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전쟁터
영웅의 전쟁터
살며시 감았던 눈을 뜨자.
나와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쥐와 너구리를 섞어놓은.
GM이었다.
『다시 뵙게 돼서 반갑네요.』
『못 뵈는 분들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걱정해줘서 고맙지만.
딱히 고맙지는 않았다.
장난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GM이 짝! 박수를 치고 말했다.
『자,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후다닥 본론으로 넘어갈게요.』
『여러분들이 모인 이곳은 영웅의 전쟁터예요!!』
『영웅의 전쟁터가 뭐하는 곳이냐고요?』
『아주 좋은 질문이에요!!』
“······.”
GM은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는데.
혼자서 잘도 떠들어댔다.
아무래도 이런 캐릭터인 모양이다.
『영웅의 전쟁터는 꼴등에게도 기회를 주는 특별한 장소로, 말하자면 순위를 뒤바꿀 수 있는 아주아주 특별한 곳이에요!!』
『우선 여러분들은 한 팀이 되어 무시무시한 영웅과 맞서 싸워야 돼요. 지면 알죠? 꼼짝없이 죽어요. 아참! 영웅의 전쟁터에서 살아남아도 레벨 업은 못해요. 그 점은 꼭 명심해 두세요.』
『여러분들이 영웅을 쓰러뜨리면 특별한 아이템들이 나와요. 그것을 꼴등부터 차례대로 선택할 거예요.』
GM의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특히, 실의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눈을 빛냈다.
『후후후! 대충 눈치 채셨죠? 요컨대 이번 게임은 보너스 게임이에요! 와! 짝짝짝!』
『꼴등에게는 대박과 초대박이 기다리고 있고, 반대로 1등에게는 먹다 남은 부스러기가 기다리고 있죠. 일종의 밸런스 패치인 셈이죠.』
『물론 꼴등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 걸 획득할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선택하는 시간이 20초거든요.』
나와 같은 STFT 고인물이라면 모를까.
초보자들에게 20초는 결코 길지 않다.
굉장히 짧다.
『그 20초 안에 무조건 선택해야 해요. 선택하지 못하면 랜덤으로 정해진답니다.』
『뭐, 마지막에 선택하는 플레이어에게는 30초가 주어지지만 큰 의미는 없답니다.』
『보상으로 등장하는 아이템의 개수는 총 12개예요. 여러분들은 그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거죠.』
『아이템에는 챔피언이 있을 수도 있고, 무기나 방어구가 있을 수도 있고, 특수한 아이템이 있을 수도 있고, 골드가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 신중하게 선택하세요.』
『대충 다 알아들으셨죠? 혹시 질문 있으신가요?』
『없으면 넘어가겠습니다.』
『그럼, 안녕!』
GM은 자기 말만 하고는.
뿅! 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들은···.
세상을 가득 채운 황혼에 사로잡혔다.
[100초 안에 전투를 준비하십시오.]
[영웅 바실리스크(★★★★)와 괴물 바실리스크(★★★) 두 명이 곧 황혼에서 깨어납니다.]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황혼에 갇힙니다. 그리고 영영 사라집니다.]
[영웅 바실리스크(★★★★)]
속성: 땅
직업: 짐승, 괴물
공격력: 437
방어력: 466
체력: 5540
마나: 30/70
스킬: 석화
영웅 바실리스크!
녀석은 4골드·4성의 챔피언답게.
무식할 정도로 강력했다.
챔피언 상점에는 꼬마요정 둘과, 마녀 하나, 고블린 주술사 둘, 그리고 지니가 있었다.
나는 당연히 전부다 구매했다.
[꼬마요정(★★)이 탄생했습니다.]
[고블린 주술사(★★)가 탄생했습니다.]
[마녀(★)가 합류했습니다.]
[지니(★)가 합류했습니다.]
[56골드 남았습니다.]
[지니(★)]
속성: 물, 불, 바람, 땅
직업: 요정, 마법사, 악마
공격력: -
방어력: 65
체력: 820
마나: 30/40
스킬: 신비로운 마법
계속 챔피언을 사들임으로써 40~60골드 사이를 못 벗어나는 것 같지만.
결코 나쁘지 않은 흐름이다.
