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믿기 어려운 패배 (127/170)

믿기 어려운 패배

믿기 어려운 패배

“······.”

이겼다고 생각한 게임에서, 절대 질 수 없다고 생각한 게임에서 패배한다면 어떻게 될까? 어떤 심정일까?

아크는 자신이 패배했다는 사실에 그만 얼어붙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승리의 열광으로 가득했던 심장은 싸늘하게 식어버려서 두 번 다시 뛰지 않을 듯했다.

“어···떻···게.”

목구멍에서 간신히 쥐어짠 말은 4성 드래곤의 존재했다. 영웅의 전쟁터만 해도 드래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3성도 아니고 4성이 나타나다니? 게다가 여의주라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아크는 이를 악물고 패배를 집어삼켰다. 두근두근.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차갑고 딱딱했다.

아크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 악마의 성배?!!”

아크는 뒤늦게야 깨달았다. 이상현이 악마의 성배를 선택한 이유를, 4성 드래곤이 나타난 이유를.

“이, 이럴 수가!!”

그 경악스러운 사실에 도달하자 아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더욱이 그것을 막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아크는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았다.

“···으, 으으윽!!”

부들부들. 아크의 어깨가 위태롭게 떨렸다. 불끈 쥔 주먹에서는 승리의 희열도 기쁨도 그 무엇도 남지 않았다. 남아있는 건 이길 수 있었다는 사실 뿐이다.

그래. 이길 수 있었다. 뜬금없이 악마의 성배를 선택한 이유를 알아차렸다면, 끝까지 방심하지 않았다면, 영웅의 전당에서 드래곤 하트를 선택했다면···!!

이겼을 것이다.

이상현에게 승리했을 것이다.

그런데 악마의 성배를 선택한 이유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방심했으며, 엉뚱한 것을 선택한 주제에 웃어버렸다.

···비참하고 또 비참했다.

[전투까지 10초 남았습니다.]

이제 남은 시간은 10초.

그 시간 안에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아크는 타이탄에게 장착한 제우스의 번개를 하나 빼고, 그 자리에 발키리의 날개를 장착시켰다.

체력을 가득 채워주는 발키리의 날개라면···! 설령 피해량이 감소하더라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나쁜 판단은 아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었다.

[30초가 모두 지났습니다.]

[전투가 시작됩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아크는 ‘적’을 바라보듯이.

이상현을 바라보았다.

승리는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두근두근.

푸오오오!!

용의 분노가 전장을 가로질러가 타이탄을 통째로 불태웠다. 뒤이어 하늘에서 떨어진 불덩어리가 타이탄에게 두 번째 충격을 안겨주었다.

“버···러···지···들···이!!”

타이탄의 우레가 내리쳤다. 우르르콰과과광!!

그러나 영웅 드래곤은 바스러지지 않았다. 온몸이 새까맣게 탔지만, 우레를 견뎌낸 것이다.

“쿠오오···오오!!”

“이, 이이···!!”

타이탄의 얼굴이 딱딱하고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이것이 제우스의 번개를 버리고 발키리의 날개를 선택한 대가였다.

“뿌오오오!!”

피닉스가 마법사들을 처치했다. 허약한 마법사들은 1초를 버티지 못했고, 두 번째 우레가 드래곤을 내리쳤을 때.

“살려···.”

모두 바스러졌다.

이제 남아있는 마법사는 타이탄뿐!

피닉스가 타이탄을 향해서 날아갔다. 그러고는 숨을 힘껏 들이마시더니 푸화악! 불꽃을 토해냈다.

“그···어···어어···.”

그러자 영웅 타이탄이 무릎을 꿇었다.

피닉스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날개를 활짝 펼쳤다. 황혼을 닮은 주홍빛 날개는 승리를 나타냈다.

그러나 잠시 후.

“모두 죽어라!!”

완전한 모습으로 부활한 타이탄이 우레를 내리쳤다. 우레의 대상은 피닉스였다.

“?!!”

우르르콰과과광!!

드래곤과 달리 피닉스는 단 한 방의 우레조차도 견뎌내지 못했다. 한 줌의 재로 변해서 사라졌다.

“드디어 사라졌구나!”

타이탄의 거룩한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한 줌의 재에서 피닉스가 부활했다.

“끼요오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이 피닉스를 부활시킨 것이다. 그것을 본 타이탄이 분노했다.

