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손님이 치원이였어?”
‘뭐지?’
“응, 형, 있었네.”
차치원은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아차 해서 존댓말로 바꿨다.
“……스승님을 대신해 왔습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차치원은 공적인 일로 이곳에 왔다.
‘형이 자료를 읽었을까?’, ‘여전히 사이좋아 보인다.’ 같은 생각을 치우고 이단우에게 말하자 그는 소파로 비켜섰다.
“들어오세요. 안으로 갈까요?”
이단우가 먼저 사무실로 향했다. 차치원은 그곳이 저번에 닫혀 있던 그 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형은 그곳에서 이단우를 안고 나왔다…….
차치원은 문을 잡고 있었다. 당연히 형도 따라 들어오리라 생각했으나 형은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둘 다 식사 안 했지. 점심 사 올게.”
그리고 본관을 나가 버렸다.
‘형이 심부름을?’
차치원은 입이 벌어졌다.
“앉으세요. 말씀드린 건은 어떻게 되었나요.”
“네? 아. 스승님께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셨습니다. 헌터들의 연계는 몹시 중요한 일이라고 기뻐하시며, 청연의 눈과 귀가 닿지 않는 곳을 <차우원 공격대> 같은 우수한 팀의 도움을 받아 보호할 수 있다면 앞으로 닥쳐올 위기도 막아 낼 수 있으리라 자신하셨습니다.”
길드장의 제자가 마무리를 위해 직접 찾아온 것이니 청연으로서는 최대한의 존중을 표한 것이다.
스승님이 ‘어, 그러자’고 간단히 말한 내용을 차치원은 예의를 갖춰 다듬어 말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게이트가 열리고 있다. 종말 예언 이후 게이트의 수는 하루가 멀다 하고 늘었다. 중소 길드는 말할 것도 없고 청연 같은 거대 길드도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일부 지역의 공략권을 독립팀에 넘겨 버리는 건 후한 처사였다. 독립팀은 지역 방어를 통해 자신들의 능력을 증명해 내고 장차 길드로 발전할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테니까. 반면 청연은 해당 지역을 보호할 능력이 없다고 물러난 꼴이 되지 않은가.
스승님은 ‘보호할 능력 없잖아? 이림도 죽어 나가는데.’라고 했으나 그 이림은 독립팀과 하청 계약을 맺는 쪽을 택했지 스승님과 같은 결정을 하진 않았다. 이건 스승님의 호의였다.
스승님은 이 사람을 마음에 들어 한다.
이단우는 감격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별 표정 없이 듣고 있다가 말했다.
“네, 좋네요.”
차치원은 다시금 놀랐다.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르는 건가?’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같은 말은 바라지 않았으나, 조금 더 기뻐하고 긴장하는 반응이 있어도 되지 않나?
타고난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형만 해도 그랬다. 언제나 별 동요가 없고 주변의 호의나 질시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형은 반듯하고 노력하는 사람이었고 이단우는 자신의 재능을 약으로 썩히는 부류였다.
그리고 형을 심부름꾼으로 사용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계약을 확정 짓고 치원은 서류를 인벤토리에 넣었다. ‘다 했으면 가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단우는 새삼스럽게도 형의 연인이었다. 보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해질 만큼 섬세한 얼굴이기는 했다. 누구랑 연애를 하더라도 상대방을 자기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 만큼.
그러나 형은 그렇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형은 완벽했다. 형의 곁에 서려면, 형까지는 아니어도 흠잡을 데가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차치원은 막연히 생각해 왔다.
이단우는 아니지 않은가.
‘중독자면서.’
형의 애정을 당연하게 여긴다. 형에게 명령을 하고 심부름을 시키고 형으로 하여금 신경을 쏟게 만든다.
형이 이런 사람을 선택했다면, 어쩔 수 없다. 형은 무슨 생각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형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그가 알아줬으면 했다.
차치원은 침을 삼켰다. 용기를 그러모아 말했다.
“형은…… 집에서 심부름 한번 해본 적 없어요!”
‘……?’
이단우는 차우원의 동생이 왜 갑자기 형을 욕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집에서는 항상 영양소를 고려해 음식을 차리고 제시간에 형이 식사할 수 있도록 했고요. 형에게 필요한 건 언제나 곧바로 준비해서 서포트했어요. 저희 가족은 형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요. 제가 이런 말씀 드리는 게 건방지다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알아주셨으면 해서요.”
이단우도 알고 있었다. 차치원은 차우원을 위해 <최후의 던전>도 들어갈 수 있는 놈이었다.
어린 차치원이 진지하게 말했다.
“형을 잘 부탁드립니다.”
이단우는 할 말이 없었다.
“네.”
차치원은 이단우의 떨떠름한 반응이 마음에 차지 않았다.
“이단우 님도, 건강 챙기시고요!”
‘약 좀 하지 마라!’
헌터는 저항 스탯이 높아 약을 한다고 외형이 망가지진 않았다. 그러나 풀린 눈이나 이상한 행동 같은 걸 스탯이 막아 줄 수는 없다.
