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야! 그 새끼 잡아!”
“심문해!”
“이 배신자 놈! 이림의 이름에 먹칠을 해?”
“너 때문에 이 새끼랑 입 맞췄잖아!”
“아, 아니라고! 내 의지가 아니었다고!”
정신계 스킬에서 벗어난 이림 길드원은 버둥거렸다. 그러나 항의는 묵살됐고 그는 몇 대 얻어맞고 구속구를 찬 채 고청 앞으로 끌려갔다.
차우원이 기절한 도망자를 밟은 채 물었다.
“우리는 안 해도 되나?”
그의 미소를 본 이단우는 속이 울렁거려서 인상을 썼다.
“우린 스킬 걸릴 시간도 없었고.”
애초에 저항 스탯도 높은 놈이 무슨 소린가?
<차우원 팀>에서 정신계 스킬에 걸릴 만한 놈은 이단우뿐인데, 그는 기희윤이 가까이 오면 감지할 수 있었다.
이림 길드원들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마력 구속구를 든 채였다.
약간 얼뜬 표정의 고청이 말했다.
“그…… 저희 길드원들을 저희가 포박해도 되겠습니까?”
‘너네 길드원인데 왜 우리한테 묻냐.’
“그러세요.”
단우가 대답하자 차우원이 발을 치웠다. 고청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
“저……. 감사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사건이 진행돼 인사도 제대로 못 했습니다. 저희 측에 설마 정말로 배신자가 있었을 줄이야…….”
“이림 길드원도 사람인데 유혹에도 넘어가겠죠. 서로 입 맞추게 하는 것만으로 정신계 스킬이 풀릴 정도로 팀원들이 서로를 싫어해서 다행이네요.”
‘키스로 스킬 풀리는 걸 내가 알고 있었다고 티 낼 필요는 없겠지.’
이쯤 말해 두면 연막이 되지 않겠는가?
“예……. 저희 길드원들이……. 팀원들을 서로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아서 다행……. 후…….”
고청은 머리가 어지러운 듯했으나, 단우와 차우원에게 악수하며 감사 인사를 하는 건 잊지 않았다.
‘예의 바른 놈.’
고청은 과거 이단우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이단우는 그가 싫지 않았다.
이단우가 차우원을 죽였다고 의심하는 사람은 하늘의 별만큼 많았고, 고청도 그래서 이단우를 미심쩍게 여겼기 때문이다.
고청은 차우원을 좋게 보던 놈이었다.
차우원을 좋아하던 놈들 중에 나쁜 놈들은 드물었다…….
‘예외도 있지만.’
이단우는 저택에서 뛰어나오는 이림 은퇴 길마를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봤다.
* * *
기절했던 도망자들도 강제 입맞춤행은 피할 수 없었다. 반항하는 도망자들을 붙잡고 서로 입 맞추게 했기 때문에 이림 길드원들은 자신들의 입술을 지킬 수 있었다.
도망자들은 비명을 지르고 악을 쓰며 서로 입술을 문댔다.
화악——!
빛이 반짝이며 정신계 스킬이 풀렸다.
“…….”
아수라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정신이 드셨습니까?”
고청이 물었다.
“예, 예……? 부길드장님.”
제정신을 차린 도망자들은, 자신이 스킬에 걸린 상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정말입니다! 제가 왜 이림을 배신하겠습니까? 부길드장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이림에서 수련생 생활을 마친 이림 순혈 출신인데요! 이제 와 배신을 해서 뭘 어쩌겠다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이 묶여 있던 도망자가 황당하다는 듯 옆을 돌아봤다.
“이림 순혈이라 배신을 안 한다는 게 무슨 논리야? 그럼 길드 편입한 나는 배신할 만한 놈이란 소리야?”
“너 잘 말했다! 부길드장님, 저놈을 심문해 보십시오! 뭔가 알고 있을 겁니다. 배신을 했다면 저놈입니다! 쟤가 범인을 끌어들여서 저희에게 몰래 스킬을 걸게 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너네 미쳤냐? 날 팔아넘겨?”
그 꼴을 더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단우는 밖으로 나갔다.
물론 바깥 상황도 좋지는 않았다.
은퇴 길마가 두 팔 벌려 단우를 환영했다.
“오오! <차우원 팀>의 지낭1), 참모, 똑똑한 우리 이단우 헌터가 나왔군!”
‘언제 우리 자가 붙었냐.’
