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기희윤은 잠에서 깼다.
무언가 꿈을 꾼 것 같은데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기분 나쁜 느낌만 남는 이상한 꿈이었다.
기희윤이 하품을 하는데 비서가 물었다.
“요즘 왜 그렇게 주무세요?”
“몰라. 자도 자도 꿈을 꾸는데. 지독한 악몽이야.”
그가 몽롱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서는 자신의 주인이 항상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생각을 말로 하진 않았다. 그는 자신의 주인을 흠모하고 있었다.
“내가 뭘 뺏긴 것 같아. 목숨을 걸어도 좋을 만큼 갖고 싶은 게 있었는데. 그걸 자꾸 눈앞에서 빼앗기잖아……. 왜 이런 꿈을 꾸지.”
비서는 보고를 계속하고 싶었으나 기희윤은 졸려 보였다.
“내 생각엔 꿈을 빼앗긴 것 같아.”
“정말 잠이 부족하신가 봐요. 더 주무세요.”
비서는 서류를 정리하고 품에 안았다. 그러나 기희윤은 계속 말했다.
“잠이 아니라 꿈이야. 기억이라고. 누가 내 기억을 가져갔다니까?”
“그건 불가능해요. 주인님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정신계 헌터시잖아요.”
기희윤은 등록된 헌터가 아니었고 심지어 등록된 각성자도 아니었다.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지 않으니 현존하는 헌터들과 비교할 수단이 없었으나, 비서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기희윤이 눈을 깜빡이며 나른하게 말했다.
“난 한번 쥔 건 절대 안 놓잖아. 탐욕스럽다고. 뭘 잊어버렸는지 알아야 하는데. 빼앗길 바엔 내가 망쳐 버려야지…….”
그가 다시 잘 것 같지 않아서, 비서는 서류를 내려다봤다.
“그거 말씀인데요. 주인님께 바치려던 공물에 문제가 생겼어요.”
“무슨 공물?”
기희윤은 받는 게 많았다. 너무 많아서 기억도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더라도 기희윤의 사람들은 그에게 자신의 이름 한 줄 올리고 싶어서 뭐든 바치려 노력하겠지만.
“전대 영웅의 스킬이에요. 주인님이 ‘스킬 사냥’ 준비를 맡기셨잖아요. 담당자가 멍청하게도 실패해 버리는 바람에, 이림 길드 안에 심어 놓은 주인님의 인형들까지 망가져 버렸어요.”
“뭐야? 큰일이잖아! 그 얘길 먼저 했어야지!”
기희윤이 발칵 화를 냈다. 그러나 비서는 그가 정말 화가 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도무지 진지해질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과연 기희윤은 이어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발각됐지? 대형 길드에서 자기 길드원을 고문하는 짓 같은 걸 할 리 없잖아?”
“네……. 고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비서는 서류를 내려다보며 잠시 침묵했다.
“뭔데, 뭐야.”
기희윤이 안락의자에 등을 기대며 다리를 까딱였다.
어린애처럼 구는 그에게 비서는 말해 줬다.
“이림 길드원들끼리 서로 입을 맞추게 했다는데요. ……경호팀 회의에서 내부자를 의심하는 의견이 나왔던 모양입니다.”
비서는 설명을 이어 가고 싶었으나 기희윤 때문에 불가능했다.
“아학학학!”
소파에서 뒤집어진 그를 비서는 기다렸다.
‘담당자는 살아남을까.’
웃는 기희윤을 보니 비서는 행복해졌다. 동시에 기희윤을 즐겁게 만든 담당자에게 타는 듯한 질투를 느꼈다.
“이림에 그렇게 재미있는 생각을 할 줄 아는 애가 있었다고?”
“그게…… 이림 길드원의 발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림 전 길드장이 개인적으로 부른 외부팀이 따로 있어서요.”
“누구?”
“<차우원 공격대>입니다. 영웅 차문경의 아들이 만든.”
“아, 나 알아. 유망주 랭킹 1위 찍은 애잖아. 이상하다. 그 도련님이 그렇게 재미있는 사람이었나?”
“알아볼까요?”
“아, 됐어. 그 도련님은 아니야. 얼굴만 봐도 알지. 인생 잘 살게 생겼잖아. 난 그런 애들 싫더라.”
기희윤이 안락의자에 거꾸로 누운 채 말했다. 머리를 바닥에 두고 다리를 등받이에 댄 채 아래에서 비서를 올려다봐서, 비서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았다. 주인님을 굽어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팀에 흥미 있으실 만한 정보가 하나 있기는 합니다.”
“뭔데, 뭔데.”
“그 팀 근거리 딜러가 저희 약품점을 이용하고 있던데요.”
“뭐! 그거 재미있는 얘기잖아.”
기희윤은 바로 앉으려다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악, 뭐야, 약쟁이야? 그 모범생 도련님이 팀에 약쟁이를 뒀어?”
“그런 약은 아니고……. 지금 단종된 마력 촉진제를 복용 중인가 봅니다.”
“아……. 그쪽 약. 팀원도 열심히 하는 영웅 지망생이셨군.”
기희윤은 약간 흥미가 가신 듯했으나 이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럼 진짜 약쟁이로 만들어 줄까.”
“성분 바꿀까요? 얼마나 강한 걸로……?”
“이왕 만들 거 재미있게 만들어 줘야지.”
