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차치원은 어른들이 자신을 세워 두고 형과 대화하는 일에 익숙했다. 차치원은 중요한 일을 이야기할 대상이 아니다. 그런 대상은 언제나 형이었다.
차치원은 거기에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
형은 문을 잠그라고 했지 자신에게 나가라고 하진 않았기 때문에, 그는 스승님과 형이 만나는 자리에 남아 있었다.
‘……괜찮은 것 같지.’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움켜쥐고 구석에 있었다. 형을 오랜만에 봐서 좋았다.
그런데 그의 앞에서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나더니 스승님의 저주가 해제됐다.
형이 가져온 아이템이 스승님의 저주를 해제했다!
청연에서 지난 <종말> 이후 이십 년에 가깝게 찾고 있는데도 스승님의 저주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스승님이 ‘찾아보면 방법이 나오겠지.’라는 태도를 취해서, 주변 인물들도 이제는 저주에 걸린 청연 길마가 일선에서 활약하는 상황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스승님이 은퇴하겠다고 말해서 차치원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그렇지, 스승님도 괴로우셨겠지…….’
스승님과 형은 차치원에게 먼 사람이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데도 마음에서는 멀게 느껴졌다.
막연하게, 자신과는 다른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스승님이 고통스러워하리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형은 달랐다. 스승님과 교감하고 있었고 지금껏 누구도 찾아내지 못한 저주 해제 방법을 알아냈다.
가슴이 따끔거렸으나 차치원은 언제나 그렇듯 질투를 동경으로 덮었다.
“여, 역시 형이야.”
차치원이 감탄하는데 형이 말했다.
“아, 그거 단우 작품이에요. 아시잖아요. 단우 머리 좋은 거.”
‘어…….’
또 그 이름이 나왔다.
‘이단우.’
형과 같이 있던 그를 본 뒤로, 차치원은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예민하고 섬세한 인상이 강렬해서 사실 잊기도 힘든 사람이었다.
“걔는 이걸 어떻게 얻었는데? 알고 보니 걔네 집안 가보라거나, 그런 거면 곤란한데. 내가 빚지고는 못 사는 사람이라…….”
“음……. 어떤 집안 가보가 될 수 있는 물건이었던 것 같기는 한데……. 단우네 집은 아니에요. 그리고 스승님이 그러실 줄 알고 단우가 마음의 빚을 덜어 낼 방법도 생각해 뒀더라고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형은 웃으며 말했는데, 차치원은 지금껏 형의 그런 표정을 본 적 없었다. 몹시 친근한 대상을 대하는 태도였다.
‘하지만 이단우랑은 만난 지 일 년도 안 됐는데…….’
차치원은 아버지의 서재에서 읽은 보고서를 떠올렸다. 형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었으나 아버지와 차치원은 이미 이단우의 인적 사항을 전부 꿰고 있었다. 사실 이단우뿐만이 아니라 <차우원 팀>의 모든 팀원을 조사 완료한 상태였다.
스승님이 당황한 듯 물었다.
“그게 뭔데?”
“<육영>을 대여해 주셨으면 한대요. 기간은 <최후의 던전>을 닫을 때까지. 오래 안 걸릴 테니 부담 갖지 마시라……고 전해 달라던데요.”
‘저게 무슨 소리야?’
차치원은 이단우의 어처구니없는 자신감에 놀랐다. <육영>이라면 알고 있다. 어머니 차문경이 스승님에게 선물했던 검으로, 스승님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그 검을 사용하지 않았다.
A급 아티팩트인 <육예>의 쌍둥이 검이라는 가치도 대단했으나, 스승님에겐 다른 의미로 중요한 검이었다.
그러나 차치원이 놀란 건 그 부분이 아니었다. <육영>에 그런 사연이 있다는 건 대부분 모를 테니까. 세간에는 스승님이 예전에 사용하던 검이라는 사실이나 알려져 있을 뿐이다.
차치원이 놀란 건 <최후의 던전>을 닫을 때까지 빌리겠다고 말한 부분이었다.
