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단우야.”
단우는 이모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온기가 빠져나간 손을 주먹 쥐고 주머니 안으로 감췄다.
“전 화난 게 없는데요. 제가 화를 풀면 뭐가 달라지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 드릴게요.”
“지규도 반성하고 있어. 애가 철이 없잖니. 또래보다도 정신 연령이 어려. 할 말 못 할 말 구분 못 하는 애라는 거 알고 있잖아. 나쁜 뜻은 없는 거.”
이모가 변명을 주워 삼켰다.
“네, 그래요.”
오만상을 쓰고 있는 김지규를 보며 단우는 대답했다.
‘이 대화 계속해야 하나.’
바라는 걸 얘기하라는데 이모는 말을 돌리고 있다.
이모에게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그걸 해결할 사람이 이단우라고 믿고 있는 듯했다.
단우는 그 문제가 뭔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녀가 용건을 말하고 이곳을 떠났으면 했다.
“단우야…….”
“아, 그만 좀 해! 엄마는 아직도 모르겠어? 저 새끼가 함정 판 거라고! 우리 집 망하게 하려고 수 쓴 거잖아! 갑자기 이상한 기사 뜨고 사방에서 날 욕하는 게 말이 돼? 저 새끼가, 받아먹을 건 다 받아먹고 손절 치더니 유명세 이용해서 우리 개자식 만든 거잖아! 용서 같은 소리 하네, 엄마랑 내가 이렇게 매달리는 꼴 보려고, 음침한 새끼…… 악!”
“아악! 지규야!”
‘아.’
무심코 김지규의 정강이를 걷어찼다가 단우는 발을 내렸다. 이모 앞이라는 걸 순간 잊었다.
엎어진 김지규가 다리를 잡고 비명을 질렀다.
“내 다리! 다리 부러졌어! 헌터가 민간인 잡네!”
“어, 어쩌면 좋아. 119……. 병원! 거기 누구 없어요?”
이모가 패닉에 빠져 외쳤다.
“안 부러졌어요.”
단우가 알려 줬다. 이모는 생경한 것을 보듯 눈이 커져서 단우를 쳐다봤다.
“너, 지규 커서도 때렸니? 각성했다고 애 괴롭힌 거야?”
“…….”
단우는 조금 웃음이 나왔다.
‘그걸 때렸다고 하나.’
이단우가 김지규에게 폭력으로 대항했던 건 열다섯 살 때 한 번뿐이었다. 그러나 이모는 그 사건을 ‘이단우가 김지규를 때렸다’고 기억하는 듯했다.
이모가 대단히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그녀는 우선순위가 명확했다. 이제는 단우도 그걸 알았다.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건 가족이었고 이단우는 그녀의 가족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머니도 이모의 가족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단우는 이모가 뭐에 대해 사과를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자신을 보고 있어서 단우는 제가 계속 웃고 있다는 걸 알았다. 미소를 지우고 단우는 물었다.
“한 번 찬 적은 있고, 걔 괴롭힌 적은 없어요. 그거 물어보러 오신 거예요?”
“개새끼야! 거짓말하지 마! 내 팔 부러뜨리고 대학 못 가게 할 거라고 협박했잖아!”
“뭐?”
이모가 파랗게 질렸다.
“너 대학 갔어?”
단우는 순수하게 궁금해져서 물었다.
‘이 새끼 받아 줄 대학이 있나?’
시끄럽던 김지규가 입을 다물었다.
“네 팔 다 붙어 있는데 대학 떨어진 게 내 탓은 아니지. 김지규 대학 붙여 달라고 오셨어요?”
“나는…….”
이모는 혼란스러워했다.
‘그럴 리 없지.’
피곤해서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김지규는 무슨 기사가 떴고 그 일로 그들이 욕을 먹고 있다고 말했다.
‘……이단우 친척인 게 들켜서?’
단우는 잠시 이유를 떠올려 봤으나 지금은 과거가 아니었다. 차우원은 죽지 않았고 이단우는 기자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자신은 아직 차우원을 죽이고 성검을 가졌다는 의혹을 받고 있지 않았다.
“인터넷에 글 쓴 거 너잖아, 개자식아! 지금 좀 잘나간다고 여론 조작하고, 기자들한테 거짓말해서 뉴스 기사 띄웠잖아! 너 이거 안 들킬 것 같아? 어디서 모르는 척이야?”
김지규가 노발대발했다.
“지규야, 좀……!”
‘학대.’
단우는 이모가 말한 단어가 무슨 맥락에서 나왔는지 깨달았다.
“기사가 떴어요?”
“……몰랐니? 어떻게…….”
어떻게 모를 수 있느냐고 묻고 싶은 건가? 단우는 상복을 입고 있었다.
그가 쳐다보자 이모는 말을 바꿨다.
“네가 바빴지. 그래, 몰랐구나. 그럴 수 있어.”
“…….”
“나쁜 기사가 떠서 오해가 생긴 것 같아. 우리가 너에게 못되게 굴었다면서 갑자기 기자들이 집까지 찾아오고, 자꾸 현관문을 두드려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네 이모부는 밖에서 일하는 사람인데, 일도 못 하고…….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를 않아. 네가 말해 주지 않으면…….”
단우는 이모가 원하는 바를 알았다.
“정정 보도 요청할게요.”
“어…… 어?”
용건이 끝났는데도 이모는 계속 바닥에 앉아 있었다.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아니……. 응, 해 주겠니? 정말 고마워. 단우가 얼마나 착한지 이모가 알지.”
