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스 STFT 챔피언쉽 16강
유니버스 STFT 챔피언쉽 16강
때때로 전략은 단순할수록 그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100% 적들은 1순위로 나를 견제할 것이다. 견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했을 테니까.
나는 그 점을 이용할 생각이다. 물론 100%라는 건 없다. 99.9%는 있어도 100%는 없다. STFT에서 100% 이기는 조합이 존재하지 않듯이.
지금부터 내가 사용할 전략은 단순명쾌하다.
자폭.
나는 적 플레이어 두 명을 끌어안고 자폭할 생각이다.
어디서? 바로 첫 번째 죽음의 던전에서.
물론 그러기 전에 사전작업을 해놓아야 한다. 시작과 동시에 ‘수수께끼 구슬’을 선택하고, 4연패를 해서 순위를 8위로 떨어뜨려 놓으면, 적들은 내가 어떤 짓을 꾸밀지 모른다는 의심에서라도 따라올 수밖에 없다.
그 의심에 기대는 별것 아닌 전략이지만, 필시 게임의 승패를 좌우할 만큼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이상현! 오늘만을 기다려왔다!!”
나에게 선전포고를 날린 플레이어는 크로노스였다. 나는 크로노스를 쳐다보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와 호박색 비늘은 우리가 잘 아는 드래곤과 흡사했다. 다만, 크기가 3미터로 작고 날개가 없다는 점에서 드래곤이 아니라 리자드맨에 가까웠다.
“이번에는 반드시 널 쓰러뜨려 주마.”
목소리에는 나를 향한 적개심과 함께 감출 수 없는 승부욕이 엿보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꺾겠다고 선언한 ‘무토’만큼이나 강렬해서 솔직히 마음에 들었다.
“말로만?”
나는 전략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도발을 걸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크로노스가 도발에 걸려들지 않았다.
“실력으로.”
“기대하지.”
대화는 이것으로 일단락되었다.
크로노스는 팔짱을 끼고 나를 말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기선제압을 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함인지는 몰라도 대단히 침착해 보였다.
나는 내 자리로 돌아가 게임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GM이 나타났다.
『참으로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유니버스 STFT 챔피언쉽 16강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띠링!
[유니버스 STFT 챔피언쉽 16강(A조)]
[지구: 이상현(100)│0승, 0패]
[잭 로어(100)│0승, 0패]
[신하영(100)│0승, 0패]
[엘리자베스(100)│0승, 0패]
[라프탈: 크로노스(100)│0승, 0패]
[아프렌(100)│0승, 0패]
[라프(100)│0승, 0패]
[엘렌(100)│0승, 0패]
게임이 시작되었다.
지구 대 라프탈의 운명을 건 게임이.
“괜찮을까요?”
불안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다른 사람들의 눈동자에서도 불안감이 엿보았다.
괜찮은 작전이라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그 작전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이상현이라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낀 것이다.
왜냐하면 이상현은 최고의 플레이어니까.
이상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목소리에는 확신이 있었다.
“매우 효과적일 겁니다. 무엇보다 다른 서버도 그 모습을 보게 될 테니, 차후를 대비해서도 필요한 일입니다.”
“으음.”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그 이유는 다른 서버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최고 전력인 이상현을 미끼로 쓴다고? 다른 플레이어도 아닌 이상현을? 그게 말이 돼?
그것 하나만으로도 다른 서버의 플레이어들은 의심병이 도질 것이다. 그래서 이상현은 강력하게 주장했다.
“계속 강조해왔던 사실이지만, 저 혼자 잘해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모두가 힘을 합치지 못한다면 이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STFT는 팀 게임이니까요.”
팀 게임!
이상현이 그토록 강조해왔던 팀 게임.
그 말에 사람들은 불안감을 지웠다.
“연습한 대로만 한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잭 로어씨도 엄청난 실력자니까요.”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작전이 시작되었다.
일명 발할라 작전이.
나는 계획대로 수수께끼 구슬을 선택했다.
[수수께끼 구슬(??)을 선택했습니다.]
[10초가 모두 지났습니다. 다른 플레이어가 수수께끼 구슬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수수께끼 구슬을 획득했습니다.]
라프탈에서 견제가 들어올 줄 알았는데, 다행스럽게도 견제가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수수께끼 구슬을 견제하는 건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다던가.