‘자기가 닫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잖아?’
소수의 각성자들만이 헌터가 된다. 그중에서도 상급 헌터로 분류되는 건 또 채에 걸러진 극소수였다.
엘리트 헌터들의 비대한 자아야 차치원도 잘 알고 있었으나, 이단우처럼 확고한 자아를 가진 사람은 또 처음이었다.
‘그 사람이 말끝을 흐리거나 망설이는 모습은 상상이 안 되긴 하지만…….’
첫인상만으로 어떤 사람인지 바로 확신 가는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이단우가 바로 그랬다.
차치원은 그가 팀원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뒤로 빠져 있던 모습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는가? 일이 잘못될 거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의 태도였다. 그리고 정말로 상황은 이단우의 판단대로 되었다…….
마정석 탈취 사건 때 침입자들이 들고 있던 총은 사건이 종결된 후 반반씩 나눠 청연과 정부에서 가져갔다. 연구를 해 보니 구조가 단순하고 위력만 대단해서, 목숨 걸고 사용해야 하는 물건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실전 배치는 불가능.
청연 연구팀에서 내놓은, 그 물건에 대한 대처는 이랬다.
-총의 마력 회로를 고장 내는 게 최선. 그러나 총신 자체가 단단해서 체이서(B급) 이상의 헌터가 공격해야 할 것.
-근데 이걸 어떻게 멀쩡하게 가져오셨어요? 그것도 마력 회로만 파괴해서?
물어보는 연구원에게 스승님은 대답했다.
-<차우원 팀> 부팀장 애가 그냥 얼려 버리던데?
-세상에. 현장 헌터들 순발력은 진짜 장난 아니라니까요.
-우리도 현장 데려가 주세요. 보호팀으로 공격대 두 팀 붙여서.
-너네 현장 실습하라고 공격대를 두 팀씩이나 어떻게 빼내?
-길드장님이 이렇게 연구팀을 홀대하시니까 저희가 그런 신선한 발상을 못 떠올리는 거 아니에요.
그걸 얼린 건 <차우원 팀>의 원거리 딜러 소서정이었으나…….
‘사실 얼린 것도 아니고 총신을 냉각시킨 것뿐이지만…….’
모임에서 간혹 봤던 소서정은 그 순간 차치원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단우만 보였다. 그가 모든 일이 너무 당연한 듯 그 자리에 서 있어서, 차치원은 그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저런 사람이었다면 형도 나를 다르게 대했을까?’
차치원은 궁금했다.
그가 생각에 잠긴 사이 스승님과 형의 대화는 끝나 가고 있었다. 스승님이 결론지었다.
“뭘 대여를 해. 목숨의 은인한테 검을 대여해 주라고? 당연히 선물해야지! 이럴 게 아니라 내가 아예 감사 인사를 가야겠는데…….”
차치원은 생각할 틈도 없이 손을 들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응?”
스승님이 놀란 듯 차치원을 돌아봤다. ‘네가 왜……’라는 표정이라 차치원은 변명했다.
“스승님은 이제 막 저주에서 해방되셨으니, 무슨 부작용이 있지는 않나 검사해 보셔야 할 것 같아서요. 감사 인사는 제가 <육영>을 들고 형을 따라가서 하겠습니다.”
그는 씩씩하게 말하고 형을 힐끗 봤다. 형은 자신이 나섰음에도 불쾌해하지 않는 듯했다. 형이야 짜증스럽게 들러붙는 기자들에게도 항상 그런 태도긴 했지만…….
“그게 좋겠네요. 스승님은 정밀 검사 받고 계세요.”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 부길드장한테 파티 준비나 하라고 하고 훌쩍 다녀오면 되는데 뭘…….”
“잘 아시는 분이 아픈 몸 이끌고 일선에서 뛰셨어요?”
스승님은 툴툴거렸으나 두 제자가 챙기는 게 내심 기쁜 듯했다. 그가 바로 <육영>을 내어 줘서 차치원은 아티팩트를 인벤토리에 넣고 형을 따라나섰다…….