어차피 써야 되는 돈이고, 골드 이자가 조금 아쉽기는 해도 챔피언을 모으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그리고 후반에는 레벨이 상승해서 가치가 낮은 챔피언은 모으고 싶어도 모을 수가 없다.
나는 챔피언들을 배치하기에 앞서 나와 함께 싸워야 될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
사람들의 눈빛은 정상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비정상까지는 아니었지만,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무거운 분위기가 풀풀 풍겼다.
그러나 나는 ‘승리’라는 공통된 목적을 위해서 일부러 크게 헛기침을 했다.
찌릿.
이거 참.
이런 건 별론데.
주목받는 것도 싫고.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시간이 없으니 최대한 빨리 말하겠습니다. 일단 모두 한 번씩 붙어봐서 알겠지만 현재로써는 제가 제일 강합니다. 말하자면 주력인 셈이죠. 그러니 여러분들께서는 앞에서 바실리스크의 시선을 끌어주십시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대답할 수 없도록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왜냐하면 거북했기 때문이다.
“조금 불만스럽겠지만 팀 게임이라는 것을 기억해주십시오. 이번만큼은 우리 모두가 팀으로 싸워야 합니다. 혹시 다른 의견 있으십니까?”
“······.”
“······.”
“······.”
사람들은 부정도 긍정도 아닌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나마 신하영만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후우우.
STFT를 12년 동안하면서.
채팅을 친 적이 거의 없었는데.
욕이라면 또 모를까.
아무튼 대화를 한다는 건 참 성가시다.
여러모로 귀찮기도 하고.
하물며 이곳은···.
······.
“없으시다면 제가 후방을, 여러분들이 좌우로 병력을 펼쳐서 바실리스크의 시선을 빼앗아주십시오.”
“······.”
“······.”
“······.”
혼자서 이게 뭐하는 짓이냐 싶지만.
저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저들은 나와는 다르게.
필사적이다.
튜토리얼(1)에서 1등을 할 확률이 거의 100%에 달하는 나와는 다르게 위태롭다.
4위 안에 안착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지고.
협력하기를 꺼려하는 것도.
생각이 복잡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저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필사적이다.
저들에 비해 나는.
솔직히 여유롭다.
챔피언도, 골드도, 라이프도, 경험도.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다.
이 상황에서 반전은 있을 수 없다.
곧 있으면 획득할 아이템?
까놓고 말해서 저들이 아이템에 대해서 뭘 알겠는가?
STFT의 기본인 조합도 모르는 초보자들인데.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는.
괜히 저들을 자극하지 않고.
묵묵히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전투까지 30초 남았습니다.]
시간은 느릿느릿하게 흘러갔다.
이런 나와는 달리.
저들의 시간은 총알이었다.
“빌어먹을···. 하나만 더 모으면 되는데.”
전장에 영웅 바실리스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녀석의 옆으로는 괴물 바실리스크들이 머리를 이리저리 비틀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푸화아악!!
도마뱀처럼 넓적한 입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회색빛의 연기, 즉 석화였다. 적중당한 상대를 딱딱한 돌로 만들어버리는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쿠와아아앗!!”
영웅 바실리스크를 속박하고 있던 황혼의 쇠사슬이 콰드득! 끊어졌다.
그것과 동시에 영웅 바실리스크가 쿵!! 앞발을 내딛었다.
영웅 바실리스크와 비교하면 한참이나 급이 떨어지지만, 그래도 같은 4성인 챔피언들이 그 앞을 막아섰다.
“녀석을 막아라!!”
영웅 창병이 당당히 창을 내지르며 영웅 바실리스크를 공격했다.
그 뒤를 따라서 궁수들이 화살을 퍼붓고, 짐승들과 괴물들과 악마들과 언데드들이 달려들었다.
최소 2성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포위망은 영웅 바실리스크와 부하들을 촘촘하게 둘러쌌다.
“쿠와아악!!”
영웅 바실리스크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석화가 세 명의 챔피언을 딱딱한 돌로 만들어버렸다.
콰지직!!
영웅 바실리스크는 압도적인 공격력을 앞세워 돌로 변한 챔피언들부터 공격했다.
딱딱한 돌로 변한 챔피언들은 무방비상태로 공격을 허용했다. 체력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뭐하고 있어? 부하들부터 처리해!!”
