 용무 보십시오. 밖에 기다리라 일러두었습니다.”

집정관이 나가자, 황제는 아들이 보낸 열 번째 편지를 뜯었다.

이번 것은 앞선 것들보다 좀 더 두툼했다. 내가 지금 이걸 왜 보고 있을까? 라는 황당함도 들었지만, 아마도 그것은 감탄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실제로도 편지의 내용은 아주 그럴싸했다. 게다가 간자를 대비하기 위해 이번 출정에 목적지를 아직 대중에게 알리지 않았건만, 협곡의 위험성을 경고한 것은 아주 대범하지 않은가? 이 정도의 정보력을 가지고 있다! 라는 뜻을 내비친 것 아니겠는가 말이다.

협곡으로 향할 것을 아는 사람이라곤 많아야 넷. 그들이 배신할 리 없으니, 줄을 잘 댄 것이겠지 생각한 황제는 맹수처럼 코를 찡긋하며 편지의 첫 장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오늘도 소자 번이옵니다. 강녕하신지요?」

그의 눈이 글자를 하나하나 읽어내려갈 때마다 표정이 풀리기 시작했다. 입꼬리도 씰룩였다.

「닿을지 모르는 기약 없는 글을 쓰고 있지만, 소자, 언제나 아버님 염려뿐이옵니다. 자식이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 당연하고 당연한 것이겠지만, 철없는 투정이라 곱게 여겨주시고 어여삐 봐주십사 청해봅니다.」

녀석, 최근 현자의 서 - 시詩편이라도 읽고 있는 건가? 평소라면 낯간지럽다며 치워버렸을 그였지만, 어찌 자식이 보낸 편지에 가슴 구석이 간지럽지 않을까?

「요 며칠 람보르에 다녔습니다. 할아버지를 뵈러 간다는 핑계였지만, 사실 편지를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제겐 마땅치 않아 어쩔 수 없음을 헤아려주시옵소서. 아버님, 그런데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다시 이렇게 아룁니다.」

이번 편지의 내용은 군사나 병법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람보르에 관한 것들이었다. 누군가를 밀고하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 방식을 아주 조금만 바꾸면 훨씬 더 효율적으로 시스템이 굴러갈 수 있는 작은 아이디어 같은 것들이었다.

가령 2층 복도 끝방에 기사들의 휴식공간이 있는데, 무거운 갑옷을 착용하고 다니는 그들의 발걸음 소리가 바로 아래 1층 세금행정관이 있는 곳에 소음을 유발하고 있다는 사소한 것부터, 외부인이 많이 드나드는 행정민원실이 3층에 있어 외부인도, 그들과 마주치기 싫은 람보르 직원들도 양쪽 모두 얼굴을 붉힌 적이 있다는 사례까지 구체적으로 들었다.

「무엇보다 정령의 배치에 낭비가 심합니다. 외지인이 많아 통역을 위한 언어의 정령을 가까이 두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과시와 소유욕, 명예를 위해 모든 곳에 물의 정령을 배치한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빈민가에 두소서. 시장에 두소서. 광장에 두소서. 람보르엔 1층에 하나만 배치해도 충분할 것입니다. 빈민가, 광장, 시장, 전장은 청결하지 못해 병에 걸리고 그것이 타인에게 옮겨가 전염병으로 유발하기 가장 쉬운 곳입니다. 황제께서 그런 낮은 곳까지 보우하시는 것을 어필할 수도 있고, 동상 하나 세우는 것보다는 그 자리에 정령을 배치하는 것이 애민을 널리 알리는 것에 확실한 효과를 줄 수 있다 사료 됩니다.」

“거, 참..!”

신통한 놈이로다.

열 번째 편지에서 알았다.