단우는 은퇴 길마의 팔을 피했다. 단우의 어깨를 잡으려던 은퇴 길마는 헛손질을 한 제 손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아무리 은퇴를 했다고 해도, 전직 헌터가 거리를 잘못 볼 리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정말 늙었나.’
단우는 은퇴 길마가 세월을 한탄하든 말든 관심 없었다.
<차우원 팀>은 전원 은퇴 길마에게 붙잡혀서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잔뜩 차린 다과와 함께 차를 마시는 중이었는데, 속이 편해 보이는 사람은 가면을 벗어 던진 소서정밖에 없어 보였다.
차우원의 맞은편에는 배지슬이 앉아 있었고, 배지슬 옆에는 이 자리가 아주 불편해 보이는 권준홍이 무릎을 모은 채 얌전히 두 손을 다리에 올리고 있었다.
“이단우 헌터가 부팀장이라며? 팀원들이 자리를 비워 놨지. 여기 앉아요. 경호하느라 고생이 많았을 텐데, 차 한잔 들고. 이단우 헌터는 뭐를 좋아하나?”
이단우는 차우원 옆에 앉으며 눈으로 물었다.
‘왜 아직도 안 끝났냐.’
‘단우야, 내가 텔레파시 하는 재주는 없다.’
차우원이 눈으로 대답했다.
이단우도 텔레파시 스킬은 없었기 때문에 둘의 대화는 통하지 않았다.
맞은편에 앉은 배지슬만 불편해졌을 뿐이다. 그녀는 정말 아버지가 부끄러웠다.
“내가 왜 이단우 헌터 같은 훌륭한 검사의 이름을 못 들어 봤는지 모르겠어. 이단우 헌터가 지슬이랑 나이가 같으니까 부모님도 나랑 같은 연배 아니신가? 두 분도 헌터셨겠지? 성함을 들으면 내가 알 것 같은데.”
은퇴 길마가 이단우 앞에 접시를 끌어다 놓으며 살갑게 말했다.
‘들어도 모를걸.’
이단우는 생각했다. 저 인간에게 부모님 성함을 밝히고 싶지도 않았다.
“두 분 모두 저 어릴 적에 돌아가셔서요. 아마 모르실 겁니다.”
“저런…….”
은퇴 길마가 안타까워하는 척했다.
갑자기 튀어나온 가정사에 권준홍이 과자를 먹다가 기침했다.
“헉, 콜록, 콜록…….”
단우는 그에게 휴지를 뽑아 주고 덧붙였다.
“두 분이 헌터시긴 했는데 헌터 가문 출신도 아니어서요.”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구만.”
‘저걸 칭찬이라고 하나?’
관심 끄라고 한 말에 은퇴 길마가 계속 관심을 보여 줘서 단우는 피곤했다.
배지슬의 표정을 보니 이 자리가 길어지면 먼저 방으로 돌아가려고 할 위험이 있었다. 그러면 곤란했다.
‘번호 받아야 하는데.’
배지슬의 방까지 따라가서 휴대폰 번호를 묻는 건 이상해 보이지 않겠는가?
물론 그녀의 아버지 앞에서 수작 부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없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아서 헌터계 정보 얻기도 힘들었겠네. 그래서 길드나 센터 쪽은 아예 생각을 안 한 건가? 각성하고 각성자 등록을 했으면 센터 같은 데서 들어오라고 제안했을 만도 한데…….”
은퇴 길마가 떠봤다.
이단우의 각성 등급이 궁금하다 그 소리다.
“각성이 늦어서요.”
‘배지슬을 차우원에게 소개시키려다가 소서정으로 바꾸고 그다음으로 나를 생각해?’
급이 너무 떨어지지 않는가?
이단우는 그가 더 싫어졌다.
“아, 그런 경우가 있지. 재능이 있어도 늦게 각성하는 경우가 있어. 물론 어린 나이에 각성하면 보통 대단하긴 한데 말이야. 나도 각성이 늦었거든. 내 생각에는 지슬이도 나랑 비슷할 것 같아.”
‘저 소리 하려고 다 붙잡아 뒀군.’
헌터들은 같은 헌터와 결혼하는 걸 선호했는데, 그래야 자식도 각성자가 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언제 던전 브레이크로 골로 갈지 모르는 세상인데 자식이 각성자인 게 속 편하지.’
