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보다 어렵다. #
‘기특한 놈이로다.’
아버지는 아들의 강단이 마음에 들었다. 아이답지 않은 어른스러움도 좋다.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았을 터이니 예법이나 행동거지는 흉내 낼 수 있어도 저런 말투와 눈빛은 타고나야 하는 것일 터. 내 핏줄이 똘똘하게 자라고 있는데, 그걸 싫어할 아비가 어디 있겠는가?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무슨 일인지 상세히 말해보라.”
황제의 말에 황비들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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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자가 베티남을 점령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아시오? 다음은 어디겠소? 우리요! 우리! 우리가 그 간악무도한 자와 국경을 맞대야 한다는 말이오! 철鐵의 군대와!』
『지나친 억측입니다. 그는 지난 15년을 전쟁만 했습니다. 그가 계속 승리하긴 했지만, 가혹한 징병으로 백성은 굶주리고 땅은 황폐해졌다 들었습니다. 나라에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다지요? 그래서 어디 제대로 굴러가겠습니까? 그걸 복구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베티남을 끝으로 당분간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황국이 되고, 넓은 영토를 얻으면 뭘 하겠습니까? 그걸 유지할 힘이 없으면 다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영리한 자이니 더는 도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경의 짐작이 틀리면? 그가 베티남을 넘어 바로 우리에게 진격하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거요!』
『그건 이미 생각해두었습니다. 만일 그가 악수를 둔다면 그자는 고렌디 협곡이 무덤이 될 것입니다.』
『좋은 수가 있소? 이익-! 쥐새끼가 어딜 감히 식탁까지 올라와? 이봐! 다 잡아 죽여! 어서!』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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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6년 만에 돌아온 황제는 그 자체만으로도 황궁을 들썩이게 했다. 그의 발걸음 하나에도 눈길 하나에도 많은 것들이 바뀌고 설렌다. 특히 그의 여자들은 더욱 그러했으니.. 보름 후, 다시 출정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22명의 아내는 노심초사했다.
어떻게든 황제와의 하룻밤을 보내 새 생명을 잉태해야 힘이 생길 것이고, 만약 그러지 못하면 또다시 기약 없는 독수공방을 하며 떨어진 자존감에 몸서리칠 것이 분명했다. 여자는 스물둘. 그러나 허락된 밤은 그보다 적었다.
궁녀들은 서로 내기를 했다. 첫날 밤, 폐하께서 어느 황비의 침소로 들어가실까? 황비가 22명이나 되니 아무나 찍는다고 해도 맞추긴 힘든 확률이었지만 그분께선 모두가 생각하는 것관 전혀 다른 곳으로 향하셨다.
“아주 잘 키웠더군.”
넓은 침대에 남녀가 엉켜있었다.
한차례 거친 열풍이 불어닥쳤던 여파로 이불은 어지럽게 헝클어져 있었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여인은 오늘 최고로 행복했다.
“폐하를 닮아서 영민한 것이지요.”
남편의 어깨에 기대며 조곤조곤 말하는 그녀의 말투에 황제는 묘하게 웃었다. 본래 이런 여자였던가? 모르겠다. 그녀와의 잠자리는 7년 전쯤 클리오네 왕국을 점령한 직후 단 한 번이 전부였으니까.
망해버린 왕국의 공주. 그때 참수당하지 않은 것만 해도 은혜다.
“이리도 입에 발린 말을 잘하는 줄은 몰랐는데? 녀석은 당신을 닮았어. 아까 듣지 않았나? 대륙제일창이라니? 허허허! 웃음을 참기 힘들더군!”
“제 입엔 단 한 번도 달콤한 것이 물린 적은 없답니다. 쓰디쓴 사실만 말씀드릴 뿐이지요.”
현명한 여자는 언제나 남자를 웃게 한다. 황제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쓸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간 힘들었소?”
“기쁨이 더 컸사옵니다.”
왜 힘들지 않았을까? 황제도 안다. 진정한 용담호혈龙潭虎穴은 전장이 아닌 바로 이곳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방관했다. 사자 새끼는 그렇게 자라야 하니까.
강하기만 하다고 능사가 아니다. 똑똑하여 정치를 잘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론 한계가 있다. 진정한 본능을 깨워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아 내 것을 지킬 수 있는! 불굴의 생존력 말이다.
그런데 이 여인은 기뻤다 한다. 아마도 그 중심엔 그 녀석이 있음에 그럴테지. 아주 잠깐 침묵이 흐리고, 남편의 넓은 가슴을 손으로 쓰다듬던 그녀는 입술을 오물거리다 용기를 내어 말했다.
