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왜 놀라냐.’
단우가 연락한 게 처음도 아닌데 전화 받을 때마다 놀라고 있다. 그러나 겉보기만 이럴 뿐 권준홍이 그다지 기가 약한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단우는 알고 있었다.
‘기 약한 놈이 최후의 던전에 따라왔을 리가 없지.’
“잘 지내셨나요.”
[예, 어, 덕분입니다!]
권준홍은 버벅거렸다. 뭐가 덕분이라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단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학교생활은 잘하시고요.”
[네? 네. 그렇습니다.]
“뭐 문제는 없으신가요?”
[네! <차우원 공격대>를 비롯한 헌터님들이 불철주야 노력해 주셔서 세상이 평화로워…….]
‘입에 발린 소리는 됐고.’
단우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친구분은 요즘 좀 어떠신가요.”
그가 권준홍에게 전화를 건 이유는 물론 과거 팀원과 친목을 다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배지슬의 각성 여부를 알아야 한다.’
이단우가 잊을 만하면 연락해서 이상한 질문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권준홍은 별 의심 없이 대답했다.
[앗. 지슬이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단우 헌터께서 지슬이 아버님을 구해 주셔서 저희가 안심하고 생활하는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은 없고요?”
권준홍의 목소리가 심각해졌다.
[……혹시 지슬이네 집에 또 협박 편지가 왔나요? 위협이 끝나지 않은 거군요! 어쩐지. 이단우 헌터같이 바쁜 분이 자꾸 친근한 척하는 친척 어르신처럼 구신다 했어요!]
“…….”
‘각성 안 했군.’
배지슬이 각성했다면 권준홍이 걱정할 건 ‘각성한 전대 영웅 딸을 노리는 위험’이었을 테니까.
그나저나.
‘이 새끼 나를 수상하다고 생각했잖아.’
단우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했다.
“사실 그랬습니다. 또 어떤 위협이 닥칠지 몰라서 주시하고 있는데, 권준홍 씨가 항상 상황 파악을 잘해 주셔서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종종 연락을 더 드릴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그럼요! 새벽이어도 괜찮으니 언제든 전화 주세요. 지슬이 있는 곳으로 가겠습니다.]
권준홍이 약속했다.
그가 자신의 번호를 스팸 신고하지 않도록 조치한 뒤 단우는 전화를 끊었다.
‘아니야, 괜찮아, 시간 있어.’
단우는 초조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과거 <최후의 던전>이 열린 건 종말 예언으로부터 2년 뒤였다. 이미 시간대는 뒤틀렸지만.
배지슬은 각성할 것이다. <차우원 팀>의 마지막 퍼즐은 그녀였다.
이 팀은 곧 완전해질 것이다.
그럴 시간을 이단우가 벌어 줄 테니까.
‘괜찮아.’
생각을 정리한 단우는 일어나서 커튼을 걷었다.
아지트가 위치한 시 외곽은 치안이 나쁘고 건물도 노후화된 지역이었다. 다시 말해 땅값이 싼 곳이어서 그는 독립하려고 모은 돈으로 건물을 빌릴 수 있었다.
이후 야금야금 아지트 근처 땅을 사들여서 지금은 일대가 <차우원 팀>의 소유였다.
‘그게 무슨 말이냐.’
이 팀이 소규모 길드 수준의 외관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팀원 하나하나가 웬만한 연예인 이상의 인기를 끌고 있는 지금 시점에, 이단우가 별문제 없이 아지트로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도 그거였다.
“약속 잡으셨습니까? 성함을 말씀해 주십시오.”
“아니, 제가 지금 늦어서 빨리 들어가 봐야 하는데…….”
가십 기자인지 누군지가 경비원에게 가로막혀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도 단우의 위치에서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경비원이 막고 있는 정문과 아지트 건물까지의 거리가 먼 덕이다.
입구와 주요 건물을 멀리 두는 기본적인 구조를 갖춘 것이다.
팀 소유지 주변은 담벼락을 두르고 마정석과 방어 스킬진으로 도배해 놨다.
‘정부가 도움도 되는군.’
정부 요원 소개로 관련 업체를 빠르게 잡을 수 있었다.
아지트 창밖으로는 새로 지어지고 있는 건물 하나가 보였다.
‘스킬 수련장.’
단우가 오래전부터 벼르고 있었으나 돈 문제로 짓지 못한 시설이었다.
‘이제 소서정은 도망 못 간다.’
개인 스킬 수련을 한다는 핑계로 소서정은 집합을 빼먹곤 했다. 단우는 더는 그 꼴을 봐줄 생각이 없었다.
물론 단우가 소서정 때문에 이 모든 일을 한 건 아니었다. 아지트 규모가 커지는 거야 소서정이 기뻐 날뛸 일이긴 했지만.
‘최소한의 방어 시설을 갖췄다.’
아무리 스킬을 둘러놨어도 기존의 아지트는 허술했다. 그간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지트 안에 들어 있던 놈들이 너무 강했던 데다 그놈들을 뚫고 침입할 만큼 안에 귀한 물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이야기가 달랐다.
단우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손은 쓰지 않고, 체내의 마력을 뽑아내 인벤토리를 헤집자 그 안에 들어 있던 물건이 허공에서 뚝 떨어졌다.
데구르르…… 툭.
<성물>이 테이블 위에 안착했다.
