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이단우는 정말로 좋지 않았다.
‘아니야.’
-단우야, 더 가치 있는 걸 우선하라며.
차우원이 말한 순간부터 심장이 뛰었다. 실은 차우원이 도착한 순간부터 의아했다.
기희윤은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정신계 헌터였다. 그 말은 그가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법을 안다는 뜻이었다.
정신계 스킬은 강력했다. 너무 강력해서, 그 제한 조건이 까다로웠다.
<매혹>의 효과로 사람들은 기희윤을 보면 호감을 느끼고 그의 말에 쉽게 현혹됐으나 타인을 홀리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기희윤의 <매혹>은 사람을 뒤흔드는 데서 진가를 발휘했다. 사람의 약점을 찌르고 그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위로하는 것이다. 상대는 그 순간 기희윤을 절대적인 존재로 느끼고 의지하게 된다. 기희윤의 인형이 된다.
-내가 너희 팀 조사를 좀 해 봤거든, 다들 영웅 지망생답게 착하고 훌륭하더라! 죽어 가는 사람들 보면 안 구하고 못 배길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과연 기희윤은 우수한 헌터여서 <차우원 팀>을 잘 알았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단우는 차우원을 포기했다.
차우원은 결코 눈앞에 있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다. 단우는 알아서 탈출로를 찾아야 했다.
기희윤은 자신을 죽이지 않겠지만.
그런데 차우원이 왔다.
단우는 순간 안도를 느꼈으나 그래서는 안 됐다.
‘아니야.’
그건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이단우는 과거로 돌아왔다. 어린 차우원은 아직 순진했다. 이단우가 리더 행세를 해도 웃으며 받아 줬고 스물네 살의 차우원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행동에 동참했다.
그는 이단우가 아는 차우원과 조금 다른 사람이었으나 결정적인 부분에선 같았다.
그는 불쌍한 약쟁이 팀원을 버리지 못했다. 차우원은 차우원이었다.
-가치 있는 걸 우선해.
단우는 그에게 세뇌했지만.
차우원은 영웅이었다. 이단우는 실은 그가 변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단우가 그를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고는.
‘내가 뭘 한 거지?’
한기가 올라와서, 이단우는 계속 떨고 있었다.
무언가 완전히 잘못됐다. 돌이킬 수 없게, 망가뜨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가치 있는 걸 우선하라며.
차우원은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사람인데.
민간인들이 무사한 걸 보고서도 떨림은 멎지 않았다.
‘다행이야.’
생각했으나 이내 의문이 들었다.
정말로 다행인가? 상황은 완전히 잘못됐는데.
그 와중에 힐링 포션이 체내를 돌았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파인 팔목에 새살이 돋았다. 언 것처럼 둔해진 몸에 감각이 돌아오며, 그곳이 진저리 쳐질 정도로 간지러워졌다.
포션의 효과가 몸에 퍼질수록 멍든 가슴과 등과, 어깨와 무릎이 차례로 떨렸다. 근거리 딜러인 이단우를 제압하기 위해 기희윤이 온 힘을 다해 짓눌러 놔서, 속까지 피멍이 깊게 들었다.
벌레가 몸 안을 기어가는 듯했다. 체온은 낮은데 회복되는 곳만 근질거리고 뜨거워졌다. 견딜 수 없어서 단우는 차우원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지금껏 괴로우면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이 사람이 누구지?’
단우는 의문이었다.
‘내가 차우원을 어떻게 만든 거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단우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온기가 필요했다. 그가 악몽을 꾸면 차우원은 어느새 일어나서 그의 머리를 쓸어 줬는데.
그런데 차우원이 단우의 손을 떼어 냈다.
“안 돼.”
“……?”
“병원에 가기 싫으면 아지트로 데려다줄게. 그래도 힐러는 만나 보자. 너 쉬고……. 괜찮아지면.”
‘괜찮아진다’는 게 뭘 말하는 건지 단우도 알아들었다. 그는 조금도 흥분하고 있지 않았는데 하반신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수치스러워할 정신도 없었다.
