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아니. 내 생각이 아니라 사실이고. 차우원 넌 왜 추임새만 넣는데. 너도 대답을 해.”
이단우가 마카로 보드를 치며 말했다.
“음……. 그래. 단우가 대답이 듣고 싶은 거였구나.”
“빈정거리지 말고. 대답 듣기 싫은데 질문을 왜 해?”
“단우가 이해하기 쉬운 사람은 아니지.”
팀 내에서 가장 말 잘하는 두 사람이 붙으니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강울림이 눈치를 보는 가운데 소서정은 다른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단우와 차우원은 서로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둘의 표정이 달랐다. 이단우는 평소처럼 약간 예민함이 느껴지는 날카로운 얼굴이었고 차우원은 미소라도 짓고 있는 듯했다.
‘차우원은 원래 저렇긴 한데.’
태도가 부드럽긴 해도, 저렇게 기분 좋아 보일 때는 별로 없지 않나? 이 팀에선 자주 보는 것 같기도 한데…….
어쨌든 화내는 건 피곤한 일이라 연단에 선 사람이 먼저 포기했다. 이단우는 보드를 싹 지워 내고 새 그림을 그렸다.
‘그림 정말 못 그린다.’
소서정은 표정으로 티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다른 질문 할 테니까 이번에는 대답해. 자, 철길이 있고……. 아니 철길은 됐고. 각자 자기 자신을 생각해 봐. 눈앞에 민간인…… 아니, 헌터 한 서른 명이 있는데, 어마어마한 괴수가 헌터들을 짓밟으려고 하고 있어. 근데 네 몸으로 막으면 그 서른 명은 살릴 것 같아. 넌 내장 파열은 감수해야겠고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지만. 어떻게 할래?”
“뭐 하는 세계관이야? 그 헌터들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왜 가만히 짓밟히고 있는데?”
강울림이 또 반응이 뻔한 질문을 했다. 이단우는 강울림을 노려보는 걸로 그를 닥치게 하고 차우원을 돌아봤다.
“내가 먼저 대답해야 하는 거야? 이거 나 혼내고 있는 것 같은데.”
차우원이 웃었다.
‘그거였냐.’
소서정도 깨달았다.
<자이언트 앤트> 던전 때 차우원이 한 일이 그거 아닌가? 헌터들을 구하기 위해 앞으로 나선 것.
‘까이는 거 맞는 것 같은데 너 왜 기분 좋아 보이냐고…….’
소서정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니까 자유롭게 말해 봐.”
“진짜 아닌 거 맞아? 단우가 그렇게 말하니까 믿고 말해야겠다. 내 생각엔 내 몸으로 막는 게 옳은 판단 같다. 단우 말대로라면 헌터 서른 명을 살리면 적어도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을 살리는 건데. 헌터 한 명보다 세상에 더 득이 되겠네.”
“아니지. 이번엔 경우가 다르잖아. 너넨 왜 가치 계산을 안 해?”
이단우는 답답한 듯했다.
“가치 계산은 한 것 같은데. 한 명 대 수만 명 얘기를 하는 게 아니면, 단우가 말하는 가치 계산이 뭘까?”
“너희가 앞으로 구할 수 있는 사람 숫자를 계산 안 했잖아.”
“……?”
“헌터 한 명이 수백에서 수천 명 살린다며?”
강울림이 질문을 대신했다.
“그건 일반적인 헌터고. 너희는 <종말>을 막을 거잖아. 전 세계 사람을 다 살릴 건데 가치 비교가 안 되지. 이런 기본적인 계산도 안 하니까 네가 몸을 막 쓰는 거 아냐.”
역시 이단우의 말은 차우원을 까기 위해서가 맞았다. 그런데 그 내용이 범상치 않아서 다들 할 말이 없었다.
“아, 우리가 <종말>을 막는 건 확정이구나?”
차우원은 웃음을 참고 있는 듯했다.
“당연하지? 내가 고른 천재들인데.”
이단우의 목소리가 확신에 차 있어서 이번엔 차우원도 대답하지 않았다.
강울림이 화들짝 놀랐다.
“어, 어? 나도 포함이야?”
“넌 왜 계약서를 안 봐. 스카우트할 때 계약서에 <종말>까지 함께 간다고 적혀 있었잖아. 남의 목숨도 계약서에 걸어 놓고 왜 내용 확인을 제대로 안 해?”
