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길드원들의 얼빠진 반응을 고청은 못 들은 척했다.
“목표는 던전핵 찾기입니다. 보스 몬스터를 죽였는데도 던전이 클리어되지 않는 것을 보아 던전핵이 아직 작동 중인 듯합니다. 보통 던전핵을 보스몹이 지키는 경우가 많으니, 이 근방에 던전핵이 묻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합리적인 의견이 제기되었습니다.”
“……?”
길드원 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저, 부길드장님. 이 근방에 던전핵이 있었다면 이미 파괴되었을 것 같은데요.”
이림은 상명하복이 잘 되는 길드였으나, 고청은 합리적인 의견이라면 귀담아듣는 리더이기도 했다.
‘묻히고 자시고 할 게 있나?’
그 폭발 속에서 던전핵이 살아남았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일 터였다. 지상의 물질로는 파괴할 수 없는 물건이라는 소리가 될 테니까.
“지상에 있었다면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충격에서 보호받은 곳이 있지 않습니까? ……지하 함정 말입니다.”
“…….”
“지반이 무너져 함정 위치는 육안으로 확인하기 쉬울 겁니다. 빠르게 확인하고 넘어갑시다. 그럼…… 작업 시작해 주시길 바랍니다.”
고청의 말이 끝났다.
이림 길드원들은 반짝이는 갑옷을 걸친 채 함정 구덩이로 걸어갔다. 그리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사람이 많으니 진행 속도가 빠르군.’
단우는 묵묵히 삽질하며 생각했다.
“그거 잡고 있어!”
“<플라이>!”
이림 길드원들이 힘쓰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그들은 처음에는 스킬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무너진 함정 구덩이를 공격해서 안에 든 모든 걸 파괴하자는 발상이었다.
함정 구덩이 안에 던전핵이 있다면 그것도 같이 파괴되지 않겠는가?
-근데 저희 함정에 스킬 썼다가 죽을 뻔하지 않았나요?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십니까?
-안전하게 가자고요.
‘지상의 함정에 스킬 썼다가 몰살당할 뻔해 놓고 지하 함정에 왜 또 스킬을 쓰고 앉아 있냐.’는 말을 돌려서 하자 고청은 알아들었다.
덕분에 일대 함정은 전부 갈아엎어지고 있었다. 사용 가능한 스킬은 비살상용으로 제한됐다. 공격용 스킬이라 봐야 흙 파는 데밖에 사용되지 않아서, 고개를 돌리면 흙이 분수처럼 솟고 있는 광경을 어디서든 볼 수 있었다.
공기는 습했고 쨍한 태양이 정수리를 익혔다. 체력 좋은 헌터들도 말이 없어져서, 작업에 필요한 대화 외의 잡담은 오가질 않았다.
모두가 침묵 속에서 사이좋게 땀을 흘렸다.
“……저희 조 끝났습니다.”
“라인 밀었습니다.”
“저희도 끝입니다.”
“여기도 던전핵 없습니다.”
“뱀 사체밖에 없는데요. 아니 몬스터도 땅속에서 익어서 죽는데 던전핵이 버틸 수 있나…….”
해가 중천을 넘어 기울 무렵 곳곳에서 보고가 들렸다. 차우원도 담당한 마지막 함정을 확인하고 단우에게 다가왔다.
“여기도 없는데, 단우야. 거긴 어때.”
“없어.”
“아쉽다. 고생했는데.”
차우원이 위로했다. 그가 땀에 젖은 머리를 뒤로 넘기는 모습을 보며 단우는 고개만 끄덕였다.
‘아니.’
이단우는 목적을 이뤘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잠시 휴식합시다.”
고청의 지시에 따라 그들은 앉아서 쉬었다. 단우도 수분을 보충하고 멍하니 있었다.
<화룡창>의 위력이 너무 강한 걸 확인했을 때 그는 아차 했다. 폭발이 지하까지 영향을 미칠 것 같아서였다. 강울림을 죽여 버리면 어떻게 하지……. 그런 가능성 낮은 걱정이 든 건 잠시였다. 다른 걱정이 머릿속을 차지해서 그때부터 심장이 두근거렸다.
부모님의 유해가 휘말리면 어떻게 하지? 폭발 때문에 땅속에 영영 파묻히거나 허공에 흩어져 버리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반은 무너졌을 뿐이고 함정 속에 이전 공략팀의 흔적은 없었다.
‘여기까지 못 오셨어.’
그럼 어디 계시지?
단우는 입이 말랐다.
“출발합시다.”