‘됐다.’
형과는 만나서 지금까지 개인적인 대화도 못 했다. 가면서 형의 근황을 물을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형이 요즘 대부분의 시간을 머무른다는 팀 사무소에 입성할 수 있게 됐다.
-걔가 독립한 집에도 안 들어가고 거기서 머물고 있다지 뭐니. 밖에서만 봐도 무너질 것같이 생긴 건물 아니냐. 내가 걱정이 돼서 말해도 그 애는 귓등으로 흘려듣고. 그런 것까지 제 엄마를 닮을 필요는 없는데…….
아버지가 당부해서 차치원은 형의 사무소를 언제고 염탐해 볼 계획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데서 기회가 왔다. 차치원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 * *
‘단우가 좋아하겠는데.’
차우원은 기분이 좋았다. 그는 자신이 들뜬 상태라는 걸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는데, 평소의 그는 이렇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이 기대가 되고 기분을 흩트려 놓는 건 그의 일상에 없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단우가 일상에 편입된 후로 그의 하루는 흥미진진해졌다. 그게 좋은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스승님이 저주에서 해방된 것도, 단우가 원하던 검을 얻게 된 것도 좋았다.
기분이 좋았다.
그 상태를 곱씹으며 차우원은 길드에서 출발했다. 가는 중간중간 차치원의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아지트에 도착해서 차우원은 잠시 멈춰 섰다.
“형?”
의아한 듯 부르는 차치원에게 멈추라고 손짓하고, 차우원은 안으로 들어갔다. 개인 사무실 문이 잠겨 있었다.
<이단우 아지트>는 3층짜리 건물로, 외관은 허름했으나 내부는 나름대로 깨끗했다. 투덜거리던 소서정과 그 소리를 듣다 못한 강울림이 매번 청소를 하고 있어서였다.
-그렇게 불만이 많으면 청소를 해. 넌 손이 없어, 발이 없어?
하고 강울림이 먼저 솔선수범을 보여서 소서정은 하는 수 없이 동참하게 됐다. 물론 손으로 청소하는 건 아니었고, 어딘가에서 스킬을 얻어 와 매번 써먹고 있었다. 그때마다 이단우가 ‘저런 일에 마력을 낭비하다니…….’라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건 모르는 듯했다.
아지트는 그만한 관리로도 청결이 유지되는 크기였다. 1층 정문을 열면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도 좌측의 계단과 개인 사무실 문이 보인다는 뜻이었다.
그 사무실 문은 대부분 열려 있었다. 그리고 문 맞은편에는 이단우가 소파에 누워 고양이처럼 잠들어 있는 게 1층의 평소 풍경이었다.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사무실 문이 닫혀 있었고 이단우는 소파에 없었다.
‘단우가 안에 있다.’
그리고 문틈에서는 억눌린 숨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
차우원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단우야.”
대답이 없었다. 오히려 문 너머로 들리던 숨소리마저 사라졌다.
“문 열어. 원하던 거 가져왔어.”
대답이 없었다.
이단우는 차우원에게 약속한 뒤 약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걸 차우원은 알고 있었다. 곁에서 늘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차우원은 내내 기분이 괜찮았다. 그 상태는 저주 해제 아이템을 얻은 뒤 끝없이 위로 치솟았다. 그는 스승님의 저주를 끝낼 수 있었다. 이단우가 원하던 검을 들고 돌아갈 수 있었고…….
차우원은 깨달았다. 그는 기분이 좋은 게 아니었다. 들떠 있었다.
이단우가 차우원에게 스승님의 저주 해제를 선물하고, 그를 밖으로 내보낸 뒤……. 빈 아지트에서 뭘 하려 들지 의심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들뜬 사람은 판단력이 사라지지…….’
차우원은 분노로 오히려 침착해진 상태였다. 본인은 스스로 그렇다고 판단했다
그는 저 숨소리를 알고 있다. 이단우가 어떨 때 저런 젖은 소리를 내는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안 열어? 그럼 내가 열게.”
그는 문고리를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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