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지할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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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해. 사나워 보여.」
「괜찮아! 내가 들개 한두 번 잡아보나? 하! 그놈 참 맛있겠다! 저, 살 오른 거 보소!」
「쉿! 목소리 낮춰!」
「어엇! 도망간다!」
「쏴! 쏘라고!」
노련한 사냥꾼들이 들개를 사냥했다.
『우수한 청각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183일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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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낸 것도 나흘 전.
번이 이곳에서 믿을 수 있는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인 할아버지를 통해 부탁했다.
오늘도 번은 해가 뜨자마자, 람보르(관청)로 향했다. 황궁의 실무를 보는 관리들이 모여 일하는 곳이라 생각하면 되는데, 최근 귀환한 황제 덕에 매일같이 야근에 야근이었다.
이 등을 오늘 아침에 켠 것일까? 아니면 어제부터 계속 켜져 있었나? 아마도 후자가 맞을 것이다. 번은 쓰게 미소 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나 한국이나 높으신 분이 등장하면 죽어 나가는 건 아랫사람들 밖에 없나보다.
“오늘도 왔구나!”
황국에서 황자의 위치는 아주 애매했다. 아직 후계자가 지목된 전례가 없기도 했고, 상황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기에 지금은 일종의 견습기사 정도의 취급이었다. 신분은 인정하지만, 과한 예를 갖추진 않는달까? 더러는 제대로된 예우조차 못받는 황자들을 보며 안타까워 혀를 차는 자들도 있을 정도였으니, 요만도 그 중 하나였다.
람보르의 모든 시설을 총괄하는 그는 감독관 역할도 겸한다. 전쟁이 한차례 끝날 때마다 포로로 잡혀 온 전직 왕족들에게 일을 가르치고, 람보르에 적응하게 하는 것이 그의 임무이기도 했다.
“고생하십니다.”
작은 손으로 가방에서 과일을 하나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렸다. 귤이다. 어제저녁 간식으로 나온 것인데, 먹지 않고 챙겨서 가져온 거다.
“허허..! 이러지 말래두!”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이래뵈도 흔한 과일은 아니었다.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노랫말처럼 번이 귤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뇌물이 필요했다. 아이답게 어떤 행동을 했을 때 타인에게 점수를 많이 딸 수 있는 그런. 과하지 않아야 하며, 속이 보여서도 안 된다.
“오늘도 할아버지 보러 온 게냐?”
황제는 똑똑했다. 타국의 시스템이 더 낫다고 판단하면 주저 없이 그것을 황국에 적용하려 했고, 애초에 황족들은 엘리트로 키워진 인재들이 많다는 걸 인정했다. 전문인력을 키우는 것에 시간과 돈이 많이 들지만, 원래 그 일을 하던 사람을 잡아와 시키면 바로 쓸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때문에 람보르엔 언제나 이민족들로 바글댔다. 번의 할아버지. 그도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예.”
“허허! 기특하기도 하지.”
13년 전까지 남부 파르시아 왕국의 왕이었던 요만은 까칠하기로 정평이 난 사람이었다. 정치를 잘해 지금까지 모아온 부(富)로 돈도 부족함없이 모았고, 이민자 특성상 올라갈 수 있는 최대의 위치까지 올라온 그는 더 이상의 권력욕도 없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사명감뿐이었는데, 람보르를 잡음 없이 관리하는 것에 인생을 쏟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에게 억만금이 무슨 소용이겠나? 그런데 귤은 통한다.
“너무 오래 있진 말거라. 보는 눈이 많아서 좋을 게 없으니까.”
“고맙습니다.”
귤을 까서 입에 톡 털어넣으며 그는 옆을 본다. 본래대로라면 허가받지 않은 외부인은 들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요만이 판단한 번은 위험 인물이 아니었다. 똘똘한 아이 하나가 할아버지가 좋아 보러 온다는데, 어쩌누? 입구를 막아선 기사도 웃으며 번에게 말했다.
“나도 주는 거냐?”
허리까지도 안 오는 작은 꼬마가 그보다 더 작은 손을 꼬물거리며 꺼내 든 귤 하나에 날카롭게 벼려졌던 기사의 표정이 봄날 고드름처럼 녹아내렸다.
“히키가 좋아할 거에요.”
“허, 녀석도 참..”
엊그제 지나가는 말로 나도 너만한 딸이 있다,며 얘기해줬을 뿐인데, 용케도 이름까지 기억하네?
“아저씨가 드시면 안 돼요!”
저쪽으로 달려가며 혀를 삐죽 내미는 번을 보며 기사는 흐뭇하게 웃었다. 참으로 똑똑하고 밝은 아이다. 그는 번이 사라지자 다시 머리를 돌렸다.
“······.”
자신을 바라보는 요만의 시선을 느낀다. 둘은 동시에 입맛을 다셨다. 귤의 맛이 떠올라 그런 게 아니다. 번. 황국의 12번째 왕자. 저 어린 아이에게 가혹한 운명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것을 느낀 것이다. 황제의 뒤를 이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1명뿐일 테니까. 나머지는..
“에잉..”
요만은 머리를 흔들며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그가 신경 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더 생각해봐야 기분만 잡칠뿐.