그사이 이림 공략팀은 밀림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불타지 않은 남은 필드를 살필 시간이었다.
“단우야, 어디 가?”
“잠깐…….”
단우는 공략팀의 후미에서부터 행렬을 거슬러 올라갔다. 이림 길드원들이 그를 힐끗거렸다. 길드원들의 기색이 이상해서 고청도 무언가가 접근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단우 헌터?”
“부길드장님. 방금 함정 지나치셨는데요.”
고청의 표정에 의아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군요.”
“마법사가 <함정 간파> 하지 않았나요. 저희 함정 깨면서 지나가는 걸 전술로 삼은 줄 알았는데요.”
고청이 이림 마법사에게 함정 간파를 지시하지 않았을 리 없다. 실제로 단우는 행렬 뒤에서 따라가면서 마법사들이 계속 스킬진을 띄우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이림은 주변 지형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알면서 지나쳤어.’
고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단우 헌터.”
“예.”
“아까도 보지 않았습니까? 폭발 지대의 함정을 살피는 데만 낮 시간이 다 지나갔습니다. 그곳의 함정은 이미 제 역할을 상실한 상태였는데도요.”
고청이 설명했다. 그는 이단우에게 여러모로 감명을 받았으나, 이렇게 보니 역시 어린 헌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경험 부족이 드러나긴 하는군.’
이론 교육을 받지 못한 단점이 보인다. 고청은 재능 넘치는 후배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기로 했다.
“<차우원 팀>이 보스몹을 처치한 건 대단한 업적이고, 이단우 헌터가 보스룸 근처에 던전핵이 있으리란 추측을 한 것도 훌륭합니다. 지하 함정도 필드에 속하니 확인해 봐야 한다는 지적은 일리가 있었습니다. 결과가 아쉽기는 했지만요. 그런데 이제 폭발 지대를 벗어나 다시 밀림 필드로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이곳은 이제 몬스터의 영역입니다. 던전핵은 보통 보스몹, 혹은 정예 몬스터가 보호한다는 게 정론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정예 몬스터가 지키는 곳에 던전핵이 있을 거라고요. 함정 속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역시 이단우는 이해력이 좋았다.
밀림 지대의 함정을 일일이 파괴하며 가는 건 시간 낭비다.
고청은 이단우가 ‘감사합니다’ 따위의 말을 한 뒤 다시 후미로 돌아가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단우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함정을 깨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여기서 백 명이 죽었으니까요.”
“위험한 던전이니 만전을 기하자는 얘기라면 지금도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미 함정 패턴임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뻔히 아는 함정에 걸릴 만큼 이림 공격대의 실력이 형편없지 않습니다. <차우원 팀>도 마찬가지겠죠.”
고청은 적당히 말을 마무리했다.
‘그만해야겠어.’
이단우는 어리고 영리하며 확신에 넘쳤다. 스스로의 판단을 신뢰하고 있으니 공략팀 리더의 영역을 계속 침범하는 것이다.
그러나 필드에서 공격대원이 리더의 판단에 의문을 제기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청은 본래 원칙을 지키는 성격이었다. 아무리 이단우의 재능이 기껍다고는 해도, 자신이 그를 이렇게나 받아 주고 있다니 이상했다.
‘행렬을 이탈했을 때부터 본래 자리를 지켜 달라고 경고했어야 했는데.’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순간 들지 않았다. 이단우가 전략을 수립하는 게 자연스럽고 옳은 일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왜지? ……이상하군.’
물론 그건 자연스럽지도 옳지도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고청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단우 헌터. 필드에서 공격대원은 리더의 전략에 따릅니다. <차우원 팀>은 이림 소속이 아니지만 던전을 함께 공략하겠다고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뒤로 가주십시오.”
이단우는 잠시 고청을 보더니 자리로 돌아갔다.
‘할 말이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기분이 들었으나 고청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림 마법사에게 지시했다.
“<함정 간파>로 안전한 경로를 계속 확인해 주십시오. 마력 반응은 여전히 세 시 방향입니까?”
“예. 다수의 마력 반응이 감지됐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거점을 발견한 것 같군요.”
고청이 대답했다. 라는 비극적인 던전을 최단기간에 클리어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청이 잠깐 잊은 사실이 있었다.
-이림과 차우원 공격대는 이원 체제로 던전을 공략한다.
<차우원 팀>이 고청의 지시에 따르는 건 의무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순간 지축을 뒤흔드는 충격과 함께 발밑이 쑥 꺼졌다.
고청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차우원 팀>이 함정을 건드렸다!
‘……이단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