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기희윤은 이단우가 수치심에 떠는 모습을 봤다.
‘와…….’
뭐지?
그는 이단우에게 궁금한 게 많았다.
어떻게 자신을 방해했는지. 그 모든 사건의 배후에 자신이 있다는 걸 어떻게 추측해 냈는지. 자신의 새 영업장은 또 어떻게 알았는지.
‘약국을 새로 연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찾아온 거야?’
내 패턴을 읽었나? 추측인가? 예언 스킬이라도 있나?
할 말이 많았는데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기희윤은 이단우의 뒷조사를 가볍게 한 뒤 ‘앞으로의 이단우’를 알기 위해 사람을 심어 뒀다. 이단우가 서식하는 <차우원 팀> 사무소 주변은 치안이 좋은 구역이 아니었다. 누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도 ‘그런가 보다’ 하는 곳이어서 감시역을 심기는 어렵지 않았다.
물론 그 감시역들의 역할은 이단우의 특별한 정보를 알아내는 게 아니었다. 이단우의 외출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간의 이단우는 정말 파악하기 쉬운 인물이었다…….
-이단우가 외출했다고 합니다.
-응, 또 편의점이래? 걔 편의점 음식 좀 그만 먹으라고 해. 저러다 시체도 안 썩는다?
-아니요. 그게…… 편의점으로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택시를 타고 이동 중입니다. 목적지는……. 과한 추측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쩐지 저희의 새로운 약국 지점으로 향하는 듯합니다.
-뭐!
비서의 보고를 받고 기희윤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즉시 새 약국 지점으로 향했다.
이단우는 사무소와 던전을 오가는 단순한 생활을 하는 인물이라 틈이 없었다. <차우원 팀>의 사무소는 방어 시설이 갖춰져 있는 데다 다른 팀원이 함께 있을 때가 많아서 습격 장소로는 걸맞지 않았다.
그런데 본인이 직접 기희윤의 품 안으로 들어와 준다지 않는가?
기희윤은 설레서 비서에게 물었다.
-중독 끊어 본 적 있어?
-주인님을 만나고 금연했습니다. 주인님께서 드실 음식을 담배 만진 손으로 만들 수는 없으니까요.
-뭐야, 애정이 느껴지네! 하지만 이단우는 사랑을 하고 있지 않은걸. 그걸 어떻게 참겠어?
-예. 잘 참던 사람이 타의에 의해 약을 하게 되면 더 견디기 힘들 겁니다.
비서는 잘 알아들었다.
이 충직한 비서는 과거 병든 아내를 십 년쯤 수발하던 남자였다. 기희윤은 언제나 헌신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본인에게 없는 미덕이기 때문이었다.
병원에서 처음 만난 남자는 기희윤과 십 분간 대화한 뒤 자신이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아내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을 뿐이며, 이제는 놓아줘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그럴 수 있도록 기희윤이 이끌었다.
남자가 아내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그는 외로워서 아내를 붙잡고 있을 뿐이다.
……뭐 그런 소리를 지껄였으나,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기희윤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남자도 그렇게 느꼈다는 게 중요한 점이었다.
기희윤의 <매혹>은 그런 식으로 작동했다.
‘다들 힘들다니까.’
사람의 내면은 얼마나 무르고 파고들기 쉽단 말인가?
기희윤에게 사랑을 맹세한 남자는 지금 자신의 곁에서 헌신의 미덕을 발휘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이단우 헌터가 약을 예상보다 오래 참은 듯합니다. 상급 헌터의 저항 스탯을 고려해 양을 조절했는데…….
양 조절을 잘못했는지 이단우를 기절시키긴 했지만.
그건 나쁘지 않았다.
기절한 이단우는 어린애 같은 얼굴이었다. 기희윤은 자신을 방해한 헌터가 어떻게 생겼는지 이미 조사를 통해 알고 있었으나, 직접 본 얼굴은 증명사진과 전혀 달랐다.
‘카메라 성능이 나쁜 게 아닌가?’
그건 알 수 없었으나 이단우의 눈은 나쁜 게 틀림없었다. 그 사진을 그냥 증명사진으로 쓰다니. 미적 감각에 문제가 있다.
기절한 이단우를 보고 있자니 기희윤도 잠이 왔다.
기희윤 앞에서 얼굴도 안 가리고 자는 이단우라니 귀한 모습이었다. 지금 자면 좋은 꿈을 꿀 것 같은데……. 그를 몇 달간 괴롭히던 악몽이 아니라.
‘……응?’
뭔가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았나?
그러나 금방 눈꺼풀이 감겨서 기희윤은 오래 생각하지 못했다.
기대대로 그는 악몽을 꾸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꿈을 꿨는데, 고아원 시절 친구의 장난감을 빼앗았을 때만큼이나 설레는 꿈이었다.
‘꿈이 아니야.’
기희윤은 확신했다.
그건 기억이었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뜨면서도 기희윤은 그걸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눈앞에 이단우가 있었다.
‘와…….’
이단우는 약간 취해서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섬세한 속눈썹이 느리게 움직일 때마다 기희윤은 속이 뒤틀렸다.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도 알 수 없는데…….
반사적으로 기희윤은 <인형화>를 발동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아, 당연하지.’
<인형화>의 발동 조건은 ‘상대가 기희윤에게 호감을 느낄 것’.
기희윤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을 미소 짓게 만들 수 있는 <매혹>의 소유자였으나, 모든 스킬이 그렇듯 이것도 저항이 높은 상급 헌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밑 작업이 없다면.
