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살아 있어’ 같은 감동적인 소리를 하더니 자신을 두고 가려고 밑밥을 깐 거였나?
생각해 보니 피난길은 위험하지 않았다. 이단우와 차우원이 다 쓸어버릴 거였는데 강울림에게 안전을 당부할 필요가 없지 않았는가?
그러나 문제는 일단 여기서 살아남는 것으로 보였다.
“대체 게이트 잠입은 왜 한 거랍니까?”
“아니, 청연에서는 무슨 대규모 이동 스크롤 제공을…….”
“그게 내 탓이야? 길드장이 제자한테 길드 보물창고 열쇠 하나 못 줘요? 애초에 청연 지분 반절 이상이 차씨 집안 거야! 그래, 다 내 탓이네. 내가 열쇠 줘서 영웅팀이 제대로 된 지원도 못 받고 <최후의 던전> 들어갔네!”
“누가 그렇다고 말씀드렸습니까?”
“아니면 그게 무슨 뜻이에요? 잘 줬다고 칭찬한 거야?”
그런데 사람들이 싸우고 있었다.
‘내 대답은 필요 없는 건가?’
강울림은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용기를 내서 손을 들었다.
그는 일 년간 팀원들을 보아 왔다. 이단우는 막 나가는 사람이었으나 언제나 악의는 없었다! ……아마도!
하고자 하는 일이 실패하는 법도 없어서, 그에 대한 강울림의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저기, 하지만 저희 팀원들이 나쁜 뜻은 없었을 겁니다.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는 사람들도 아니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아니, 아니.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우리가 무슨 소리 하려고 불렀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청연 길드장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차우원 팀>이 들어가는 건 기정사실이지. 성검의 주인이 포함된 팀을 누가 반대하겠어요? 근데 왜 말도 없이 들어갔냐는 거잖아. 지원 필요 없어? 팀 그렇게 부자야? 아니, 내 제자 잘사는 건 아는데……. 소모성 아이템이나 장비 같은 건 또 다른 문제잖아?”
“휴식 시간도 부족하지 않습니까? 이곳까지 피난 행렬을 호위한 것도 <차우원 팀>으로 알고 있는데요. 한 개 구역을 맡아 방어전에도 성공했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헌터들이라지만 몸이 제 상태가 아닐 텐데요.”
고청이 진지하게 말했다.
“왜 그렇게 서두른 건지 아는 바가 있으십니까? 팀원이니 들은 말씀이 있을 듯한데요.”
‘어? 이단우 욕먹는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
강울림은 고청과 큰 사건을 두 번 해결해 본 경험이 있었다. 이림 전 길드장의 저택 호위와 비정기 던전 공략 때.
그에 대해 ‘듬직하고 진지한 탱커 선배’라는 인상도 갖고 있었다. 그만큼 서로를 겪어 봤다. 그 말은 고청도 <차우원 팀>에 대해 대강 안다는 뜻이었다.
고청은 비난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차우원 팀>을 걱정하고 있는 듯했다. 그가 당연히 <차우원 팀>이 서둘러 게이트를 통과해야만 했던 이유가 있을 거라는 듯이 말해서, 강울림은 그가 이단우를 신뢰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이단우에게는 늘 생각이 있다. 그 생각이란 게 언뜻 어처구니없게 들려도 나름의 합리적인 논리를 갖추고 있지 않은가?
그런 그가 선택했다면 그 선택은 근거가 있을 터였다.
그러나 강울림은 아는 게 없었다.
“들은 말이요? 어, 잘 살아 있으라고…….”
“…….”
고청이 허공을 보는 모습이 보였다.
강울림은 정말로 곤란했다!
‘……이단우!’
어쨌든 <종말 방어전>은 이제 시작이었다.
길드 연합에서는 ‘성검의 주인’ 이단우가 팀을 이끌고 <최후의 던전>에 들어갔음을 알렸다.
놀랍게도 그 사실은 누구의 반발도 일으키지 않았다!
강울림은 자신이 성검 강탈자를 막고 쓰러져 있는 동안 이단우와 차우원이 무슨 활약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가 아무것도 못 하고 있던 사이 이단우는 성검을 회수하고 성검의 주인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종말을 막으러 갔다. 그가 강울림을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대로.