‘착한 아이.’
이 나이가 돼서 가슴을 울릴 칭찬은 아니라 단우는 “네.” 하고 대답했다. 그렇게 말한 이모는 여전히 김지규를 보호하듯 끌어안고 있었다.
문득 무언가가 떠올라서 단우는 몸을 굽힌 채 김지규 겉옷 주머니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김지규가 “억!” 비명을 지르고 이모는 화들짝 놀랐다.
‘한 대 팰 줄 알았나.’
김지규 휴대폰에 녹음 어플이 작동되고 있는 걸 확인하고 단우는 발로 밟아 으깼다. 으적, 하는 소리와 함께 휴대폰이 산산조각 났다.
“아니, 이건…….”
‘말이 많다 했다.’
변명하려는 김지규를 무시하고 단우는 이모가 하고 싶어 하던 일을 권했다.
“김지규 병원 데려가세요.”
“단우야, 아니야.”
이모는 깜짝 놀라서 변명했다.
“가세요.”
단우는 그녀를 믿었다. 녹음이야 당연히 김지규 생각일 테니 변명은 필요 없었다.
그가 원하는 건 이모가 나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거였다.
이단우도 어머니도 이모의 가족이 아니었으니 이제 그가 연락할 일은 없을 터였다.
그때 휴게실 문이 열렸다.
“모셔다드릴게요. 밖에 기자들이 많아서 위험해요.”
차우원이 온화하게 말하며 이모를 밖으로 안내했다. 무슨 말을 하려던 그녀는 기자라는 말에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아직도 많나요?”
“네. ……두 분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요. 점점 수가 늘고 있어서요.”
‘지금 나가라’라는 얘기를 차우원은 배려처럼 들리게 했다.
“택시를, 먼저 잡아야 하는데…….”
“차 불렀어요. 지하 주차장 통해서 가시면 괜찮을 것 같아요. 잠시 밖에서 기다려 주실래요? 바래다드릴게요.”
“고, 고마워요.”
이모는 허둥지둥 일어나 김지규를 부축하려고 했다. 물론 다리가 멀쩡했던 김지규는 단우의 눈치를 보며 제 발로 달아났다.
두 사람을 내보내고 차우원은 문을 닫았다.
“단우야, 무슨 일이야?”
‘들었나?’
단우는 움찔했다.
한심한 내용이었다. 이미 차우원에게 한심한 꼴은 충분히 보였으나 여기서 더 떨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신경 꺼.”
차우원은 스스로가 놀라웠다.
‘아, 이런 말이 아프네.’
그는 물론 밖에서 모든 대화를 들었다. 이단우가 말해 주지 않는다고 상황을 모르지 않았다.
이단우의 친척 관계가 평탄치 않을 거라는 느낌은 예전부터 있었다. 단우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사촌과 있었으니까. 당시부터 둘의 관계가 다정해 보이진 않았다.
-이단우 진짜 왜 저래?
그러나 이단우가 친척을 대하는 태도는 이상했다.
이단우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했고 딱히 예외는 없었다.
버스에서 봤을 때도 숨 쉬듯이 사촌을 위협해서 차우원은 ‘얘 뭐지’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이단우가 이상하게 대하고 있는 쪽은 이모다.
그는 누군가에게 물러지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녀에게는 약해졌다. 그러나 이모가 그를 상처 주고 있어서 그들의 대화는 듣기에 끔찍했다.
차우원은 더 듣고 있을 수 없어서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친척들을 강제로 내보냈다.
‘신경 끄라고.’
차우원은 문에 등을 대고 팔짱을 꼈다. 말 한마디 들었다고 가슴이 욱신거리고 있다.
“그래 주고 싶은데, 내가 그러긴 힘들지. 네 일인데.”
“헛소문이 나서 정정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별일 아니야.”
이단우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장례식장 상주로 있는 조카한테 다짜고짜 부탁해야 할 정도의 일인데 별일이 아니야?’
차우원은 머리가 차가워졌다. 그러나 이단우에게 화낼 일이 아니다.
이단우는 선을 그었다.
‘더 묻지 마.’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했다. 이건 차우원이 개입할 일이 아니다.
차우원은 남이 그어 놓은 선은 넘지 않았다. 그 너머를 궁금해한 적도 없었다.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었으니까.
‘업보가 돌아오나…….’
그러나 그는 이단우를 알고 싶었다.
“그래? 별일 아니네.”
“응.”
“다시 자자. 친척분들은 내가 바래다드릴게.”
차우원은 다정하게 말했다. 그는 타인의 믿음을 사는 방법을 알았다.
얼마 못 잔 이단우는 금방 나른해져서 눈을 깜빡였다.
“응.”
그는 여전히 한 손에 차우원의 양복 재킷을 쥐고 있었다.
그걸 이불처럼 덮고 이단우가 잠들었다. 차우원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밖으로 나간 차우원은 화장실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목소리를 들었다.
이단우의 이모가 통화하고 있었다.
통화 상대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수화기 밖으로 새어 나왔다. 차우원은 꺾이는 벽 뒤에 잠시 멈춰 섰다.
[당신 제정신이야? ‘알겠다’고 한다고 그냥 나와? 그놈이 제대로 해명할 것 같아? 계속 붙어 있어야지! 당신 여동생 장례식인데 그놈이 무슨 권리로 쫓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