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꿈
마지막 꿈
‘적’의 모습은 흔들리는 아지랑이처럼 흐릿하면서도.
새까맣게 타오르는 연기처럼 무시무시하고.
코를 찌르는 악취처럼 지독하고.
비명을 지르게 만드는 두려움처럼 추악했다.
적을 앞에 둔 플레이어는 본능적인 공포에 사로잡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헉. 허억. 헉. 허억. 허억.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도 적에게 자비를 구해야 했다. 마음은 이미 꺾여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다.
적에게서.
달아나고 싶다.
아아, 신이시여.
부디 자비를···.
자비를 베푸소서.
게임을 시작하기 전부터 끝난 것이다.
아직 게임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모든 것이.
끝났다.
그러나 플레이어는 적과 맞서 싸웠다.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래도 싸워야 하기에.
도망치지 않았다.
【시작해라.】
적은 부질없는 희망을 붙잡고 애걸복걸하는 바보를 바라보듯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목소리가 어찌나 섬뜩한지 악의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보다시피 내 라이프는 1이다.】
【너는.】
【한 번만 이기면 된다.】
【딱 한 번만 나를 이긴다면.】
【너의 소원은 이루어질 것이다.】
적의 말대로.
적의 라이프는 1이었다.
반대로 플레이어의 라이프는 100이었다.
라이프만 놓고 본다면 플레이어가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어디 그것뿐인가?
라이프를 제외하면 적과 플레이어의 차이는 없었다.
똑같이 50골드를 지니고 있으며.
아이템도 똑같았다.
또한, 예외적인 규칙이 적용되는 것도 아니었다. 서로 동등한 규칙 아래에서 진행되는 게임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기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이길 수 없다고 느낀 것일까?
패배를 예감한 것일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패배를···.
받아들인 것일까.
【큭큭큭.】
플레이어는 침을 꿀꺽 삼키고.
게임을 시작했다.
[30초가 모두 지났습니다.]
[END(0-1)]
[상대: ??(1)]
[잔여 라이프(100)]
[전투가 시작됩니다.]
꼬마요정은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고깔모자에서 나타난 친구들은 보기 드물게 강력하고 용감했다. 시작부터 매우 운이 좋았다.
“부탁이야, 날 도와줘, 친구들아!!”
꼬마요정의 간절한 부탁에 용맹한 친구들은 자신만 믿으라며 소리쳤다.
그 듬직한 모습에 꼬마요정은 큰 희망을 얻었고.
잠시 후, 가장 큰 절망과 마주쳤다.
“아, 아아···.”
그곳에는 괴물이 있었다.
거대한 괴물이.
끔찍한 공포가.
영원한 절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괴물은 하나가 아니었다.
모두 합쳐 열 마리였다.
“왜······.”
꼬마요정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덜덜덜 몸을 떨었다. 꼬마요정의 듬직하고 용감한 친구들도 공포에 질린 나머지 땅바닥에 무기를 떨어뜨렸다.
용기는 빛바랜 그림처럼 회색으로 물들었다.
“크르르르···.”
한때 세상에 종말을 불러왔던 괴물들은.
공포에 질린 희생양들을 살려 둘만큼 자비롭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적의 하수인답게 꼬마요정과 그의 친구들을 처참히 살해했다.
콰직! 콰드드득!!
“꺄아아악!!”
저항은 무의미했고.
죽음은 덧없는 희망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남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마, 말도 안 돼···. 이, 이건···. 이건 사기야!! 사기라고!! 어떻게 1스테이지에 10레벨일 수가 있어?! 게다가 전부 6성이잖아?!! 이건 명백한 사기야!! 조작이라고!!」
플레이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기가 분명한 상황에 절망하고 절규했다.
그러자 적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사기가 아니다. 단지, 내 운이 좋았을 뿐.】
「뭐, 뭐라고?!」
적이 플레이어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작과 동시에 6성 챔피언을 뽑으면 된다. 그리고 그 6성 챔피언을 팔아서 골드를 벌고, 벌어들인 골드로 조커 카드를 사서 또다시 6성 챔피언들을 뽑으면 된다.】
【물론 말처럼 쉬운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얼토당토않은 소리에 플레이어는 진심으로 경악했다.
그러나 적은 진실을 고백하고 있었다.
거짓이 없는 진실을.
