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그리고 성물의 자격 요건은 이랬다.
-제한: <종말>을 막을 자.
종말을 막고자 하는 의지와 능력이 있는 인간을 주인 삼아서, 그 주인의 목표를 이루어 주는 물건인 셈이다.
‘요건이 그따위면 제대로 뽑아야 할 거 아니야.’
그런데 이 성물의 선구안이라는 게 형편없었다. 차우원 다음 주인으로 이단우를 고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성물의 주인이 된 헌터가 꼭 <최후의 던전> 공략에 성공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었다.
단순히 그뿐만 아니라 또 다른 문제를 일으켰다.
인간은 유혹에 약한 생물이 아닌가?
종말을 막을 정도의 의지와 능력이 있는 헌터가, 다른 욕망을 품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지금은 대부분 모르지.’
이제껏 <종말>을 막은 영웅은 전부 정부 측 헌터였다. 애초에 이전에는 그렇지 않은 헌터가 없었다.
몬스터를 막는 게 지상 최대의 과제인 시점에, 길드니 각성자의 보호니, 헌터의 권리 같은 건 태평한 소리였다. 모든 각성자는 예외 없이 정부의 명령에 따라야 했다.
다시 말해 정부는 ‘영웅의 요람’이라는 위치를 놓쳐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헌터들이 독립해 길드를 세우고 그 길드가 힘을 갖기 시작하면서, 정부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 상황에 정부 소속이 아닌 차문경이 성물을 얻었다. 그녀가 영웅이 된다면 길드의 힘은 얼마나 강대해질 것인가?
정부는 그 사태를 원치 않았다. 욕심에 눈이 멀어 젊은 영웅을 압박했다.
이게 길드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단우는 정부 측에서 밝히지 않은 정보를 하나 알고 있었다.
‘성물의 주인이 벌인 학살.’
성물은 문제를 만든다. 성물이 주인의 염원을 이루어 준다는 말은, 말 그대로였다.
다른 욕망은 전혀 없이, <종말>의 종식만을 바랄 헌터가 성물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단우는 그런 사람을 알고 있었다.
‘차우원.’
이단우는 정부가 차문경을 신뢰하지 않아서 <성물 쟁탈전>을 제안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차문경은 당시 이미 대단한 헌터였다. 전성기의 헌터 가운데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결혼과 출산으로 몇 년간 현장을 쉬었으나, 정부의 우려처럼 역량이 떨어진 상태는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수십 개의 던전을 연달아 클리어하고 <성물>을 얻어 냈겠는가?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어린 자식들을 두고 <종말>을 막겠다고 나선 데서 책임감과 자기희생을 증명했다.
차문경은 영웅의 자질이 있었다. 과거 단우가 차우원을 보며 느꼈듯이, 모든 사람이 그녀를 보며 그렇게 느꼈을 터였다.
그러나 정부는 <성물 쟁탈전> 없이 성검의 주인이 정해질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차문경에게 성물을 내놓을 것을 요청했다.
차문경이 반발하고 그에 정부가 보복하면서, 차문경을 주축으로 한 젊은 헌터들과 정부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성물만 빨리 발견됐다면 그 사태는 안 갔겠지.’
쟁탈전이 벌어졌다면 승자는 차문경이 됐을 테니까. 정부는 대놓고 뻗댈 수 없었을 것이다.
단우는 그 사태가 재발되지 않도록 할 수 있었다.
그는 이번 대 성물이 어디서 발견되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
이단우가 부모님과 스승님을 잃은 그 던전에서 과거 차우원은 성물을 발견했다.
단우는 그걸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줄 터였다.
“공격대 이름 걸고 단일 공략하자. 연차 낮아서 <성물 쟁탈전>엔 꼭 끼워 주겠다는 개소리는 안 들어야지.”
“우리끼리 가능할까?”
강울림이 침을 삼켰다.
단우는 그가 늘 신기했다.
‘일 년 만에 근력 A+ 찍은 놈이 뭘 긴장하는 거지.’
자신은 재능이 있어 본 적 없어서 이 물만 줘도 자라는 천재들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가?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어.”