사실 헌터 직군에서 일하며 관련 업종 아닌 사람을 만나기가 힘들기도 했다.
단우는 돌아가는 상황도 알 것 같았다.
헌터 명문 출신들이 저들끼리 약혼하고 결혼하는 상황에서 배지슬은 입장이 난처한 것이다.
‘각성자가 아니니까.’
아버지가 전대 영웅이라는 대단한 가문 출신인데, 본인은 각성자가 아니다. 헌터 명문에서는 결혼 상대로 생각하기 애매하고, 그렇다고 보잘것없는 집안과 결혼시키기엔 전대 영웅 체면이 안 선다.
물론 이건 배지슬이 아니라 은퇴 길마 입장에서의 난처였다.
배지슬은 어디서 어떻게 살든 행복하게 잘 지낼 사람이니까.
“소서정 헌터라면 잘 알 거야. 소서정 헌터 어머니도 각성이 늦은 편이셨지?”
“예? 아, 그러셨죠. 그래도 잘 사셨죠. 헌터 활동도 잘 하시고. 지슬이도 그럴 거예요.”
소서정이 입에 발린 말을 해서 대화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새끼 진짜 말 많네.’
단우가 은퇴 길마를 어떻게 보낼지 생각할 때였다.
“아, 그러면 얘기들 나눠요. 내가 감사 인사는 하고 보내야 할 것 같아서 부른 거야. 젊은 친구들 오래 붙잡아 놓을 생각은 없어요. 내가 그렇게 개념 없는 사람이 아니야.”
은퇴 길마가 활짝 웃으며 일어났다.
내부 협력자를 색출했으니 이제 이림 경호팀만으로 은퇴 길마를 보호할 만했다. 경고장이 온 지도 한참 지났다. 이쯤이면 범인이 부끄러워서라도 안 나타날 테다.
……뭐 은퇴 길마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림 길드원들은 그렇게 판단할 게 뻔했다.
사건이 종결된 이 여유로운 분위기가 단우는 마음에 들었다.
저택의 모든 사람들이 긴장을 풀고 있을 때가 아닌가?
‘이 분위기 지속해라.’
아버지가 사라져서 표정이 밝아진 배지슬과 권준홍이 보였다.
단우는 배지슬에게 바로 번호를 물으려다 멈췄다.
‘좀 이상해 보일 것 같다.’
방금 전까지 은퇴 길마가 딸 소개하는 분위기를 풍겨 댔는데 단우가 번호를 물어보면 상황이 묘해진다.
단우는 상식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방향을 틀었다.
그가 권준홍에게 물었다.
“전화번호 물어봐도 될까요.”
“네? 저, 저요?”
“네.”
“왜, 왜요?”
권준홍이 다시 과자 가루를 흘리며 물었다. 단우는 스무 살의 권준홍이 저렇게나 칠칠맞지 못했나 싶었다. 그는 휴지를 한 장 더 뽑아서 권준홍 손에 쥐여 줬다.
‘왜냐니.’
번호 묻는 이유가 따로 있나?
“이것도 인연인데 알고 지내고 싶어서요.”
‘배지슬 번호 따기 전에 밑밥 깔고 싶어서 그런다.’
“저, 저야 영광이지만…….”
권준홍이 자꾸 옆을 돌아봤다.
“……?”
뭐 어쨌든, 단우는 권준홍의 번호를 무사히 받았다. 그리고 사방이 조용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뭔데?’
“아, 아하하! 저 과제가 있다는 걸 잊었네요. 죄송해요. 이만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아요! 아버지를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다음에 또 뵈면 인사드릴게요. ……준홍아.”
배지슬이 권준홍의 배를 손등으로 쳤다.
“네, 네! 저도 과제가……. 아니 일이……. 다음에 봬요!”
배지슬과 권준홍이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복도 끝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바보야!”
“하, 하지만. 난 팬인데 어떻게 거절을…….”
‘……?’
단우가 의아해하는데 옆자리의 차우원이 단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단우는 숨 쉬는 걸 잊었다.
“내가 서운해, 단우야. 앉아서부터 권준홍 씨만 신경 쓰고 말이야. 권준홍 씨가 단우에게 가치가 있나?”
단우는 이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더 가치 있는 쪽을 신경 쓰라며. 나를 신경 써야지.”
차우원의 머리가 단우를 툭 건드리고 떨어졌다.
“……?”
단우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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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혜가 많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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