【믿든 믿지 않든 그건 네 자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내 말이 진실이라는 것이지.】
「웃기지 마···!!」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
시작과 동시에 조커 카드에서 6성 챔피언을 뽑아 그것을 팔고, 팔아서 벌어들인 골드로 또다시 6성 챔피언을 뽑아서 팔면, 게임 첫판에 10레벨과 6성 챔피언 10명을 모을 수가 있다.
「그딴 말을 믿을 것 같아?!!」
그래.
이론상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30초로도 충분하다.
다만, 그 확률이 극악이라서 불가능에 가깝다.
6성 챔피언을, 1골드·6성 챔피언을 뽑는 것만 해도 로또 수준인데, 그걸 연속해서, 열 번 넘게 뽑는다?
그딴 게 현실에서 가능하다고?
【불가능할 것 같나?】
적의 미소는 너무나도 섬뜩했다.
그리고 잔혹하게도 적의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적은 당첨 확률이 2억 9220만 분의 1이라는 미국의 로또 파워볼의 당첨자처럼, 시작과 동시에 6성 챔피언을 뽑고, 뽑고, 또 뽑아서, 1스테이지만에 10레벨과 6성 챔피언 열 명이라는, 터무니없는 일을 해낸 것이다.
「그, 그건···!!」
플레이어는 그 믿기 어려운 사실에 경악하고 또 경악했다. 그리고 티끌만큼 남아있던 희망을···.
잃어버렸다.
【충분히 가능하다.】
아아, 그렇다.
설령 100억 분의 1이라고 할지라도.
1000억 분의 1이라고 할지라도.
1000조 분의 1이라고 할지라도.
확률이 존재한다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특히, 운명을 건 게임에서는.
반드시 일어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확률의 높낮이는 중요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자, 시답잖은 트집이 끝났으면 게임을 계속하지.】
【그렇게 절망할 필요는 없다. 너와 나의 싸움인 만큼 패배는 그렇게 치명적이지 않으니까. 고작해야 3라이프만 감소할 뿐이다. 100라이프면 34스테이지까지 할 수 있을 거다.】
【아! 라이프 감소 아이템이 각자 세 개씩이나 있으니, 36스테이지까지 할 수 있겠군!!】
【그러니 그때까지 최선을 다해라.】
【시작부터 포기하지 말고.】
【솔직히 너에게는 쉬운 게임이 아니냐?】
【36스테이지까지 할 수 있는 너와 달리.】
【나는 단 한 번으로도 끝나니까.】
【큭큭큭.】
끝없이 차오르는 악의가.
희망을 짓밟았다.
이길 수 없지만 그래도 싸워야 한다.
이길 수 없지만 그래도 이겨야 한다.
이길 수 없지만······.
희망만큼은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플레이어는 끝까지···.
끝까지 맞서 싸웠다.
【배신의 깃발이라.】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또 하다니.】
【미련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적의 웃음은 비릿했다.
【포기했다고 해야 할까.】
【큭큭큭.】
【어리석은 짓이다. 룬의 저주 때문에 배신의 깃발이 작동하기는 했지만, 고작해야 3초다.】
【그 3초로는 어림도 없다.】
【게다가 나의 말들은.】
【영원한 힘을 가지고 있다.】
【혼돈이라는 영원한 힘을.】
【마법사들로는 혼돈을 이길 수 없다.】
적의 말대로.
마법사들로는 혼돈을 이길 수가 없었다.
혼돈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토록 찬란한 룬의 마법도 무용지물이었다.
그러나 플레이어는 포기하지 않고 매달렸다.
다른 뾰족한 수가 없기도 했지만.
포기하면 끝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조커 카드에 매달려 보는 게 어떠냐?】
【어쩌면 3골드·5성이 나올지도 모르지.】
【아니다. 4골드·5성의 챔피언이 나오겠군.】
【거짓말 같나?】
【거짓말 같으면 조커 카드를 뽑아 봐라.】
적의 말대로.
조커 카드에서는 4골드·5성의 챔피언이 나왔다.
아무리 뽑아도 나오지 않던 챔피언이···.
너무나도 쉽게 나온 것이다.
조작. 조작이다.
이건 조작된 게임이다.
조작이 아니고서야.
이걸 설명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조작이라고?】
【그럴 리가.】
【뭐,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조작은 아니니까.】
【나는 그저.】
【맞추는 운도 좋을 뿐이다.】
【너와는 다르게 말이다.】
적의 말은 사실이었다.
적은 조커 카드에서 무엇이 나올지 조작하는 게 아니라 무엇이 나올지 알아맞히는 운이 뛰어날 뿐이었다.