“아니,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말고…….”
“우리가 처음 깬 던전 A급이었어. 너 거기서 죽을 뻔했어?”
“그렇진 않았는데, 그때는 청연이랑 같이 공략했고…….”
“어. 우리끼리 들어가도 안 죽어.”
“……!”
소서정은 옆자리의 강울림이 ‘그렇구나!’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봤다.
‘왜 납득하는데!?’
소서정은 멍청한 강울림 대신 타당한 의문을 제기했다.
“근데 지금 길드들 죄다 던전 공략 들어갔잖아. 전처럼 우리한테 의뢰도 안 들어올 텐데. 다른 길드에 꼽사리 안 끼면 우리끼리 무슨 수로 던전 공략하게? 뭐, 비밀이 있으면 지금이 공유할 적기긴 한데.”
“무슨 비밀?”
이단우가 눈썹을 올렸다.
“그, 뭐냐, 흔히 있잖아? 사실 숨겨 둔 땅이 있다든가. 알고 보니 어느 길드의 후계자인데 신분을 숨기고 있었다든가.”
“너 그랬어?”
강울림이 놀라서 이단우를 돌아봤다.
“헛소리 말고. 공략권 사야지.”
“아니, 그니까 지금 무슨 수로 공략권을 사?”
소서정은 답답해졌다!
‘고민되네, 정말!’
출근 전 그는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이림에서 온 연락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까마득한 선배이자 상사였던 부길드장 고청. 이림에 있을 때 소서정은 당연하게도 고청과 사적인 대화를 나눠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헉, 부길드장님. 아니, 선배님!
[소서정 헌터. 활약을 잘 들었습니다. 건강상 이유로 길드를 나갔다던데, 독립팀에서 훌륭히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안심이 되는군요.]
고청이 심장 철렁할 소리를 해서 잠시 식은땀을 흘렸으나 그의 용건은 그게 아니었다.
[<기희윤 팀>의 새 거점을 파괴하고, 그곳에서 민간인 인질 다수를 구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게 사실입니까?]
-예, 그렇기는 한데요…….
[확인 감사합니다. 그리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다른 자리에서 같은 증언을 해줄 수 있습니까?]
-어, 제가 팀원이어서요! 증언은 중요한 일이니까, 저희 팀장님한테 물어보고 답변드리겠습니다!
소서정은 위기를 잘 헤쳐 나갔다!
‘어디서 증언 시키려고?!’
그는 부담을 지는 건 질색이었다!
그런데 고청이 뜻밖의 말을 했다.
[아, 그렇군요. 이 말씀을 먼저 못 드렸군요.]
-예?
[소서정 헌터의 활약은 인상 깊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소서정 헌터가 건강 악화로 이림을 떠난 건, 저희로서는 대단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소서정 헌터만 괜찮다면 이림에 언제든 복귀할 수 있게 저희가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물론 공격대 자리입니다.]
-……!
이림에서 1년 차 신입에게 공격대 자리를 준다.
말이야 쉽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소서정은 금방 사태를 파악했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니었구나.’
차우원과 이단우의 범상치 않은 커플 싸움에 소서정은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지트에 앉아 있던 차우원이 갑자기 튀어가 버려서 옆에 있던 강울림까지 휘말리고 말았다.
-이단우가 큰일 났나 봐!
-아니, 아닐걸? 야! 어딜 가! 아악, 진짜!
미운 정도 정이라고, 강울림 혼자 그 풍파를 맞이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강울림을 따라서 택시에 오른 소서정은 ‘저 앞차 따라가 주세요.’ 같은 영화 속 대사를 처음으로 쳐 봤다.
그리고 도착한 곳에서 연기에 휩싸인 건물을 목도했다.
그 뒤는 정신이 없었다. 소서정은 화계 마법사였으나 전 속성을 일정 수준 이상 다뤘다. 이단우의 조언도 있어서 온갖 잡다한 스킬을 익혀 둔 채였다.
