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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5화 (5/177)

# 미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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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은 거대했다. 정확히는 몰라도 중세 영국이 대영제국으로 불리며 가장 잘나갔을 때보다도 규모 면에선 훨씬 클 것이다. 황궁엔 22명의 황비가 있었지만, 다들 황궁 곳곳에 흩어져 있어 북적인다는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평소엔 한산하다는 기분까지 든다.

“2황비의 손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황비들은 삼삼오오 모여 서로 차도 마시고, 애들 커가는 얘기도 하는 사교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번의 어머니는 거기에 끼지 못했다. 본래 성격도 그러했고, 망했더라도 공주였던 신분과 아름다운 미모는 황비들의 시샘을 낳게 했다. 결론적으로 알게 모르게 왕따를 당하는 중이랄까? 그렇게 황비들은 번의 어머니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살았었지만, 이젠 좀 달라졌다. 번이 태어나며 분위기가 묘해진 것이다.

“이대론 안 돼.”

지난 시간, 번은 황궁의 권력구도를 파악하려 애썼다. 아버지가 대부분의 시간을 전장에 나가 있으니 실질적인 권력은 여자들을 중심으로 나왔다. 그 중 1황비와 2황비, 7황비의 영향력이 가장 컸는데, 번에게 수작을 부리는 시녀의 주인이 저 안에 있을 것이다.

“맞서기엔 내가 너무 어려.”

그때가 언제였던가? 70번? 75번쯤? 무한 반복되는 죽음 앞에 그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어떻게 하면 이번 삶을 효율적으로 살 수 있을까? 라는. 이제 죽는 것도 지겹다! 안전한 곳에서 편하게 한번 살아보고 싶다!라며 머릴 굴릴 수 있었던건, 그나마 벼룩이나 토끼 같은 게 아닌, 좀비로 태어났기 가능했으리라.

까악! 까악!

널브러진 여인의 시체에서 까마귀들이 날아올랐다. 썩어 문드러지는 어머니의 자궁을 뚫고 나와 세상에 나왔을 때 그는, 처음으로 꿈이란 걸 가졌다.

‘됐어! 강해질 수 있어!’

그는 진심으로 기뻤다. 그간 모은 능력과 특성을 개발하면 충분히 홀로 독립적으로 먹고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더 열심히 주변을 기어 다니며 매일매일 생각하고, 플랜을 세웠다. 뭐부터 익히지? 나는 어떻게, 어떤 식으로 강해져야 하지? 하며. 눈도 보이지 않고 귀도 먹먹했지만, 지렁이의 특성 「흙 파먹기」가 있어 식량은 문제없었다. 식감과 맛은 거지 같아도 바닥을 기며 흙을 퍼먹으면 배는 곪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24시간은 길었다. 기어 다니며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여유가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점차 미래가 장밋빛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극심한 좌절감에 작은 몸을 바들바들 떨어댔다.

‘몸이.. 자라지 않아.’

그랬다. 좀비는 늙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성장하지도 않았다. 설 수도 없는 짧은 다리와 불룩한 배. 이등신 몸뚱이에 쓸모없이 거대한 머리는, 어느날 근처를 지나가는 성기사의 망치에 너무도 무력하게 박살 나버렸다.

-별 잡것들이 다 돌아다니는군. 확실히 음험한 곳이로다! 여봐라! 주변을 싹 불 질러버려라! 정화를 시작한다! 흑마법사가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니 경계를 확실히 하라!

오른쪽 팔뚝에 화상처럼 상처가 있는 성기사를 기억해두며 그는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땐 허무하기만 했는데, 이렇게 돌이켜보니 마냥 쓸모없는 시간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적어도 많은 생각은 해뒀었으니까. 쓸만한 능력도 하나 얻었고.

「빨리 먹기: 음식을 많이, 빠르게 먹을 수 있다.」

“강해져야 해.”

회상을 마친 그는, 다시금 다짐했다. 이번 생, 반드시 살아남으리라!

하지만 그조차 만만치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곳의 기사들이나 전사들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까딱하면 바로 골로 가겠다. 괜히 아버지가 철鐵의 황제로 불리는 게 아니었다. 경제보다는 전쟁을, 민심보다는 정복을 통한 지배를 우선시했다. 이러다 보니 문신들은 기가 죽고, 무신들이 활개를 쳤다. 지난 15년간 황국의 모든 남자들은 오직 강해지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고, 그 결과 웬만해선 명함도 내밀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왔다.

“어설프게는 안돼.”