그의 말 중에 이루어지지 않은 건 하나밖에 없었다.
강울림이 이단우의 팀원으로서 <종말>을 막을 거라는 것.
‘부상당하지 말았어야지.’
강울림은 자책했으나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게다가 이단우는 그에게 할 일을 이미 알려 주었다.
‘살아남으라고.’
그 말은 다른 사람들을 함께 살리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는 팀의 일원이었다. 팀원들이 던전 안에서 <종말>을 막는 동안 놀고 있을 마음은 없었다.
강울림의 회복 속도는 괴물 같은 신체 능력을 자랑하는 탱커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이틀쯤 지나니 휠체어를 혼자 끌 만해져서, 그는 전장에 합류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성검>에 당한 부상자 중에 생존자가 더 드물다구요! 강울림 헌터는 쉬셔야 해요. 형의 팀원이 스스로 죽으려 드는 걸 제가 방조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차치원이 반대했다. 강울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앞에 나설 생각은 없어. 부상당한 탱커는 짐만 되잖아.”
“예? 제가 언제 그렇게 심한 말씀을 드린……? 뭘 어떻게 하시려고요?”
“스킬 쓸게.”
“……?”
“이 스킬, 내 몸 상태 따라 강도가 달라지거든? 내가 부상 중이라 별로 튼튼할 것 같진 않은데……, 그래도 실드 까는 수준은 되겠지. 마법사 실드 한 장 아끼라고 해! 아무튼 난 뒤에서 놀고먹진 못하겠어.”
“아니, 중상자를 전장에 세우는 법이 어디에 있어요? 강울림 헌터는 이동도 못 하잖아요?”
“탱커가 왜 이동을 해?”
‘너 이단우야?’라는 말을 삼키고, 강울림은 <탱커의 정석>에서 읽은 대로 말했다.
“탱커가 이동해 봤자 전진 아니면 후퇴인데, 여기서 더 물러날 데가 있어? 그럼 다 죽는 거잖아. 전진할 때는 우리가 이기고 있는 상황이니까 내 이동 속도는 문제가 안 되지.”
“……!”
그가 여러 책을 읽으며 공부한 건 이단우를 말로 이겨 보기 위해서였으나, 이단우에겐 효과가 없었고 이상한 데서 통했다.
어쨌든 공부해서 남 줄 일은 없었다.
독서 교육의 짜릿한 성과를 느끼며 그는 전선에 실드 까는 마법사 역할로 합류했다.
그리고 한 사람분의 몫을 했다.
강울림은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몸으로 탱킹을 하며 스킬을 사용하는 건 어쨌든 멀티 플레이 아닌가? 이단우의 두 가지 명령, ‘무리하지 마라’와 ‘정의로운 행동을 해라’를 함께 지키는 게 어려웠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단순한 일에 열중하는 건 그의 적성에 맞았다.
둘 중 하나만 지켜야 할 상황에서, 강울림은 최적의 효력을 냈다.
“녹는다!”
“아니! 자리 지켜!”
강울림은 물러서지 않고 외쳤다. S급 탱킹 스킬 <무결의 벽>은 사용자의 강함에 따라 강도가 결정됐다.
그는 부상자였으나 육체 강도는 여전히 웬만한 탱커 못지않았다. 근육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단우와 차우원에게 구해진 뒤로, 강울림은 한시도 단련을 쉰 적 없었다.
이단우는 그의 빚을 갚아 주고 믿기지 않는 계약금을 그의 가족들에게 안겨 주기까지 했다. 강울림은 나중에 그 금액이 어떤 엘리트 신입 헌터도 받을 수 없는 액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서정이 자랑하느라 떠벌린 것보다 그가 받은 계약금이 더 많았던 것이다.
‘왜?’
그는 센터를 오래 쉬었다. 괜찮은 유망주였을지는 모르나 그만한 가치는 없었다.
그는 구원받았다……. 이단우가 무슨 생각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으나, 그가 자신을 구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 전부를.
강울림은 은혜를 갚을 터였다. 그게 아니라도, 그는 이 팀이 좋았다.
“……!?”
“무슨 실드가…….”