이상하게 생긴 물체였다. 그건 검이나 창, 활 따위의 형태가 명확한 무언가가 아니었다. 이 세상 물질로 이루어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단우는 던전 안에서 그걸 본 순간 자신이 찾던 물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 차우원에게 들었던 대로 <리자드맨 킹>이 반 토막 났을 때 그 사체에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리자드맨 킹>을 베었을 때 나왔어. 처음에는 그게 뭔지 몰랐는데, 쥐는 순간 검으로 변해서 <성검>이라는 걸 알았지.
단우는 잠시 성물을 두고 지켜봤으나 그건 <성검>으로 변하지 않았다. 이단우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이건 직접 만져야 자격을 시험받을 수 있다.’
모든 아티팩트가 그렇듯이.
접촉이 일어나면, 자신을 쥔 사람이 소유자가 될 자격이 있는지를 시험하는 것이다. 단우는 던전 안에서 성물을 옮길 때도 신체 접촉은 하지 않았다.
이단우는 더 이상 성검의 주인이 아니었다.
성검은 본래의 주인에게 돌아갈 것이다.
단우는 가슴이 떨렸다.
이 아지트는 충분히 안전한 곳이 되어야 했다. 곧 ‘성검의 주인’을 보호해야 할 테니까.
‘그 전에 넘어야 할 산이 있지만.’
“우리보고는 쉬라더니 혼자 무슨 일을 한 거야. 밖에 경비실 생겼던데, 부지 규모도 커지고. 오늘 서정이 소원 쟁취하는 날이야?”
호출을 받고 온 차우원이 아지트로 들어왔다.
단우는 그에게 말했다.
“앉아. 줄 거 있어.”
“……?”
단우가 눈짓하자 차우원은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이게 뭔데?”
“성물.”
“……!?”
차우원의 손이 멈췄다.
그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단우는 말을 이었다.
“지금 <성검>으로 형태 변환시켜. 성검의 주인이 돼서 그 사실을 공표하고 소유권 주장하자.”
“뭐?”
“네가 주장하면 정부와 5대 길드는 너 협박 못 해. 전대의 일이 있으니까.”
‘차문경은 정부 소속 헌터들에게 습격받았다.’
수십 명의 헌터가 차문경 하나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몰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건 정부 측 헌터들이었고 차문경은 살아남았다. <차문경 팀>의 팀원들이 그녀를 안고 <최후의 던전>으로 피신했다. 그녀의 명령에 따라서.
그 길로 <최후의 던전>을 공략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차문경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일련의 비극을 겪은 <차문경 팀>의 일원들이 현 5대 길드에 찢어져 있다. 스승님을 제외하고는 죄다 은퇴했지만 영향력은 여전했다. 그들을 존경하는 헌터들이 길드에 남아 있는 이상, 정부와 길드의 관계가 회복될 일은 없을 듯했다.
‘차우원이 아니었다면.’
그가 센터 연수생으로 들어갔을 때 모든 길드가 펄쩍 뛰었을 것이다. 물론 가장 높이 튀어 오른 건 정부였다.
‘정부와 길드의 갈등은 결국 민간인의 희생을 불러올 뿐이다’ 따위의 그럴듯한 소리를 늘어놓으며 줄곧 화해를 바라던 정부는, 차우원이 손을 내밀어 줌으로써 명분을 잡았다.
‘차문경의 아들이 용서해 주지 않았느냐’고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실제로 차우원의 행동이 가교가 되어 정부와 길드 간의 긴장 상태는 전보다 완화됐다. 청연은 정부 의뢰로 합동 작전도 할 정도고, 기희윤 놈 잡겠다고 이림까지 정부와 잠시 손잡은 상황이다.
‘여기도 차우원은 엮여 있다.’
단우는 확신했다.
‘제대로 만들었어.’
“단순히 전대의 위명에 기대는 게 아니라, 넌 서사가 너무 좋아. 얼마 전에는 비정기 던전까지 공략했지. 5대 길드의 어떤 공격대도 현재 이 팀만 한 인기는 없어. 지금이 적기야.”
팀 결성 일 년 만에 5대 길드 공격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위상을 얻었다.
짜릿했다.
그러나 단우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게 말도 안 되는 성과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건 이 자식들 데리고 이만한 성과도 못 거두는 거고.’
차우원이 테이블을 짚었다.
“단우야, 잠깐만……. 정리부터 하자. 성물이 왜 여기에 있어?”
그는 ‘이게 정말 성물이야?’ 같은 쓸데없는 의심은 하지 않았다.
“찾았어. 비정기 던전에서.”
“그럴 시간이 있었나? 내가 하루 종일 단우 랑 붙어산다고 생각했는데, 왜 난 못 봤지?”
‘말 이상하게 하지 마라.’
“누가 떨어지래? 네가 이림 엘리트들이 <리자드맨 킹> 머리에 깔려 죽었나 확인하러 가지만 않았어도 봤겠지.”
차우원이 확인하려던 건 소서정의 스킬 여파였겠지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차우원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그때 발견했는데 얘길 안 했어? 단우야, 이거 범법인 거 알지.”
<성물 쟁탈전>의 원칙에 따르면 성물을 발견하고도 공개하지 않는 건 규칙 위반이다.
단우는 황당했다.
‘왜 준법 시민인 척하냐.’
“뭐 도둑질은 합법이었어? 그리고 누가 숨기래? 공표해. 네가 성검 가졌다고.”
차우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단우야,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래. 네가 그 소리 할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