물론 플레이어의 입장에서는 그게 그거였지만, 여하튼 조작은 아니었다.
【이제 포기한 거냐?】
【아니면 처음부터 포기했던 거냐?】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시작과 동시에 승패가 정해져 버렸으니까.】
【물론 네가 이길 가능성도 존재했다.】
【나보다 더 빨리 ‘혼돈’을 뽑았으면, 나는 너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거 아나? 6성 챔피언은 오직 한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다는 거? 똑같은 6성 챔피언을 두 사람이 소유하지는 못한다. 오!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그래서 하는 말이다.】
【만약 너에게 절대적인 행운이 있었다면.】
【너는 나보다 더 빨리 혼돈을 뽑았을 것이다.】
【하지만 너는 나보다 행운이 부족했다.】
【행운이 부족해서.】
【100라이프나 가지고 있음에도 패배하는 것이다.】
【나를 이길 수 없는 거다.】
【고작해야 1라이프에 불과한 나를.】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적이 플레이어를 비웃었다.
【자, 게임을 끝내자.】
시작과 동시에 게임의 승패가 정해졌지만.
플레이어는 그래도 끝까지 맞서 싸웠다.
포기하면 정말로···.
정말로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죽어라.】
포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없었다.
희망은 곧 절망으로 바뀌었다.
[END(0-36)에서 패배했습니다.]
[라이프가 줄어듭니다.]
[더 이상 라이프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잔여 라이프 0]
[잔여 라이프 0]
[잔여 라이프 0]
[잔여 라이프]
[0]
[END]
드래곤의 무덤은 원래라면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그런데 복수에 눈이 먼 죽음의 신이 드래곤의 무덤을 만들었고, 마지막까지 맞서 싸웠던 드래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신이시여. 당신이 정말로 존재하신다면.」
「우리를 조금이라도 가엽게 여기신다면.」
「한 줌의 자비를 베푸신다면.」
「부디···.」
최후의 드래곤은 어쩌면 두 번 다시 없을, 마지막 기회를 붙잡아,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에게 꿈을 전달했다.
어쩌면 부질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꿈을 보여줬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생기는 건 아니니까.
게다가 그 사람이 유니버스 STFT 결승에 가지 못하고 떨어질 수도 있다.
시시한 꿈으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적어도 한 사람은···.
꿈은 보게 될 테니까.
만약 기적적으로, 진짜 기적적으로 그 사람이 결승에 올라가고, 꿈을 평범한 꿈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신조차도.
모르는 일이니까.
한숨을 자고 일어난 이상현은 신하영, 잭 로어, 김원호, 알렉스 로드 윈, 쿠론, 에이든, 강무혁과 함께 모의게임을 했다.
“어디 보자.”
이상현은 그 모의게임에서 마법사 조합을 선택했고, 신하영은 수호자 조합을, 잭로어는 보급 조합을, 김원호는 궁수 조합을, 알렉스는 질서 조합을, 쿠론은 암살자 조합을, 에이든은 물 조합을, 강무혁은 땅 조합을 선택했다.
각자 다른 조합을 선택한 이유는 특수한 상황을 연습하기 위함이었다.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다거나.
이상현은 9전사 러쉬처럼 빠르게 레벨을 올렸다. 그 결과 두 번째 죽음의 던전에서 10레벨을 만들 수 있었고, 마법사 조합의 완성인 타이탄을 뽑았다.
하지만 무리한 레벨 업에 따른 골드 부족과 연패에 따른 라이프 부족, 타이탄 이외에 딜러가 없다는 점 때문에 15패로 게임을 마감했다.
당연히 꼴등이었다.
‘역시 마법사 조합은 잘 풀려야 해.’
이상현은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충분히 만족했다.
이상현이 이렇게 모의게임을 한 이유는 곧 있을 2라운드에 선발로 출전하기 위함이었다.
말하자면 몸풀기로 한 판 해본 것이다.
‘그나저나 꼴등이라. 이걸 두고 시작이 좋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나쁘다고 해야 하나?’
STFT 12년차 경력의 이상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2라운드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쥐와 너구리를 섞어 놓은 GM이 나타났다. 그리고 2라운드가 시작되었음을 플레이어들에게 알렸다.
『지금부터 유니버스 STFT 챔피언쉽 본선 16강으로 가기 위한 2차 예선전 2라운드를 시작하겠습니다!!』
GM의 목소리에.
두근두근!
이상현의 심장은 두근거렸다.
“좋아, 시작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