“다시 생각해주실 수는 없으신가요?”
“녀석의 편을 드는 게요?”
의외였다. 자식을 사지로 밀어 넣으려는 여자론 보이지 않았으니까.
“저는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은 다 해주고 싶어요.”
이것이 어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그녀의 삶은 오직 번에게 맞춰져 있었다.
“불가하오.”
황제가 그리 말하자, 그녀는 더 묻지 않는다. 그러자 먼저 입을 여는 그.
“녀석이 미워서가 아니오. 당신을 배척하려는 것도 아니고.”
평소라면 이유 따윈 설명하지 않았을 황제지만, 오늘은 마음이 무르다. 집에 돌아온 날이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만족스러웠던 하루였으니까. 그녀가 남편을 그렁그렁한 눈동자로 올려보았다. 그런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황제.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기게 되면 시기하는 자와 질투하는 자가 생길 거요. 그건 녀석에게 훗날 좋지 않은 추문으로 따라다니겠지. 나는 자식에게 관대하지 않은 아비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지키려 하오.”
“공평하게. 말씀이시지요?”
“기회를 만들어 잡는 것은 알아서 할 일이지만, 누군 돌봐주고 누군 내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오. 생각해보시오. 그 아이가 따라나서면 다른 아이들도 나와 가까이 있으려 하지 않겠소? 전쟁 경험도 나쁘진 않지만, 무릇 바른 군주가 되려면 어릴 때 학문을 익혀야 하오.”
여인은 웃었다. 슬퍼 보이기도 하고, 기뻐 보이기도 한 그 표정에 황제는 마주 웃으며 그녀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었다.
아마도 두 사람의 오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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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어엿한 5살이 되어 자신의 방을 가지게 된 번. 의자에 앉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불가라..”
야심 차게 준비한 계획이 빠개졌다. 아버지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긴 그랬다면 에비뉴를 이만큼 성장시키지도 못했으리라.
“지금이 아주 중요한 기로인 것만은 확실한데.”
그는 머릿속 기억과 지식을 총동원해 일종의 점을 치고 있었다.
적당히 살다 죽을 생각은 없다. 사람들은 모른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며 축복받은 것인지.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다시 지렁이가 되거나 구더기가 되어 물고기 밥 신세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흐음.”
일단 내가 가진 것을 정확하게 판단해보자. 그리 생각한 번은 중얼거렸다.
「고통 내성, 독 내성, 한기 내성, 출혈 내성..」
마녀의 솥단지에서 얻은 내성과 그간 5년간 다사다난한 일을 겪으며 쌓은 것들. 그리고 그 이전의 삶들에서 하나씩 축적한 것들이 그를 그나마 살게 했다. 아마 어느 하나라도 빠져 있었다면, 이미 저승행 기차를 탔을 거다.
그나마 이 모든 것이 우연처럼 맞아 떨어지며 모든 위험을 이겨냈고, 내성은 더욱 강해졌다. 이젠 독이 잔뜩 든 컵을 원샷 해도 약간의 어지럼증을 느낄 뿐.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나? 물론 후에라도 독을 지시한 놈들에겐 어떻게든 갚아줄 생각이다.
「거미줄 생성, 독 배출, 신체 늘이기, 흡수 소화..」
그의 특성들을 하나하나 되짚고 생각해본다.
"부족해.."
번을 이번 모험을 하게 한 원동력. 그것은 바로, 그가 많은 스킬과 특성을 보유만 하고 있지, 익힐 시간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아이언맨처럼 가슴에 원자로 하나 달았다고 빔을 팡팡 써댈 수 있는 게 아니다. 무엇이든 숙련이 필요했고, 훈련할 장소와 시간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지렁이로 태어나서 뭘 해보겠나? 거미로 태어나서 수련은 개뿔. 드디어 인간으로 환생했지만, 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여긴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황궁이 아니던가.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여긴 위험해.”
냉정하게 판단한 결과는 어제와 같았다. 아직 내 몸을 지킬 힘이 없다. 누가 지켜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머니는 망한 왕국의 공주이며 할아버지는 전직 왕이었지만, 지금은 말단 공무원이다. 고작 이 정도 배경으로 아직도 멀쩡히 살아있는 번이 신기한 지경이었다.
“가장 안전한 곳이라 한다면..”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전승의 군대. 철의 황제라 이름 드높은 아버지의 옆뿐이었다.
“어쩐다..”
보름. 그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