차우원이 단우를 그대로 택시에 밀어 넣어서, 단우는 어리둥절해졌다. 차우원은 소서정에게 뭐라고 말했다. 그리고 택시 기사에게 주소를 불렀다. 단우와 함께 뒷좌석에 오르지는 않았다.
그가 앉지 않고 차 문을 닫으려 해서 단우는 붙잡았다.
“어디 가?”
“보조석에.”
“왜?”
‘왜 옆에 안 앉는데?’
차우원이 차분하게 말했다.
“지금 내가 옆에 있는 건 안 좋을 것 같다. 그래도 사무실까지는 데려다줄게. 조금만 참아. 마력 구속구도,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가지 마.”
단우는 온몸으로 잡았다. 몸이 이렇게 떨리는데 차우원이 왜 안아 주지 않는지 의문이었다.
차우원은 도움을 요청하는 놈을 외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아닌가?’
차우원이 어떤 사람인지 단우는 알 수 없었다. 대책 없이 좋은 놈을 이단우가 망쳐 버렸다.
단우는 자신이 누구랑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차우원이 단우의 손을 다시 하나씩 떼어 냈다. 단우는 절벽에 걸치고 있는 손이 하나씩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잠깐, 단우야……. 지금은 잡지 말자.”
“왜…….”
“내가 도와주면 넌 계속 할 거지. 난 약에 취한 너랑 하기 싫어. 이제 이런 건 그만두자.”
단우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네가 무슨 일로 현실 도피하고 싶어 하는지 난 모르겠는데, 네가 널 망치는 데 협력하고 싶진 않다. 누구라도 좋은 거면 아무나랑 해. 난 아니니까.”
“아니야…….”
단우를 완전히 밀어낸 차우원이 일어났다. 그가 다시 멀어져서 단우는 추웠다. 다른 의미로 몸이 떨렸다.
‘가지 마.’
이단우가 취해 있는데 차우원이 가려고 했다.
화를 내다가도, 단우가 스스로를 주체 못 하면 차우원은 달래 줬는데.
눈앞이 뿌옜다. 단우는 신경질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런 게 아니었다. 누구라도 상관없었으면 단우는 기희윤 앞에서 버티고 있지도 않았을 터였다.
차우원이 아니면 누구도 필요 없는데…….
‘아.’
단우는 깨달았다. 그는 약 기운에 미칠 것 같은 게 아니었다. 실은 감각이랄 게 없어서 성감도 올라오지 않는데 차우원을 붙잡았다.
약 때문에 차우원이 필요한 게 아니라, 차우원을 붙잡을 구실이 필요했다. 그랬다는 걸 지금 알았다.
그런 자신이 역겹고 기분 나빴다.
‘차우원을 바꾸겠다고.’
그렇게 다짐했으면서 누구보다 차우원을 이용하고 있던 건 이단우였다. 차우원이 누구보다 바뀌지 않길 바라고, 바뀌지 않을 거라고 믿은 사람은 자신이었다.
차우원은 완전했는데 이단우가 그를 망쳐 버렸다.
단우는 스스로의 머리를 날려 버리고 싶었다. 그를 망가뜨린 자신을 벌하고 짓누르고 싶은데도, 차우원이 ‘그런 건 다른 사람이랑 해.’라고 밀어내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차우원이 이대로 단우를 놓아 버리는 건.
“아니야.”
단우는 차 문 사이에 손을 끼웠다. 차우원이 문을 못 닫게 하고 그를 다시 붙잡았다.
“너 아니면 안 했어. 언제든, 너 아니면 싫어. 왜 그런 말을 해? 난 너 아니면 안 할 건데…….”
“단우야.”
손이 떨려서 차우원을 붙잡는 것도 어려웠다. 단우는 차우원의 손을 끌어다 얼굴에 문댔다. 손바닥에 입을 맞추고 품으로 끌어당겼다.
차우원은, 제정신이 아닌 이단우를 외면한 적이 없었다. 꼴사납고 안쓰럽게 굴고 있으면 품에 안고 머리를 쓸어 줬다.
