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와 아들 #
아버지는 강한 사내였다.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삼국지의 여포가 유비의 포지션에 있다고 생각하면 수월하다.
그는 문무文武에 능하다, 정평이 난 왕국이었던 에비뉴를 황국으로 올려놓았다. 또한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제국으로 발돋움하려고 한순간도 쉬지 않고 전쟁을 벌였다. 그의 눈빛을 처음 보았을 때, 아마 몽골의 칭기즈칸이 딱 이런 기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하는 짓도 비슷하다. 아버지는 씨를 뿌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니까.
“가까이 오라.”
아버지는 우람했다. 그의 팔뚝 하나가 번의 몸통만 했다.
번도 5살이라고 여길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하다. 어려서부터 예법을 배우고 자란 황자라 그럴 수도 있다지만, 그것으론 설명할 수 없는 여유가 그에겐 있었다.
“소자,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아버지라 불러도 좋다.”
“그리하겠습니다.”
번의 말에 저쪽에 다소곳이 선 엄마의 미소가 짙어졌다. 반대로 불편한 눈빛들이 늘어났다.
-저 아이가 그 열두 번째 아이라지?
-똘똘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던걸?
-흥, 그래 봐야 애지.
가을 녘 스산한 바람처럼 중얼거리는 소리들. 주로 황비들이 질시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들과 관계가 있는 사내들도 탐탁지 않은 얼굴로 번을 주시했다.
“잘 자라주었구나.”
1미터쯤 거리를 두고, 번이 공손하게 섰다. 태사의에 앉은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물끄러미 보았다.
“올해 몇이라고?”
“다섯 살이옵니다.”
“다섯이라..”
자신보단 어미를 쏙 빼닮은 아들을 보며 그는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남성적이라기보단 유약해 보이는 얼굴형. ‘번’이라는 이름은 대륙의 99신 중에 자비와 은혜를 상징하는 ‘번’신을 뜻하는 이름인데, 전사답진 못해도 이름과 잘 어울리긴 했다. 태어나는 순서대로 부여되는 이름은 불교의 십이지신十二支神이라 생각하면 편하다. 다음 형제가 태어나면 바다를 칭하는 샨이라 이름 붙을 거다.
“더 가까이 오라.”
“예.”
이제 둘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가 되었다. 아버지는 두툼한 손을 들어 번의 머리를 쓸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눈매와 턱선이 닮았다.
“그래, 요즘 뭘 하며 지내고 있느냐?”
“현자의 서를 읽고, 남는 시간 틈틈이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허! 현자의 서라?”
88권으로 이뤄진 현자의 서는 지난 3천 년간 대륙에 축적된 모든 지식의 집합이라 할 수 있었다. 지리, 역사, 신神, 건축, 미술, 예술, 경제, 사회, 수학, 과학, 언어등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었는데, 우리가 사는 세상이 넓은 판으로 되어 있다느니, 신을 믿지 않으면 마계로 떨어진다느니 하는 편협한 것들도 있었지만, 과학이 아닌 마법과 자연에 대해선 2000년대 대한민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지식이 망라되어 있었다.
“어디까지 읽었느냐?”
“69권이옵니다.”
“허! 69권이라?”
아버지는 진심으로 놀랐는지 혀를 차며 감탄했다.
“다음 권은 어려울 것이다. 마법의 기초와 검술이론이 등장하기 시작할 거니까. 막히는 곳이 있다면 언제든 도움을 청하거라. 내 일러두겠다.”
말을 마친 아버지는 번의 묘한 표정을 보며 갸웃했다.
“왜 웃는 것이냐?”
“70권이라면 4번 읽었사옵니다.”
“뭐라?”
-저 녀석이 뭐라는 거지?
-거짓말이야!
-그게 말이 돼?
황비들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현자의 서는 순서대로 읽어야 했다. 마치 초중고의 교과서처럼 뒤로 갈수록 더 어려운 이론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걸 말하려던 아버지는 곧 입을 다물고, 으음. 하는 신음을 흘렸다. 아들의 표정을 읽은 것이다.
“4번 끝까지 읽고, 다시 69권째라는 말이더냐?”
“그러하옵니다.”
“허..! 74권은 무엇을 가르치더냐.”
“인간에게 유용한 3천2백 가지 약초와 8백 종의 독초에 대해 배웠습니다.”
“79권은?”
“정령의 종류와 쓰임, 인간과의 상호작용에 대해 배웠습니다.”
-저, 정말 다 읽었나 본데?
-그럴 리 없어. 카이사르도 이제 43권째를 보고 있는데!
황비들의 눈이 불신으로 개구리처럼 동그랗게 커졌다.
아버지는 자신의 짐작이 맞아떨어지자, 아주 유쾌하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이놈, 물건이로다! 물건이야!”
보통 현자의 서는 8세 무렵부터 시작해서 12세 정도가 되어야 기본적인 이해가 가능했다. 물론 그렇다고 책의 내용을 전부 숙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대륙 제일의 천재들이 일생을 걸고 만들고, 보완된 보물이니까.
물론 이해하지 못하고 겉핥기만 했다 해도 이제 5살인 번이 그만큼 노력했다는 증거다. 보통 이맘때 아이들은 그 정도의 집중력은 없었으니까.
“노력한 자에겐 보상이 있어야 하는 법이겠지!”
껄껄 웃던 그가 번에게 물었다.