[수수께끼 구슬이 부스스 허무한 연기를 내뿜으며 사라집니다. 아무것도 획득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수수께끼 구슬에서 최고급 아이템이 나왔다면, 하다못해 3골드·3성의 챔피언이라도 나왔다면, 나는 즉시 작전을 바꾸었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것에 따른 예비 작전도 존재한다. 수수께끼 구슬에서 잘 떴는데 죽을 이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으니, 원래 계획대로 첫 번째 죽음의 던전에서 자폭할 것이다.
[10, 9, 8···. 2, 1]
[우주 전장으로 이동합니다.]
‘무슨 생각이냐, 이상현?’
크로노스는 수수께끼 구슬이라는, 운에만 의존하는 쓰레기 아이템을 선택한 이상현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어째서 수수께끼 구슬을 선택했단 말인가? 초반에 가장 괜찮은 아이템인 트롤의 피가 아닌 수수께끼 구슬을?
크로노스는 그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혹시 운을 시험해볼 생각인가? 아니면 수수께끼 구슬에도 무언가가 있는 건가?’
가장 합리적인 의심은 수수께끼 구슬에 ‘패턴’이 있다는 거였다. 특정한 아이템이 나오는 패턴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색깔과 모양이 전부 다르다는 건 패턴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니까.’
완전히 헛다리를 짚는 격이었지만 상대가 이상현이라서 왠지 모르게 그럴듯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승부는 위험하다!’
크로노스는 이상현이 어떤 확신을 지니고 수수께끼 구슬을 선택했다고 판단했다.
‘제기랄! 이럴 줄 알았으면 견제하는 건데! 수수께끼 구슬이라고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어!!’
이상현에게는 고마운 착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착각은 이상현이 16강(1-4)에서 고블린(★) 한 마리만 보여줌으로써 더더욱 굳건해졌다.
‘죽음의 방인가!!’
운이 좋게도 시작 챔피언이 고블린이었다. STFT 최악의 챔피언.
나는 고블린을 전진 배치한 다음 그것으로 모든 것을 끝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없다. 남은 것은 미끼에 물고기가 달려들기만을 기다리는 것뿐.
혹시 작전이 실패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과 나 혼자만 죽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치밀었지만, 나는 동료들을 믿었다.
잭 로어와 엘리자베스, 그리고 신하영이라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키에엑···!」
나는 16강(1-1)과 (1-2), (1-3), (1-4)에서 패배했다. 고블린은 작전을 훌륭하게 수행해 주었다.
그리고 잭 로어와 엘리자베스와 신하영은 계획대로 4연승을 거두고 1위를 차지했다.
[유니버스 STFT 챔피언쉽 16강(A조)]
[1위: 잭 로어(100)│4승, 0패]
[1위: 신하영(100)│4승, 0패]
[1위: 엘리자베스(100)│4승, 0패]
[5위: 아프렌(85)│1승, 3패]
[5위: 라프(85)│1승, 3패]
[6위: 엘렌(84)│1승, 3패]
[7위: 크로노스(83)│1승, 3패]
[8위: 이상현(100)│0승, 4패]
자, 이제 마지막이다.
내 예상대로라면 다른 플레이어는 몰라도 크로노스만큼은 반드시 날 따라올 것이다. 라프탈의 1위인 크로노스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날 따라온다.
왜냐하면 크로노스는 무토와 같은 부류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방!!’
예상대로 이상현이 죽음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이상현은 수수께끼 구슬의 패턴을 알아낸 것이다.
그래서 크로노스는 자신의 차례가 되었을 때,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죽음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떤 전략인지는 모르지만, 철저히 분석해서 반격해주마!!’
크로노스는 이상현이 미끼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이상현이었기 때문이다.
서버 13279를 넘어 모든 플레이어 중에서 최고인 이상현이 미끼일 것이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크로노스는 머뭇거림이 없었고, 항상 크로노스에 눌렸던 엘렌도 따라서 죽음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번 싸움은···. 내가 이긴다!!’
무토는 이상현의 계략을 알아차렸을 때 진심으로 전율했다. 서 있는 게 두려울 정도로 화들짝 놀랐다.
“설마···. 설마!!”
무토는 아닐 거라고 여기면서도 그럴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이상현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으니까.
“이상현이···. 이상현이 미끼라니?! 너는···! 네놈은···!! 도대체 네놈은···!!”
무토의 얼굴과 심장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다. 그것은 전율을 넘어선 무언가였다.
“만약 내가 저곳에 있었다면···!!”
꿀꺽.
무토는 자신도 ‘크로노스’와 똑같은 판단을 내렸을 거라고 판단했다. 차마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소름이 끼쳤다. 자신을 희생시키면서까지 함정을 파다니.