“감히···!!”

부활한 피닉스는 또다시 불덩이를 떨어뜨렸다.

그러나 타이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성가신 연기를 걷어내듯이, 불덩어리를 치워버리며 피닉스를 끝장냈다.

“사라져라!!”

우르르콰과과광!!

우레가 내리치고, 피닉스가 재로 변했다.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부활하지 못했다. 영원히 사라졌다.

두 번째 불바다가 타이탄의 체력을 빠르게 갉아먹었지만···. 타이탄의 우레가 모든 요정을 새까맣게 태워버렸다.

“하찮은 것들.”

불바다 속에서.

영웅 타이탄은 우뚝 서 있었다.

4성 마법사 타이탄과 4성 정령 피닉스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무조건 타이탄을 고를 것이다.

그 이유는 마법사 타이탄이 최강이기 때문이다.

STFT 최강.

물론 약점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마법사 타이탄은 전장을 지배하는 신이다. 파괴의 신.

4성 마법사 타이탄을 들고도 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런 마법사 타이탄을 상대로 승리를 거둬야 한다.

어렵지만 할 수 있다.

나는 STFT 12년차 고인물이니까.

[피닉스(★)가 합류했습니다.]

[피닉스···.]

[영웅 피닉스(★★★★)가 탄생했습니다!]

[영웅 피닉스(★★★★)]

속성: 불

직업: 요정

공격력: 792

방어력: 792

체력: 15840(+100%)

마나: 444/444

스킬: 아마겟돈

드디어 4성 피닉스를 완성했다. 체력이 15000을 넘는 피닉스를.

1초마다 15%의 체력을 회복하니 우레에 3번은 맞아야 죽는다.

3번. 시간으로는 9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만약 부활까지 한다면···. 그 시간은 엄청나게 길어질 것이다.

그리고 운에 달려 있지만.

운디네의 축복이 피닉스에게 내려진다면.

그때는 죽지 않는 불사조가 탄생한다.

진정한 의미의 불사조가.

그래.

운디네의 축복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피닉스를 축복한 적이 없는 물의 축복이 내려진다면.

그때는 마법사 타이탄을 이길 수 있다.

[30초가 모두 지났습니다.]

[최종 예선전(1-31)]

[상대: 아크(2)]

[잔여 라이프(39)]

[전투가 시작됩니다.]

가까스로 거둔 승리. 그 승리에 아크의 몸은 땀범벅이 되었다.

얼마나 많이 젖었는지 혹시 물에 빠졌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이, 이겼어! 하, 하지만···!”

아크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겼지만 이겼다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상현의 라이프는 39라이프나 남아있다. 이상현과 달리 자신은 2라이프가 전부. 한 번이라도 패배한다면 끝장이다.

“배치를 바꿔야 하나?”

여의주의 힘과 아마겟돈은 배치와는 상관없다. 게다가 시작과 동시에 마법사들이 터질 것이니···. 배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떻게 해야···.”

불안함은 아크를 뒤흔들었다. 이제 모든 것을 이상현에게 맡겨야 한다는 사실 또한 아크가 불안한 이유였다.

아직 개선의 여지가 있는 이상현과 달리 자신은 할 수 있는 걸 다 했으니까.

“조커 카드는···.”

아크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왜냐하면 조커 카드만큼은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안 돼. 조커 카드는 안 돼.”

그래서 아크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타이탄이 이겨주기만을 바라는 것 이외에는···.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다.

[30초가 모두 지났습니다.]

[전투가 시작됩니다.]

푸오오오오!

드래곤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용의 분노가 타이탄을 휩쓸었다. 그리고 몸을 속박하던 족쇄가 풀렸다.

동시에 하늘에서 불덩어리가 떨어졌다. 불덩이는 이전보다 훨씬 더 크고 강력했다.

“안···?!”

무지막지한 충격파가 전장을 뒤덮었다. 뒤이어 메케한 연기와 함께 시뻘건 불꽃이 솟구쳐 올랐다. 전장은 불바다로 변했고, 살아남은 마법사는 타이탄이 유일했다.

“이, 이이···!!”

우르르콰과과광!!

굉음과 함께 우레가 내리쳤다. 우레는 바람을 가지고 놀던 실피드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

“끼요오옷!!”

타이탄을 향해서 피닉스가 날아갔다.

“건방진!!”