기희윤이 몸을 흔들며 말했다. 그러더니 다시 안락의자에 쓰러져 잠들어 버렸다.
비서는 기희윤이 심신 미약 상태로 내린 지시라도 무시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주인은 항상 그런 상태였기 때문이다.
비서는 수첩에 지시를 전부 적었다. 그리고 약품점에 연락을 취했다. 주인의 명령을 따라, 주인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 * *
이단우는 밤 외출을 마치고 아지트로 돌아갔다. 문을 열자마자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는 차우원이 보였다. 그가 책을 읽다 안경을 내렸다.
‘얘가 왜 이 시간에 여기 있지.’
그런데 차우원이 먼저 물었다.
“밤마다 어딜 다녀오는 거야?”
이단우는 차우원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는지가 더 궁금했다. 차우원은 멀쩡한 집이 있었고 거기서 잤다.
아지트에 밤에도 머무는 건 이단우와 강울림 정도인데 누가 말했단 말인가?
‘강울림 이 새끼.’
“산책.”
단우는 대충 대답하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2층 신체 단련장에 인기척은 없었다. 강울림은 오늘 없다.
“3층 내 침실로 쓴다.”
“사무실 소파가 네 침대 아니었어?”
차우원이 쾌활하게 웃었다. 단우는 속이 울렁거렸다.
“아니야. 너 거기 계속 있을 거야?”
“아니. 갈 거야.”
“잘 가.”
가지도 않은 차우원을 보내 버리고 단우는 3층 문을 닫아걸었다. 철컥 소리가 난 뒤에야 자기 뺨을 한 대 쳤다.
‘스무 살 차우원은 원래 잘 웃는다고.’
아무도 없는 아지트에 차우원이 앉아 있던 이유도, 이단우를 기다려서는 아닐 터였다.
‘방심하면 이렇다니까.’
이단우의 뇌는 차우원이 뭘 하든 그걸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려 든다. 과거부터 있던 일이라 이단우는 단속하는 법도 알았다.
-네가 이단우잖아. 스승님이 말한 불쌍한 애가 너잖아.
스물네 살 차우원의 목소리가 떠올라서 이단우는 다시 차분해졌다.
‘착각하지 마.’
차우원은 불쌍하고 안된 이단우에게 잘해 줬다. 이단우가 동정과 애정을 구별하지 못하고 정신없이 빠져 버릴 정도로.
이단우는 자신을 멍청한 생각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법도 알고 있었다. 사람이 스물일곱까지 살다가 한번 죽고 과거로 돌아가기도 하면 이것저것 알게 되는 법이다.
정신이 강하면 몸의 고통쯤은 이겨 낼 수 있다고 누가 그랬나?
조선 시대 선비들의 생각이야 알 바 아니었으나 이단우는 선비는 못 될 팔자였다. 그는 고통을 주면 울었고 하던 생각도 잘 잊었다.
‘오늘 하자.’
이단우는 생각해 오던 일을 오늘 끝낼 작정이었다. 스무 살 이단우의 몸은 마력 촉진제에 익숙하지 않았고, 마력을 수월하게 이동시키지 못했다.
‘몸에 길을 뚫지 못했다.’
산길도 사람이 밟고 다녀야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법인데 사람 몸에 만들 길은 오죽하겠는가?
스무 살 이단우의 몸은 마력이 지나갈 길 자체도 제대로 뚫지 못했다. 단우는 언제 날을 잡아 끝장을 보겠다고 생각했으나, 여러 가지 일로 미뤄지던 차였다.
아지트는 마력석을 박아 강화시켜 충격에 강했다. 이단우가 좀 발작한대도 견뎌 낼 것이다.
아래층엔 강울림도 없으니 오늘이 적기였다.
“하…….”
이단우는 숨을 삼키고 약 다섯 알을 한꺼번에 입에 넣었다.
“……!”
그런데 이상했다.
‘씨발, 약에 뭐 탔다.’
약 성분이 바뀌었다. 금지 약물을 파는 약국이 제대로 된 곳일 리 없어서, 이곳도 불법 영업장이었다.
이단우는 모든 불법 시설이 기희윤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대부분은 기희윤의 것이라고 의심해도 된다고 믿었다.
실제로 이단우가 이용하던 곳도 기희윤의 소유였던 것이다.
‘근데 이 새끼가 주인이 아닌 곳을 찾기가 더 힘들다고.’
단우에게도 변명은 있었다.
그는 게워 내려고 목구멍에 손을 처넣었으나, 그 순간 약이 입 안에서 녹아내렸다. 무슨 짓을 했는지 몸에 그대로 흡수되고 있다.
단우가 약 성분이 바뀐 걸 바로 알아차린 이유는, 이 짓을 예전에도 당해 본 적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중독성을 높이기 위해서였는데…….’
단우는 한때 약을 끊어 보려고 한 적이 있었다. 차우원이 너무 괜찮은 놈인 데다 눈치도 빨라서, 이놈에게 약 쓰는 걸 들켰다간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단우가 가게에 들르는 주기가 뜸해지자 약국에선 수작을 부렸고…….
‘아 미친…….’
단우는 감각이 달아올랐다. 온몸에 화끈 열이 올라서 그대로 녹아 버릴 듯했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건 예민해진 아래였다.
“으응…….”
정말로 미쳐 버릴 것 같다. 이걸 어떻게 했지?
어떻게 해결했더라?
그때는……. 차우원이 해결해 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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