“아니! 헌터가 된 이상 <종말>까지 가는 게 당연하지. 다들 <종말> 막으려고 헌터 되는 건데. 근데 내가 그렇게 재능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넌 재능 있고.”
강울림은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 말에 넘어가냐?’
소서정은 황당해졌으나 자신도 속으로 ‘오오’ 하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그는 강울림과 달리 자신이 수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아무래도 차우원 같은 거랑 비교되다 보니 빛이 바래는 느낌이 없잖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단우라는 눈 좋고 머리 좋은 녀석이 자신을 간절히 팀원으로 원하지 않았는가?
헌터 서른 명보다 소서정 한 명이 더 가치 있다니,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인가?
‘잠깐.’
이거 차우원 노린 얘기 아니었나? 은근슬쩍 ‘우리 팀원들’ 같은 말로 비비긴 했지만. 결론은 이단우 생각에 차우원이 헌터 서른 명보다 가치 있다는 소리로…….
‘우리 다 모아 놓고 차우원 몸 사려라 잔소리한 거 아닌가?’
소서정은 깨달았다. 그리고 차우원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난 단우 논리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근데 여기서만 말하자. 밖에서 얘기하고 다니면 단우가 욕 좀 먹을 것 같다.”
“내가 멍청해? 이런 소릴 떠들고 다니게.”
“음……. 그래. 우리 앞에서 얘기하는 건 은밀하고 내밀한 의사소통이지. 안에서라면 단우 평판이 나빠질 일도 없고 말이야.”
“너 지금 내 인성에 하자 있다고 욕하는 거냐? 밖에서 말하면 평판 나빠질 소리 한다고?”
“하하! 우리 단우가 영리해.”
“시끄러워. 아무튼 이게 우리 팀의 새 팀훈이니까 명심하라고. ‘가치 판단을 잘하자.’ 가슴에 새길 것. 이상. 해산해.”
이 둘의 분위기는 이상하다. 소서정은 ‘이단우가 어떻게 차우원과 친구가 됐을까’에 주목하고 있었으나, 주목 지점이 달라야 했는지도 모른다.
이 사실을 강울림은 알고 있을까? 그는 소서정보다 더 오래된 팀원이었다.
강울림이 소서정에게 슬쩍 물었다.
“야, 좀 이상하지 않냐?”
“그래. 너도 눈치챘구나.”
소서정은 가슴이 떨렸다. 그는 차우원의 비밀을 알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단우는 날 언제 봤다고 자꾸 천재라고 하는 거지? 높게 봐 줘서 고맙긴 한데, 실망시키면 영 기분이 찜찜할 것 같은데.”
“…….”
‘넌 그냥 봐도 재능 있잖아.’
철근을 찰흙 놀이 하듯 매만질 수 있는 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스탯 공개를 안 해도 그가 괴물 같은 신체 스탯을 가지고 있다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 눈치 없는 거랑 대화하려던 내가 문제지.’
소서정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며 방금까지 하던 생각을 잊었다.
소서정이 눈치챈 걸 차우원이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 없었다.
‘이상한데.’
차우원은 진작 생각하고 있었다. 많은 것이 이상했다. 가장 이상한 건 스스로의 행동이었다.
이단우는 재미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팀에 들어온 건 단순히 이단우와의 내기에 져서는 아니었다.
차우원은 청연에 들어가지 않을 명분이 없었다. 그곳은 스승님이 길드장으로 있는 곳인 데다가, 차문경의 아들 차우원이 센터에서 계속 활동하는 걸 전대 영웅들이 받아들일 리 없기 때문이다.
‘청연에 들어가면 아버지 감시망 한가운데 놓이겠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불쌍한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귀찮아서 청연은 안 되겠어요.’라고 말씀드릴 수도 없고.
센터에 남으면 일어날 귀찮은 일들도 만만치 않을 터였다.
차우원은 귀찮은 건 질색이었고, 센터 연수생을 졸업하면 청연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단우가 나타났고 그에게 내기를 걸었다. 그리고 이겼다.
차우원에겐 다른 선택지가 생겼다. 다른 팀에 들어간다는 선택지가.