“더 볼 것도 없어. 첫 번째 게임은···. 서버 13279의, 이상현의 승리야!! 이상현이 만들어낸 승리!!”
무토는 들끓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했다. 물론 그게 쉽지 않아서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는 몰라도 넌 실패할 거다.”
크로노스였다. 나는 가까이 다가온 크로노스를 올려다보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이미 작전이 성공했는데, 작전이 실패할 거라고 말하니 퍽 우스웠기 때문이다.
“실패할 거라고?”
“그래. 내가 널 방해하고 무너뜨릴 거니까.”
크로노스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아무래도 모의게임에서 연습을 많이 한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조금이지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안 됐지만, 이미 작전은 성공했어.”
“뭐? 뭐라고···?”
“내 역할은 여기까지야.”
나는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박장대소하고 싶다. 하지만 아직 게임 중이니 참아야겠지. 그리고 웃는 건 다 끝난 다음에 웃어도 늦지 않다. 오히려 미리 웃어두면 나중에 후회할 가능성이 생기므로 조심해야 한다.
“지금 뭐라고···?”
“말 그대로야. 내 역할은 여기까지. 난 너희들을 안고 탈락할 거다. 바로 이곳에서.”
크로노스의 얼굴이 딱딱한 돌처럼 굳어버린 게 보였다. 힐끔힐끔 엿듣고 있던 엘렌의 얼굴도 경악으로 물들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확인사살을 가했다.
“난 처음부터 미끼였어. 너희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 넌 예상대로 미끼에 걸려들었고. 그래. 처음부터 모든 게 계획이었어. 수수께끼 구슬을 선택한 것에서부터 4연패와 우리 팀원들의 4연승까지. 모든 게 계획이었지. 넌 그 계획에 멋지게 걸려든 거고. 자, 이만 퇴장할 시간이다.”
[30초가 모두 지났습니다.]
[상대: 해골전사-카쿰(★★★★★★)]
[전투가 시작됩니다.]
뭐라고?
지금 뭐라고 그랬지?
이상현이 미끼라고?
그 이상현이?
최강의 이상현이?
“모든 게 계획이었어. 난 미끼였고.”
그 말에 크로노스는 정신이 멍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말은커녕 생각이라는 끈이 이어지지 못했다. 느슨하게 늘어나서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이상현이 미끼였다고···? 최강의 플레이어인 이상현이, 미끼 역할을 맡아서 자폭한다고? 그것도 첫 번째 죽음의 던전에서? 게임이 시작된 지 5분도 안 돼서?
“마, 말도······.”
크로노스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말을 더듬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선명하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으며, 정체를 알 수 없는 당혹스러움만이 가득했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크로노스가 절규했다. 그나마 이상현에 대한 경쟁심이 부족한 엘렌이 “다, 당장 조커 카드를 뽑아!! 조커 카드를 뽑으라고!!”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그 소리는 크로노스에게 닿지 못했다. 예상 밖의 사태에 완전히 넋이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으아악!! 이딴 걸로는 못 이긴다고!!”
“조, 조커 카드···!!”
크로노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모든 게 끝난 뒤였다.
[30초가 모두 지났습니다.]
이제는 조커 카드를 뽑고 싶어도 100골드를 들이부어도 뽑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 이럴 수가······.”
허탈하다 못해 해탈(?)해버린 크로노스와 달리 이상현의 입가에는 미소가 그윽했다.
이상현은 STFT 12년차 고인물답게 사악했다. 왜냐하면 고도의 심리전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쯧쯧쯧. 그러니까 조심했어야지. 왜 괜히 따라 들어와? 괜히 따라 들어와서 탈락하는 거잖아. 바보 같긴.”
“이, 이, 이상혀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언···!!!”
크로노스의 절규가 죽음의 방에 메아리쳤다. 이상현의 심리전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리고 세 명의 플레이어가 탈락했다.
[유니버스 STFT 챔피언쉽 16강(A조)]
[1위: 잭 로어(100)│4승, 0패]
[1위: 신하영(100)│4승, 0패]
[1위: 엘리자베스(100)│4승, 0패]
[5위: 아프렌(85)│1승, 3패]
[5위: 라프(85)│1승, 3패]
[6위: 엘렌(0)│1승, 3패]
[7위: 크로노스(0)│1승, 3패]
[8위: 이상현(0)│0승, 4패]
게임 시작 5분 만에 3명이 탈락한 일은.
예선전을 통틀어.
전대미문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