“네. 하실 말 다 하셨으면 일어날까요.”
이단우의 반응은 여전히 성의가 없었다.
‘이 사람은 형을 소중히 여기지 않나?’
차치원은 속이 상했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서는 건 월권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이 어떤 식사를 하는지는 확인하고 싶었는데, 그것도 못 보고 쫓겨나게 생겼다.
형은 어떡하지, 정말 이런 사람이 왜 좋은 걸까? 사람의 마음은 이성으로 제어되는 게 아니라지만, 이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차치원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사무실을 나가려는 그의 눈에 창밖의 풍경이 들어왔다. 어떤 건물이 지어지고 있었다. 그는 무심코 물었다.
“저건 뭘 짓고 있는 건가요?”
“스킬 수련장이요.”
‘사무소 건물밖에 없더니, 규모 키우면서 수련장도 짓는 거구나.’
하고 생각하던 차치원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단우는 임무 외 시간에는 사무소에서 살다시피 하는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길드에서 산다’는 표현은 보통 그 사람이 대단히 성실한 헌터라는 뜻이었다. 길드 내 수련실이 갖춰져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엘리트 헌터라면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인다. 그런 사람이 사치도 하지 않고 길드 건물 내에서 생활하며 자기 수련에 몰두한다는 의미 아닌가.
차치원도 이단우의 조사 보고서를 읽었다. 이단우가 ‘사무소에서 살다시피 한다’는 문장을 말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렇겠지.’
형의 팀원 아닌가. 엘리트인 데다가 당연히 자기 단련에 철저한 사람일 터였다. ……중독자이긴 했지만.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 수련장을 짓고 있다면, 지금까지 이단우는 무슨 단련을 했다는 건가?
‘……왜 저런 사람에게 재능이 갔을까?’
차치원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동요하는 자신을 보이지 않기 위해 서둘러 인사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형을 기다려 인사하고 싶다는 생각도 지금은 들지 않았다. 형과 이단우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형이 틀릴 리가 없는데, 감히 자신이 의심하게 되는 게 무서웠다. 그는 건물을 뛰쳐나가려다 문득 멈춰 섰다.
‘뭐였을까?’
자신이 들어왔을 때 형과 이단우가 숨긴 게.
모든 중요한 결정에서 차치원은 소외되어 왔다. 차치원은 어렸고 평범했고, 그의 판단은 믿음직하지도 쓸 만하지도 않았으니까.
아버지가 형과 상의하고 차치원은 나중에 그 일을 듣게 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스승님의 제자가 되었을 때도, 아버지는 ‘말해 두었다’고 이미 결정된 일을 치원에게 통보했다.
차치원이 책임질 수 있는 일은 무엇도 없었다. 누구도 그에게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형의 문제를 알고 있는 건 자신뿐이었다. 그 두 사람의 관계가 건강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형을 위해 움직일 수 있는 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이쯤이었는데.’
이단우가 물건을 내던진 곳이.
차치원은 이끌리듯 구석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쌓인 상자 안에서 유일하게 먼지 한 톨 쌓이지 않은 이상한 구체를 발견했다.
‘이게 뭐지?’
손으로 집어 든 순간, 구체는 길게 일그러지더니 검으로 변했다.
띠링!
<성검>(EX)
이 검은 주인의 간절한 염원을 이루어 줍니다.
-제한: <종말>을 막을 자.
‘아.’
괴롭게 뛰던 심장이 차분해졌다. 숨이 고르게 쉬어지고 머리가 명료해졌다.
차치원은 생각했다.
‘그래, 저 사람은 아니야.’
형의 옆에 설 사람은.
당연한 사실을 왜 고민했을까?
차치원은 기척 없이 나온 문으로 되돌아갔다. 벽에 등을 댄 채 잠시 기다렸다. 이단우가 나오기를.
* * *
어린 차치원이 나가고 이단우는 잠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속이 메슥거리더니 갑자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리더. 리더가 형을 죽였어요?
비린 것이 입 안을 감돌고 먼지 냄새와 흙냄새가 맡아졌다.
‘닥쳐.’
단우는 일어났다.
차치원을 보내고 차우원을 설득해야 한다.
뒷조사가 뭐? 이단우 같이 수상한 놈이 얼쩡거리면 단우 자신부터 뭐 하는 새끼인지 캐 봤을 터였다.
차우원이 이제야 이단우를 뒤져 봤다는 게 오히려 놀라울 지경인데, 그게 뭐라고 자신은 성물을 가질 수 없다는 소리나 하고 있단 말인가?
도덕 스탯이 만렙을 찍었나. 그래서 티끌만 한 흠도 참지를 못하나?
‘애초에 뒷조사가 범죄인가?’
슬슬 열이 뻗쳐서 단우는 문고리를 거칠게 잡았다. 다음 순간 피부가 따끔거렸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며 위험을 알렸다.
‘차치원.’
이단우의 몸이 기억하는 마력이, 문 앞에서 증폭되고 있었다.
생각할 것도 없이 단우는 검을 뽑았다. 문이 부서지고 차치원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