그는 이단우가 뭘 하는지 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보게 된 이단우는 흥미진진한 사람이었다. 대책 없이 지르는 것 같은데 대책이 있고, 똑똑한데 사회성은 없고, 입이 거칠었다. 얘가 뭘 하려는지 구경하느라 다 따라 주다 보니 일은 점점 더 재미있어졌다.
이단우는 차우원을 이용하기 위해 팀원으로 받아들인 게 맞았는데, 그 이용 방향도 심히 이상했다.
일단 개인적인 용도의 이용이 아니다.
차우원에게 스승님을 만나게 해 달라는 부탁조차 안 하지 않았는가?
‘보자마자 울 정도로 존경하면서.’
이단우는 원래 눈물이 많았지만. 차우원을 보고도 통곡은 안 했다.
‘그때는 왜 울었을까?’
차우원을 존경하지도 않으면서.
정말 알 수가 없다.
이단우를 궁금해하느라 차우원은 하루 종일 흥미가 가실 날이 없었다.
단우가 스승님을 존경하면서도 청연에는 안 들어간 이유가, ‘다음 종말을 막기에는 스승님의 나이가 너무 많아서’라는 것도 확인했다.
이단우의 목표는 <종말> 대비뿐이다.
-왜 네가 화보를 찍어야 하는지 알려 줄게.
-음, 그래. 단우야. 그게 궁금하긴 했어.
-넌 얼굴이 잘났고.
-…….
-찍히면 효과가 좋을 거고. 잘 팔릴 거고. 팀 명성 얻는 데 도움이 될 거란 말이야. 우리 나중에 <성물> 쟁탈전 참여하려면 빨리 이름값 높여야 돼.
-오…….
-다음에 영입할 애가 워낙 이름값 따지는 놈이어서도 그렇고.
-단우는 다 계획이 있구나.
-어린애 어르는 말투 하지 마라.
-하하!
무서운 얼굴이 돼서 협박하는 단우의 어깨를 끌어안고, 차우원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단우는 차우원에게 돈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과연 단우의 말대로, 다음 팀원 소서정은 차우원과 팀의 이름값, 비전에 이끌려 들어왔다.
-으아, 이게 사무소야? 너네 청소는 하고 살아? 진심이야? 난 이런 데서 일 초도 못 버텨!
이렇게 말하는 소서정이나 차우원이나, 단우가 돈을 끌어 쓸 데는 많았다.
하지만 역시 이단우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팀원에게 내릴 명령과 팀원에게 할 수 없는 부탁의 기준이 정해져 있는 건가.’
그게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단우는 빚지기를 싫어한다.
던전 브레이크가 터지면 전산망이 엉망이 되곤 해서, 세상은 은행 불신 시대에 접어들었다. 은행 업무가 축소되면서 큰돈이 오가는 대출 또한 덩달아 어려워졌다.
그러나 은행이 아무리 대출에 소극적이래도 <차우원 팀>의 명망으로 대출이 불가능할 리는 없다.
이단우는 그런데도 대출은 받지 않았다. 소서정이 본인은 사무소라고 부르길 원하는 <이단우 아지트>에 적응하는 결말이 되었을 뿐이다.
차우원이 지금까지 관찰한 결과…….
이단우의 목표는 종말 막는 영웅 되기뿐인 듯했다.
세속적이라면 세속적이고 대의가 있다면 또 그렇게 느껴지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명성을 얻기 위해서라면 본인이 직접 나서서 얼굴을 알리는 방법도 있을 텐데.’
왜 차우원을 앞세우고, 명망 얻을 일은 다른 팀원에게 몰아 주는가?
최근 차우원의 의문이었다.
차우원을 부른 센터, 길드들, 공격대들 모두 목적은 같았다. 영웅이 되어 부와 명예를 얻고 싶다.
어디를 가든 차우원은 잘 써먹혔겠으나, 그곳에선 이단우처럼 차우원을 즐겁게 해 주진 못했을 터였다.
‘예측 불가라니까.’
-너 이상형이 어떻게 돼.
그런 질문은 대체 왜 한 걸까?
또 하나 차우원이 궁금한 건, 자신이 왜 이단우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였다.
-그럼 그렇게 말해, 단우야. 화내지 말고, 명령하지 말고 말해. 내가 걱정돼서 제정신이 아니게 된다고 해.
-그럼 내가 기분이 좋을 것 같아.
그때 노트북을 보던 이단우가 벌떡 일어났다.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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