저항 스탯은 무적이 아니어서 헌터 자신의 정신이 흔들리면 따라서 약해졌다. 며칠 굶은 헌터가 제 신체 스탯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리고 사람의 약점을 찾아내는 건 기희윤의 특기였다.
‘약쟁이 이단우.’
영리하고 방해가 되고, 몹시 탐나는 이단우에겐 문제가 있다.
‘약 그 자체가 문제지.’
기희윤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단우가 약을 한 이유야 그가 알 바 아니다.
잘 보이는 약점을 기희윤은 생글생글 웃으며 밟아 줬다.
“냉정한 척하네, 이단우. 그럴 상태가 아닐 텐데? 누구라도 안아 줬으면 하잖아.”
이단우의 귀가 확 달아올랐다.
‘우와아…….’
못 참겠어서 기희윤은 테이블에 뺨을 찰싹 붙였다.
이단우를 뒤흔들려고 한 말인데 자신이 두근거리고 앉아 있다.
저 얼굴을 왜 숨기려 드는 걸까? 그냥 노려보고만 있어도 자신은 손을 뻗고 싶어질 텐데.
‘안 되지, 안 돼.’
기희윤은 스스로를 다스렸다. 그러나 들뜬 목소리가 빠져나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단우야, 그만 참고 나랑 좋은 거 하자. 그렇게 참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어차피 너 끝났어. 네 팀에서 약쟁이를 둘 리가 없잖아.”
“닥쳐…….”
“오늘 저녁 9시 뉴스 장식하게 해 줄까? ‘<차우원 팀>의 근거리 딜러 이단우 사실 약쟁이였다.’ 어때. 취해서 예쁘게 구는 영상 하나 인터넷에 올리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
“인생이 괴롭고 힘들어도 좀 참아 보지 그랬어. 약 같은 걸 하니까 엘리트 커리어도 끝장나고 팀원들에게 버림받잖아.”
기정사실처럼 말하자 이단우의 눈이 커졌다.
‘아, 동요한다.’
“아니야…….”
“아니야? 단우야, 내 말 안 들려? 대답 좀 해. 나 혼자 떠드는 거 외롭다.”
이단우는 말이 없었다. 자존심 강하고 예민한 얼굴이 풀이 죽어 눈까지 젖어 있다.
‘아하하, 약점이 팀원이네.’
키워드는 ‘버림받는다’?
아래가 오싹오싹해서, 기희윤은 테이블에서 뺨을 떼고 몸을 다시 세웠다. 이단우에게 바짝 붙자 비서가 “주인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기희윤은 신경 쓰지 않았다.
“불쌍한 이단우. 또 버림받겠네. 부모님도 곁에 남아 주지 않고 친척들도 널 버렸는데, 이제 팀원들한테까지 버려지는구나? 안됐다. 이렇게 흥분해서, 기껏 약 참은 것도 다 물거품이 돼 버리고…….”
기희윤은 이단우의 턱을 억지로 들어 고정시켰다. 입술을 꼭 깨물고 참는 얼굴이 보였다.
‘아.’
기희윤은 다시 속이 뒤틀렸다. 이 얼굴이 무너지는 꼴을 봐야겠는데…….
그는 이단우가 멀쩡한 척하는 게 예전부터 싫었다.
‘……예전?’
“……그래도 괜찮아. 망가져도 돼. 내가 받아 줄게.”
위화감은 잠시였다.
정말이냐고 묻는 듯한 표정으로, 이단우가 그를 올려다봤다.
“그럼, 단우야. 어차피 나 없이 못 살겠잖아. 행복하게 해 줄게.”
속내를 숨기고 기희윤은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확히는 약 없이겠지만…….
그게 그거 아니겠는가? 이단우는 기희윤을 거치지 않고서는 약을 구할 수 없을 테니까.
기희윤은 필요하다면 시장에 도는 모든 종류의 마력 촉진제를 거래 중지시킬 수 있었다.
사회적으로 매장된 이단우는, 괴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약이 필요하게 될 터였다. 기희윤은 이단우를 살아 있게 만들 수 있었다.
‘살아 있게.’
어쩐지 기시감이 들어서 기희윤이 고개를 갸웃하는데, 뭔가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
하는 순간 기희윤은 팔이 꺾인 채 테이블에 깔려 있었다.
철컥!
금속제 마력 구속구가 바닥에 떨어지며 소음을 냈다. 그걸 내던진 건 기희윤의 위에 올라탄 이단우였다.
‘어떻게?’
기희윤이 놀라는데 이단우가 숨을 헐떡였다.
“개소리 길게 하네. 다리 부러졌어? 코앞에 다가오는데 한세월이야.”
기희윤은 오싹오싹했다.
“우와, 단우야…….”
“주인님!”
벌컥!
문이 열리고 기희윤의 사랑들이 뛰쳐 들어왔다. 십수 개의 총구가 자신을 겨누고 다섯 개의 칼날이 목을 노리는데 이단우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기희윤만 노려보고 있었다.
‘이단우를 갖자.’
그 순간 이단우에겐 선택지가 사라졌다.
이단우는 죽거나 기희윤을 사랑할 수 있었는데, 기희윤은 이제 이단우를 죽이고 싶지 않아졌다…….
그런데 그건 이단우는 진작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이 새끼는 나 못 죽인다.’
이 욕심 많은 새끼가 노리던 걸 포기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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