한편, 복도를 걷고 있는 번의 눈은 아주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어떤 부서로 나뉘었고 뭘 취급하고 있는지를 모조리 머릿속에 넣으려고 노력 중이었다. 대놓고 볼 순 없으니 그저 지나가는 길에 아무렇지도 않게 훑어보는 정도로만 보여야 해서 몇 번이고 시도해야만 했다.
‘인명부를 관리하는 곳인가? 아니면 사망자를 처리하는 걸까?’
나흘째지만 아직도 판단할 수 없는 것들이 수두룩했다. 이렇듯 번에게 허락된 정보는 너무도 적었고, 시간은 더 적었다. 괜히 얼쩡거리다가 쫓겨나면 이조차 못할 것이니까.
복도 끝 계단을 타고, 4층으로 향했다.
람보르는 꽤 체계적이었다. 컴퓨터를 활용하는 21세기 대한민국 시청 같은 곳에 비하면 다소 부족한 부분들이 있긴 해도, 여긴 마법이 있고 정령이 있었다. 어떤 면에선 훨씬 더 능률적으로 굴러가기도 하는데, 가령.
“후우, 뎀지. 정신이 번쩍 들게 해주겠니?”
이렇게.
할아버지의 말에 푸르스름한 요정이 마법을 사용했다. 어른 팔뚝만한 여성체 요정은 물의 하급 요정인데, 할아버지의 몸 구석구석을 물로 씻기는 것도 모자라 흠뻑 젖은 몸의 수분까지 한 번에 가져갔다. 목욕과 세탁, 건조가 한 방에 끝나버린 거다.
“또 밤새우셨어요?”
“오! 번이냐?”
할아버지의 사무실엔 세 사람이 근무 중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령 둘과 사람 둘. 그리고 홉고블린 한 마리였다. 사무실에 상주하는 정령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외근을 나갔는지 할아버지는 혼자 계셨다. 하긴 너무 이른 아침이니 아직 출근 전일 수도 있겠다.
“오지 말래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번을 번쩍 안아들었다. 고된 업무에 치이기만 하다 이렇게 손자 얼굴 잠깐 보면 모든 피로가 가시는 기분이다. 요정 뎀지가 피로까지 씻겨주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식사는요? 하셨어요?”
“아까 간단히 먹었다.”
귤이라도 더 있으면 좋겠지만, 두 개가 전부였고 다 소모했다. 할아버지에게 줄 것은 다른 하나밖에 없다.
“계속하려는 게냐?”
할아버지는 번이 내미는 편지봉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식이 부모를 보는 것이 무에 어렵겠냐만 그건 일반적인 가족일 때의 얘기다. 번의 아비는 황제다. 그를 만나기 위해 목 빼고 기다리는 사람은 여기 람보르에도 한가득이었다.
“전해지긴 했을까요?”
“그건 확실하단다. 내, 따로 확인까지 했어.”
“예..”
할아버지는 편지의 내용을 모른다. 봉투에 촛농으로 표식을 달아놔 슬쩍 펴보면 티가 난다. 물론 5살짜리 꼬마의 편지를 그렇게까지 하진 않겠지만.
“앉거라.”
번은 할아버지가 주는 의자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릴없는 아이가 심심해서 놀잇감을 찾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의 머릿속은 핑핑 돌아가고 있었다.
‘이달 사형수 명단이야. 역시 할아버지는 법조계에 있는 것 같아.’
람보르엔 범상치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망한 왕국의 왕족이었다고 해도 과거엔 한 국가를 이끌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경험과 지혜가 어디 갈까? 이런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있으니, 시너지도 생기고 서로 의지도 하며 경우에 따라선 경쟁도 했다. 당연히 그럴수록 시너지는 높아지고, 이런 걸 겪을 때마다 아버지가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내 의자에서 내려오는 번.
“가려고?”
“예, 너무 오래 비우면 어머니가 걱정하세요.”
“그래. 내 안부도 전해주렴.”
“예! 또 밤새우셨다고 이를 거에요!”
“예끼! 이놈!”
아쉬운 듯 허허허! 웃으며 손을 흔드는 할아버지를 뒤로하고, 번은 계단을 내려왔다.
번은 계속해서 영역을 넓혀가는 중이었다. 처음엔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낼 방법을 찾다가 이곳에 왔지만, 이젠 여기 람보르도 자신에게 큰 힘이 되어주리라는 것을 느꼈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가 하기 나름이겠지만.
‘안전장치는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람보르를 나서며 그는 돌아서서 물끄러미 건물을 보았다.
언젠간 이곳의 모든 지식을 가지리라. 그 전에 사람부터. 언제나 죽음은 타살他殺로 시작되고, 끝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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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이 지났다.
황제는 책상에 앉아 뭔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특별히 여유가 있거나 해서 이러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우연이랄까? 그의 결재를 바라는 수많은 서류가 주변에 가득했지만, 이것이 눈에 띄었다.
9통의 편지. 모두 같은 봉투에 같은 촛농이 찍혀 있었다.
“허..”
그는 하나하나 펼쳐볼 때마다 혀를 찼다.
“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