아버지에겐 참으로 흐뭇한 일이겠지만, 번에게는 최악의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스킬과 특성이 많아도 그게 일정 수준 이상 올라가지 않으면 그의 뒤통수를 노리는 칼날에 대항하기 어려울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지금 5살이다. 이 나이엔 무슨 짓을 해도 기사를 이길 수 없다.

특히 여긴 황궁이지만, 중세 프랑스나 영국의 그런 고상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떠올리면 아주 곤란하다. 오히려 칭기즈칸 시대의 몽골이나 스파르타!를 외치던 고대 전사들의 야만적이고 마초적인 성향이 강했다.

‘몸을 방어할 수 있는 내성을 위주로 숙련하면서 비장의 한수를..’

그는 습관적으로 손가락 하나를 펴서 입으로 집어넣었다.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침샘에서 묘한 것이 만들어졌다. 희고 걸쭉하게 늘어나는 침. 마치 모차렐라 치즈처럼 생성되는 이건 거미줄이었다. 그래, 거미줄. 하지만 특별한 것 같은 이 거미줄조차 안타깝게도 공격기론 부족할 듯 싶다.

‘뭐가 좋을까?’

공격 수단이 필요하다. 결정적인 순간에 내 몸을 지킬 수 있는 공격용으로.  거미에 물렸다고 초인처럼 변하는 그런 거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멋지게 손목에서 거미줄 쫙쫙 뽑아내면서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이렇다.

“으음..”

그는 다시 거미줄을 입에 넣고, 껌처럼 씹었다. 뭐가 있을까? 뭐가.. 다시 고민이 이어지려고 할 때, 머리를 부르르 털어버리는 번.

'생각은 나중에.'

지금은 우선적인 일이 있었다.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에 종이와 펜을 올린다. 아직 잉크를 묻혀 사용해야 하는 구식이지만, 조선 시대처럼 붓글씨를 써야 하는 수준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보자.”

아버지에겐 많은 자식이 있었다. 그보다 더 많은 아내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보름이란 시간 동안 그의 관심을 끌려면 확실한 것이 필요했고, 오래전 기억을 더듬은 결과 쓸만한 것을 하나 발견했다. 언젠가 그가 쥐로 태어났을 때 보고 들었던 일. 아닐 수도 있지만, 맞을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그들의 대화가 전부 아버지를 말하고 있었으니까.

「고렌디 협곡에서라면 확실히 그의 군대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어떻게 말이오? 솔직히 우리 전력으론 어렵지 않소? 전투에 능한 자들이 없고, 용맹한 전사의 수도 1만이 안 되는데, 어중이떠중이 모은다고 철의 군대를 상대할 수 있을까?」

「어중이떠중이론 힘들겠지요. 하지만 협곡의 이점을 살려 절대 피하지 못할 함정을 준비한다면 그들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쥐를 잡겠다는 사내들의 손길을 피해 번은 도망치면서도 계속 귀를 쫑긋했다.

「대비해서 나쁠 건 없겠지. 좋소. 그건 경이 책임지고 맡아보시오.」

「안심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협곡으로 온다면 그곳이 무덤이 될 것입니다!」

번은 이마를 찌푸리며 최대한 자세하게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그의 특기는 무한 환생 말고도 바로 이 기억력에 있었다. 몇 번째에 뭘로 태어나, 며칠을 살다 죽었는지까지는 모르지만, 어떤 장면이 사진처럼 머리에 박히면 좀처럼 그걸 잊긴 힘들었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씁쓸한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그는 펜을 들었다.

운이 좋았으면 이런 상황으로 내몰리진 않았겠지.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인간으로 태어난 게 어딘가! 그것도 황제의 아들로 말이다. 이등신 좀비로 태어난 것보단 훨씬 대박 아닌가?

『아버지. 소자 번이옵니다.』

5살짜리의 글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유려한 필체가 종이에 새겨진다. 지난 5년간 무엇 하나 소홀히 하지 않은 그였다. 삶에 대한 의지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고, 1분 1초도 허투루 쓰지 않았으니까.

‘이능이나 짐작 따위로 여기게 하면 안 되겠지. 팩트로만 간다.’

『다시 출정하신다는 말씀에 소자,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무적의, 무패의 철의 군대를 믿사오나 왜 이리도 심란한지 연유를 알 수 없어 마음을 달래고자 현자의 서를 읽는 와중에 ‘지리’ 편을 보며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어 펜을 잡사옵니다. 만일 고렌디 협곡을 향하신다면..』

미끼는 준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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