“저 사람, <차우원 팀>의 탱커야!”
“역시 <차우원 팀>의……. ……탱커? 마법사가 아니라?”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뒤로!”
“후퇴해!”
“어디로?”
강울림은 방벽을 기어오르는 몬스터 떼를 보며 물었다.
청연 앞마당을 최후 방어선으로 삼고 보조계 헌터들이 달라붙어 세 겹의 방벽을 세웠다. 두 겹의 방벽이 무너질 때까지 걸린 시간은 나흘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마지막 방벽이 함락되기 직전이었다. 물러설 곳은 없었다.
막아도 끝도 없이 밀려든다.
-악화가 너무 빨라. 전대랑 상황이 다르니 대비가 안 되잖아.
청연 길드장의 말대로였다.
정부와는 합류조차 하지 못했다. 모든 길드가 청연에 모일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본래 오염 시작 시기부터 외곽을 방어해 가며 피난 거점에 모여들었어야 할 방어 세력이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그들이 물러서면 청연을 위시한 길드 측 방어선은 전멸이다.
스킬이 깨진 충격으로 강울림의 상처는 다시 터졌다. 검붉게 더러워진 붕대가 새로 스며든 피에 다시금 붉게 물들었다.
‘물러서면 안 돼. 이단우가 말했잖아.’
살아 있으라고.
다른 사람들이 죽게 두고 강울림은 어떻게 살아남겠는가?
“물러서라고!”
차치원의 외침을 무시하고 강울림은 다시 스킬을 깔았다. 방벽 위에 거대한 빛의 벽이 한 겹 깔렸다.
그러나 애초에 무리해서 사용한 스킬이었다. 수백수천의 몬스터가 일제히 벽을 기어오르며 머리를 박아 댔다.
쿵!
벽이 울리는 소리가 천둥 같았다.
차치원을 포함한 청연의 길드원들과 방벽을 막던 헌터들도 물러설 수 없었다. 스킬이 막아 내지 못한, 이미 넘어온 몬스터를 베어 냈다.
<차우원 팀> 탱커의 활약은 절대적이었다. 최악의 순간을 몇 번이고 넘기게 해 주었다. 그러나 스스로 빛을 발해야 할 스킬벽이 어떤 광원도 되지 못하고 있다. 스킬의 문제가 아니었다. 벽에 달라붙은 몬스터들 때문이다.
쿵!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세어 보지 않아도, 어두운 시야가 알려 줬다. 모든 헌터의 머릿속에 끝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안 되는데.’
강울림이 지킬 수 있는 명령은 이제 하나뿐이었는데, 그것조차 지키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는 코를 막았다. 피가 손가락 틈으로 흘러내렸다. 신체를 한계 이상으로 혹사시킨 탓이다.
어떻게 해도 그의 신체 능력이 한계를 맞이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코피를 흘린다는 경험 자체를 방어전 중에 처음 맞이했다.
쿵!
방벽이 깨지며 빛이 유리 조각처럼 비산했다.
방어전 최전선에 서 있던 헌터들은 이미 정신력으로 버티던 중이었다. 그들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차치원은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몬스터를 막지 못했다. 정신이 지탱하지 못한 몸은, 지금껏 보이던 반응 속도를 내지 못했다.
‘어?’
그 순간 거짓말처럼 상공이 갈라졌다.
멍든 하늘에 실선이 그어지더니, 그 푸른 선이 좌우로 영역을 넓혔다. 숨쉬기 어렵던 공기가 가벼워지고 끔찍하게 내리던 눈이 멎었다.
몬스터가 차치원의 어깨를 물었으나 그것의 이빨은 갑주를 뚫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약화됐어.’
맑은 공기가 차치원의 폐부 깊숙이 가득 찼다.
그는 이 현상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겪어 봐서가 아니다. 본능적인 깨달음이었다.
“거기 비켜!”
뒤에서 스승님이 고함쳤다. 차치원은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다.
청연 길드 마스터 류시환의 상징 같은 검술이 펼쳐졌다. 일검에 몬스터 다섯의 머리를 날려 버리고 그가 외쳤다.
“종말 끝났다! 저 새끼들 집으로 돌려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