그가 이단우를 같은 침대에 가둬서 밤에 잘 수 없게 됐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게 싫지 않았다. 차우원이 아니라도 이단우는 밤에 자지 못했다. 늘 악몽을 꿔서 눈을 감는 것조차 두려웠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잠은 오지 않았고 혼자 누워 있으면 심장이 뛰었다.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런 이단우를 차우원이 끌어안고 붙잡아서, 이단우는 닻을 내리듯 그곳에 있을 수 있었다. 자신이 있는 곳이 현실이고 차우원이 곁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차우원의 심장 소리가 들려서. 맞닿은 몸으로 그의 심박이 들려서 같이 차분해졌다. 차우원이 잠들고 새벽이 되면,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단우도 잠들 수 있었다…….
차우원이 한숨을 쉬었다. 단우는 심장이 떨어졌다.
“…….”
그 순간 차우원의 입술이 단우의 입술에 닿았다.
입은, 아직도 감각이 없었다. 무엇이 닿았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따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
차우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이 새까매서, 단우는 저도 모르게 물러났다. 차우원은 잡지 않았다. 다만 단우가 이동한 만큼 성큼 다가섰다.
차우원의 머리는 젖어 있었다. 사실 두 사람 다 젖었는데 단우의 눈에는 차우원의 머리카락 끝에서 맺히는 빗방울만 보였다. 거리가 그만큼 가까웠다. 단우는 거의 눕다시피 하고 있었다. 얼굴로 빗방울이 떨어져서, 그 느낌에 잠깐 소스라쳤다.
차우원의 뒤로 문이 닫히는 게 보였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차체가 잠깐 떨렸다.
제 무딘 감각으로 그런 것들이 느껴질 리 없는데, 분명히 느껴졌다. 몸이 다시 움찔 떨렸다. 심장이 바닥을 쳤다. 또 입술이 붙고…….
떨어졌다.
‘어?’
차우원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출발해 주세요.”
그리고 다시 입술이 맞닿았다.
* * *
아지트에 도착하자마자 둘은 침실로 올라갔다. 단우는 걸으려고 했는데 발이 마음을 따르지 못했다.
마력 구속구는 착용자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었다. 발목을 이은 쇠사슬이 짧아서 보폭을 조절할 수 없었다. 급하게 걷다가 고꾸라질 뻔한 단우를 차우원이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안아 들었다.
“잠깐…….”
“걷기 힘들지. 올려 줄게.”
하고 차우원이 다시 입을 맞춰서 단우는 항의도 하지 못했다.
차우원은 침실 욕조에 단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신도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단우는 그에게 밀려 욕조 안에 등을 대고 거의 눕다시피 하게 됐다.
샤워기에서 따듯한 물이 쏟아져 단우를 적셨다. 얼굴부터 세찬 물에 맞은 단우가 인상을 쓰며 고개를 흔들자, 차우원이 잠깐 웃었다. 그리고 다시 입 맞췄다.
눈 깜짝할 사이 바지가 내려가서 이중으로 움직임이 제약당했다. 입술을 떼지 않고 차우원은 아래를 쓸었다.
그렇다는 사실을, 알 수만 있었다.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단우는 아주 무뎠다. 이 빌어먹을 약이 아래를 세워 놓고 감각은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다시는 안 해.’
이 상태로 던전에 들어가면 사망 아닌가?
단우는 재차 다짐했으나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차우원의 손길이 아주 부드러웠다. 발가락은 움츠러드는데, 제대로 된 곳엔 닿지 않았다.
샤워기 물줄기도 ‘뭐가 피부에 붙고 있구나’ 정도로 느껴지는 상태인데, 그런 손길에 자극이 될 리가 없다.
단우는 미칠 지경이었다.
“좀…….”
“좀?”
“좀 더 세게…….”
차우원이 잠깐 멈칫했다.
“단우야, 너 다쳐.”
그러더니 손길이 더 진득해졌다.
“아니…….”
이 자식은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는단 말인가? 단우는 순간 열이 올라 차우원의 가슴팍을 쳤다.
그 반동으로 차우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단우는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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