푸우우! 피닉스의 타오르는 부리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와 타이탄을 공격했다. 그리고 우레가 피닉스를 내리쳤다.

불꽃과 우레! 승자는 피닉스였다.

콰과과과···.

타이탄의 거대한 몸이 모래성처럼 부서졌다.

승리를 거둔 피닉스는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활짝 펼친 날개는 승리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하찮은 돌무더기로 변한 타이탄의 몸에서 순백의 날개가 날아오르더니, 완전무결한 모습으로 부활했다.

영웅 타이탄의 거룩한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멸하라!!”

우르르르콰과과광!!

타이탄의 우레는 드래곤과 함께 있던 유니콘을 새까만 숯으로 만들어버렸다. 함께 있다가 봉변을 당한 드래곤은 꽈드득!! 이를 악물었다.

“크르으···으!!”

움직일 수 없는 드래곤은 분노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피닉스가 불꽃을 토해내며 타이탄을 공격했다. 피닉스의 불꽃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과 합쳐져 큰 피해를 입혔다.

“죽어라!!”

타이탄의 우레가 내리친 곳은 피닉스가 있는 곳이었다.

“꾸···오오···!!”

파괴의 신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파괴적인 위력은 피닉스로부터 비명을 뽑아냈다.

그러나 피닉스는 쓰러지지 않았다.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처럼 화르륵! 타오르며 맹렬히 저항했다.

“크아악···!”

타이탄의 몸은 서서히 녹슬었다. 그곳에 파괴의 신은 없었다. 땅바닥으로 추락한, 피에 물든 신만이 있을 뿐이었다.

“죽어라···!”

우르르콰과과광!!

두 번째 우레에 피닉스의 불꽃이 약해지고 작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쓰러지지 않았다.

“구오오옷!!”

마지막을 직감한 피닉스가 주홍빛으로 빛나는 불꽃을 쏟아냈다. 그리고 우레가 떨어졌다.

“드디어 사라졌구나, 하찮은 새···?!”

희뿌연 재로 변했지만, 그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꺼지지 않고 남아 조금씩 타올랐다.

그리고 피닉스가 되살아났다.

“이럴 수가?!!”

부활한 피닉스는 더더욱 거센 불꽃을 토해내며 타이탄을 공격했다.

“이노오옴!!”

우르르르콰과고광!!

우레는 심판이자 분노이며, 파멸의 외침이었다.

그러나 피닉스는 죽지 않았다.

“꾸오···오오!!”

“크아아···!”

타이탄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 순간, 지금까지 꾹꾹 참아왔던 드래곤이 분노를 드러냈다.

푸오오오오!!

용의 분노는 진정한 파멸을 알렸다.

“크···아···아······.”

그것이 거신 타이탄의 마지막이었다.

[최종 예선전(1-31)에서 패배했습니다.]

[라이프가 감소합니다.]

[잔여 라이프가 없습니다.]

[라이프 0]

[패배]

“···졌다고.”

[패배]

“···내가 졌다고.”

[패배]

“···마법사 타이탄이 졌다고.”

승리와 패배.

그 중간에서 위태롭게 서 있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 불확실했다.

하지만 마법사 타이탄이었다. 그것도 제우스의 번개와 발키리의 날개를 장착한 4성 타이탄.

“또 지다니···.”

아크는 패배를 바라보았다.

패배라는 글자는 너무나도 선명했다.

두근두근.

차갑게 식어버린 심장이 뛰었다.

아크는 생각했다.

‘또 이상현에게 지다니···.’

오늘이야말로 이상현을 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또다시 패배했다.

이상현을 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1위가 아닌 2위로 마감했다.

“······.”

운명을 짊어진 아크에게 그 사실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적이 아닌 평범한 플레이어에게 또다시 패배하다니.

아크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번 건 내 실수야. 난 이길 수 있었어. 단지, 실수를 저질렀을 뿐이야.’

아크는 이상현이 잘해서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상현이 잘한 게 아니라 자신이 못해서 졌다고 생각했다.

‘그래. 내가 실수만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길 수 있었어! 이길 수 있었다고!!’

비통함과 분노가 무릎을 꿇은 아크를 일으켜 세웠다.

“다음에는···.”

아크는 이상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맹세했다.

“반드시, 반드시 내가 이긴다.”

아크에게 있어 이상현은 ‘적’이었다.

반드시 뛰어넘어야 하는 적.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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