연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대단위 마법을 펼쳤다. 건물 위로 시커먼 먹구름이 지더니 비를 뿌렸다. 본래 스킬의 위력대로라면 폭우가 쏟아져야 했으나, 본 계통과 정반대에 있는 수계 마법을 그만한 숙련도로 펼칠 수 있다면 소서정은 이미 대마법사일 터였다.
열심히 비를 쥐어짜며 마나 포션을 들이붓고 있는데 강울림이 건물 안에서 사람들을 구조해서 나왔다.
그가 안을 들락거릴수록 소서정의 발치를 뒹구는 사람들이 늘었다. 소서정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잠시 뒤 이단우를 업고 나온 차우원이 말했다.
-여기 <기희윤 팀> 사업장이야. 기희윤 본인도 건물 지하에 있었는데 도주했어. 기희윤 본인, 혹은 그 측근이 대단위 이동 스킬 보유자야. 조사 나오면 전해 줘. 먼저 갈게. 부탁해.
‘S급 수배자 기희윤!’
기희윤을 잡을 뻔한 사건이다. 보통 일일 리 없었다. 그런데 고청의 반응은 그 정도가 아닌 듯했다.
‘뭔가 더 있는데.’
이림 부길드장이 달려들 중대한 뭔가가…….
물론 이런 건 소서정의 전문 분야가 아니었다.
‘이단우한테 물어보면 바로 답이 나올 텐데 말이야.’
하지만 물어보는 순간 이단우는 다른 것도 눈치채지 않겠는가? 그가 이림에 헤드 헌팅을 당했다는 사실이라든가…….
소서정은 이단우의 눈치를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사실 그는 지금 자신이 고민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이림 공격대 일원이 되는 거라고!’
성물 출현 예언이 내려왔다. 그 말은, 곧 <종말>이 도래할 거라는 뜻이었다.
소서정은 영웅이 되어 칭송받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1년 차 독립팀, 이제 곧 2년 차가 될 독립팀의 스물한 살짜리 헌터들이 <종말>을 막을 확률은 없다.
물론 성물이 출현한다고 바로 종말이 시작되는 건 아니었다. 어쩌면 몇 년 뒤에 시작될지도 모를 일이나…….
‘한 달 뒤일지도 모르지.’
몇 년만 시간이 있었어도, 소서정은 아무 의심 없이 이 팀에 남았을 것이다.
이 팀은 훌륭했으니까.
팀원 누구도 구멍이 없고 팀 분위기도 좋다. 소서정에겐 숨 쉬는 것만큼 익숙한 견제나 정치가 없었다.
하지만 이 팀은 신생이었고 이림 공격대는 지금 바로 <최후의 던전> 공략에 투입해도 문제없는 정예들이었다. 그 일원이 된다면 소서정은, 높은 확률로 영웅이 될 수 있다.
이 독립팀은 자체 던전 공략도 불가능하지 않은가?
이단우야 늘 그렇듯 자신만만했으나 근거가 없었다.
“모든 길드의 최우선 목표가 던전 공략이 됐는데, 자기 손에 쥐고 있는 공략권을 팔아넘길 길드가 어디에 있어?”
‘이것만은 이단우도 무리지.’
그런데 이단우가 쉽게 말했다.
“팔게 해야지.”
“……어떻게?”
“이 시기니까 팔 곳이 있잖아. 너라면 너네 구역에 자기 길드 힘으로는 절대 못 깰 던전이 있으면 어떻게 하겠어?”
“다른 길드랑 공조를 해서 깨겠지?”
“어느 길드랑? 5대 길드 정도가 아니면 도움도 안 될 텐데, 5대 길드랑 공조해서 깨 봤자 보상은 다 상대가 가져가잖아.”
문득 차우원이 탄식했다.
“아까 A급 던전 얘기한 게 예시가 아니었구나.”
“설마.”
그가 말해서 소서정도 깨달았다.
‘미친 건가?’
“ 공략권 살 거야. 싸게 넘길걸.”
이단우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야 그렇겠지! 거기서 몇이 죽었는데!”
소서정은 이제껏 하던 고민을 모두 잊고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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