“원하는 게 있느냐? 있다면 말해보아라.”
번은 공손하지만, 비굴하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실례가 되지 않으신다면 언제 출정하시는지 알 수 있겠사옵니까?”
이놈 봐라? 아버지의 표정이 묘하다.
“그건 왜 묻느냐?”
“청할 것이 있사옵니다.”
“이미 말해보라 하였다.”
번은 아버지의 옆을 보았다.
두 사람이 태사의 뒤쪽에 서서 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번이 아버지를 떠올리며 유비 포지션에 있는 여포라고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있는 공신 둘. 좌청룡 우백호라 해도 과언이 아닌 무장 스캇과 딘딘이다.
“창을 배우고 싶습니다.”
번의 당돌한 말에 아버지가 뒤를 돌아보았다. 마침 딘딘도 아버지를 보고 있었다. 피식 웃으며 머리를 흔드는 그를 보며 아버지는 짓궂게 웃으며 답해버린다.
“그렇다는데?”
딘딘은 아버지의 둘도 없는 친우이며 전우다. 서로의 등을 맡길 수 있는 다섯 손가락 중의 하나이자, 아내보다 가까운 사이였다. 그래서 서로를 잘 안다. 함께 한 사선의 시간 만큼이나 공유한 심리적 공감도 늘어갔으니까.
잠시 싸늘한 정적이 장내를 감돌자, 딘딘이 어쩔 수 없단 듯 답을 낸다.
“너무 어립니다.”
“나 또한 네 살 때 검을 잡았었다.”
‘폐하는 괴물이니까요.’
라는 말을 하려다 주변 눈치에 입을 다무는 딘딘. 아버지는 이미 알아챘다는 듯 빙긋하곤, 다시 번을 보고 물었다.
“왜 창이지?”
번은 차분하게 답한다.
“제 팔다리가 짧기 때문입니다.”
번의 대답에 딘딘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병기가 가진 이점과 스스로의 한계를 뚜렷하게 안다는 뜻이다. 저 어린 것이 말이다.
“그것이 다인가?”
황국에서 왕자들은 그리 높은 신분을 가지지 못한다. 후계자로 지목되면 모를까 그전엔 타국에 볼모로 보내질 수도 있고, 언제 비명횡사할지도 모른다. 황제는 강자존과 약육강식 자생의 원칙을 자식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했다.
-살아남아라. 그래서 영광을 직접 네 손으로 움켜쥐어라. 내가 그리했으니.
물론 그렇다고 황자들끼리 서로 죽이겠다고 대놓고 물어뜯으라는 것은 아니었다. 법도가 있고, 보는 눈이 있었으니까.
“배울 수 있을 때 배워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륙제일창槍께 수학할 수 있다면 그 어떤 보물보다 값질 것이옵니다.”
황자는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강해져야 한다. 그 강함엔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겠지만, 에비뉴에서 가장 높게 보는 것은 무력이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며 철의 황국이란 별명이 붙은 이유다.
“······.”
'대륙제일창이라니. 어린놈이 벌써부터 정치질이던가.'
입에 발린 소리라 해도 듣기 싫은 것은 아니었기에 딘딘은 입맛을 다셨다. 그걸 본 아버지는 딘딘의 표정이 재미있는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곤 이내 웃음기를 지우고, 번을 보며 결론을 내린다.
“네가 원하는 바는 잘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출정은 다음 달 초다. 겨울이 오기 전에 국경까지 가야 하니까.”
6년이나 전쟁터에 있다가 이제 막 돌아왔는데, 고작 보름 후에 또 나간단다.
“······!”
“······!”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는지 주변에 있던 몇몇의 안색이 굳어졌다.
아버지는 이 시기 동안 열심히 해야 할 일을 할 거다. 주로 밤에. 낮엔 그간 미뤄왔던 국정을 볼 것이니 어쩌면 번은 오늘이 그를 마주하는 마지막이 될지도 몰랐다.
번은 옆을 힐끔 보았다.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잔뜩이었다. 다른 황자들, 공주들, 어머니들, 신하들. 일부는 동료이며 대부분은 그의 적敵이다.
“나 또한 딘딘이 너에게 배움을 준다면 기쁠 것이나, 시간이 없다. 다른 것을 말해보아라.”
번은 아버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무릎을 꿇었다.
“······!”
“······?”
그러더니 허리를 숙여 두 손을 모아 이마에 댄 뒤 머리를 바닥에 붙였다. 한국에선 명절 때나 하는 동작이었지만, 여기서는 신께 기도할 때만 하는 예법이었다. 그만큼의 간절함과 완곡함이 지금 번에게서 느껴졌다.
“소자가 생각하기엔, 시간이 없지 않사옵니다.”
“보름간 무얼 배우겠다는 것이냐? 그 정도 창술은 현자의 서에도 기술되어 있다.”
아버지는 거기까지 말하더니 움찔했다.
설마? 이놈? 하는 표정을 지을 때, 번이 먼저 말했다.
“장소가 무엇이 중요하겠사옵니까. 사내에게 의지가 있다면 못할 것은 없다고 배웠사옵니다.”
“전장에 가겠다는 것이냐?”
다소 황당함까지 묻어있는 아버지의 목소리. 그러나 번은 얼굴을 들고, 웃었다. 그러면서 말한다.
“이미 제 삶은 전장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