“무슨 수로 공격하라고? 팔이 짧은데!!”
“제기랄! 비키든지 뒈지든지 알아서 해!!”
플레이어가 여덟 명이나 참가한 레이드인 탓에 낭비되는 챔피언들이 상당했다.
그리고 예상과는 다르게 2성 챔피언들이 너무나도 빠르게 녹아내렸다.
“크아악?!”
“도, 도와줘!”
“어째서···?!”
쿠우웅!!
그 이유는 ‘거인의 발자국’에 있었다.
공격할 때마다 주변의 모든 챔피언에게 동일한 피해를 입히는 아이템으로, 소수가 다수를 상대할 때 특히 큰 효과를 발휘하는 아이템이었다.
세 마리의 바실리스크는 모두 거인의 발자국을 착용하고 있었다.
“쿠오오오!!”
2성 밖에 되지 못한 챔피언들은 괴물 바실리스크의 공격에 허무하게 쓰러졌다.
“이, 이럴 수가···.”
“우리는 작은 새우였단 말인가···.”
“빌어먹을······.”
그래도 다행스럽게도 뒤에서 맴돌고 있던 챔피언이 그 자리를 즉시 채웠다.
플레이어가 여덟 명이나 돼서 영웅의 전쟁터에 참전한 챔피언들의 숫자가 서른이 넘었기 때문이다.
“우히히히~!”
“스카이콩콩이를 탄 것 같아!”
전설의 꼬마요정들은 고생하는 챔피언들의 뒤에서 케이크를 던지며 떠들어댔다.
물론 5성답게 케이크의 파괴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곧 마나가 최대치에 도달할 것 같았다.
“우오오오오!!”
영웅 바실리스크의 입에서 두 번째 석화가 쏟아졌다.
“여기, 방패가 있다!!”
적중당하면 딱딱한 돌로 만들어버리는 석화를 막아선 것은 영웅 방패전사였다.
영웅 방패전사는 거대한 드래곤에 맞서 싸우는 용감한 용사처럼 방패를 들어올렸다.
“크으윽!! 어림없어!!”
석화의 공격 범위는 가로 세 칸.
그리고 방패전사의 방패 막기도 가로 세 칸이었다.
스아아아···.
············.
······.
단숨에 세 명의 챔피언을 딱딱한 돌로 만들어버렸던 석화는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막혔다.
“크라라악!!”
자존심이 상한 영웅 바실리스크는 공격 대상을 영웅 방패전사로 바꾸었다.
콰지직!! 콰직!!
영웅 바실리스크의 거대한 입과 이빨은 영웅 방패전사의 방패를 알루미늄 캔처럼 우그러뜨렸다.
“이, 괴물 놈···!!”
영웅 방패전사는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웠다. 자신이 물러서면 동료들이 죽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준비완료!!”
“야호!!”
그사이 마나를 가득 채운 전설의 꼬마요정들이 고깔모자를 벗어서 휙! 뒤집었다.
“도와줘, 친구들아!!!”
꼬마요정들의 외침에.
고깔모자에서 열 명의 친구들이 나타났다.
전장에 소환된 친구들은.
5골드·2성의 데스나이트(★★)와.
6골드·1성의 타이탄(★)이었다.
“······.”
데스나이트는 공포를 모르는 전사였다. 온몸에서 화르륵! 피어오르는 증오와 슬픔은 무시무시한 죽음의 힘이었으며, 파괴의 상징이었다.
“죽···어···라···.”
데스나이트들은 핏빛의 검을 들고 괴물 바실리스크를 향해서 달려갔다.
그 뒤로 산처럼 거대한 타이탄이.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난쟁이들이여.”
타이탄의 목소리는 천둥과도 같아서 웅장하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신비로움을 갖고 있었다.
“나의 힘이.”
“너희들을.”
“모두 태워버릴 것이다.”
우르르르콰과과과광!!
번쩍!!
타이탄의 우레가 전장에 떨어졌다.
“쿠아악?!!”
괴물 바실리스크는 그 공격에 진심으로 경악했다. 왜냐하면 터무니없이 강했기 때문이다.
파지지직!!
결코 1성의 위력이 아니었다.
“부서져라.”
우르르르콰과과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