이놈의 배후에 외척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놈은 진짜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낀 걸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소자, 언제나 황국이 번성하고, 번창하길 기도하고 있사옵니다. 그러기 위해선 아버님께서 무탈하셔야 한다는 것도 잘 아옵니다. 그래서 오늘도 전쟁의 신 ‘샤’께 기도합니다. 부디 건승하십시오.」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 주변을 본다. 집정관이 기다리고 있고, 시녀들이 줄을 서 있었다. 황제는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다가 집정관에게 바짝 다가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녀석을 데려오라.”

집정관의 얼굴이 가볍게 굳어졌다.

이제까지 자식들을 개인적으로 만난 일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실이 퍼져나가면 외부에서 어떤 눈으로 볼지도 짐작이 간다. 하지만 바로 황제의 뜻에 답한다.

“시간은 언제가 편하시겠습니까?”

“만찬 전이 좋겠지.”

“그리 준비하겠습니다.”

황제는 끄덕이며 허리를 펴고, 성큼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곧 있을 출정 전에 부대를 점검하는 날이다. 매번 하던 행사지만, 그의 등이 오늘따라 묘하게 가벼워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황제 폐하 납시오!

-황제 폐하 납신다!

-차렷!

-바로 서라!

저 멀리 도열한 2만의 상급병사가 보였다. 그들은 외친다.

-샤! 샤! 샤!

-샤! 샤! 샤!

전쟁과 승리를 뜻하는 고대어語.

그 단어와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를 바라보면서. 언젠가 함께 마셨던 진득한 피의 향에 취해..

-우아아아아아!

-샤! 샤! 샤!

그가 병사들의 앞에 섰다.

그리고 사자처럼 큰 목소리로 말했다.

“두려운가?”

-아닙니다!

-아닙니다!

“나는 두렵다!”

그의 말에 모두가 숨죽였다.

“고통이, 상처가,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승리하지 못할까, 그것이 두려울 뿐이다! 하지만!”

쿠웅! 쿠웅! 쿠웅!

이만의 병사가 발을 굴렀다.

“너희가 있음에 두렵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이길 것이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샤! 샤!

황제의 기도에 취해 병사들의 함성은 황궁 전체로 구석구석 퍼져나갔다.

.

.

.

‘됐어!’

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머니를 찾아온 집정관. 아버지가 자리를 비우셨을 때, 실질적으로 황국의 1인자나 다름없는 최고 권력자다. 황제의 가장 가까운 그림자 중 하나로 알려진 인물.

“공식적인 행사는 아니니, 의복에 예를 갖추진 않아도 됩니다.”

그는 어머니에게 그리 말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번과 눈이 마주친다.

‘이 아이인가?’

황제는 아주 철저하고, 똑똑한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과격하고, 냉정하다. 자식이라 해도 가차 없었고, 그런 그가 이런 꼬마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무척이나 이례적인 일이었기에 집정관 또한 눈동자가 매섭다.

“알겠습니다. 그리하도록 하지요.”

황제의 여자에게 허락된 재물은 방3-5개 정도가 딸린 집 한 채와 시녀 몇이 전부다. 따로 사람을 두는 것을 막진 않았으나, 몰락한 왕족 출신을 생각하면 인건비를 감당할 수 있는 여인은 별로 없었다. 번의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 유능한 용병이나 기사 하나 두어, 번을 지키고 싶어도 그럴 형편이 못됐다. 그런데 이런 집구석에 집정관이라니? 그녀가 얼마나 놀랐는지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자식을 보내는 어미로서 그 정도 권리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예외도 있지만, 황제의 여자는 왕족 출신이 많다. 그래서 지능이 높고, 예의가 바르다. 집정관 또한 그녀와 척을 질 이유가 없었기에 날을 세우진 않았다. 단지 본다.

“······.”

그녀가 아닌 번을.

“좋을 수도.”

그의 입이 묘한 웃음과 함께 열렸다.

“나쁠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별일 없을 겁니다. 처음 있는 일이니까요.”

황국의 구렁이들이 움직일 시간조차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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