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잔. 착륙.(完) >
1.
거나하게 마신 술과 잠들지 못했던 깊은 밤. 그런 모든 것을 지나 비행기는 익숙한 땅으로 사람들을 데려간다.
대회가 끝나고 곧바로 이어진 전야제 아닌 뒤풀이 파티. 마치, 이게 진정한 대회의 목적이었다는 것처럼 바텐더들은 영혼을 불태워 밤을 보냈다.
모두가 술을 마시고 놀고 있을 때 놀지 못하는 이들이 한곳에 모인 자리였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때 그 자리를 상상하게 만드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다.
“자네···. 괜찮나?”
“괜···찮습니다. 우욱!”
“그러게 적당히 마시지···. 요즘 누가 트로피에 벌주를···. 바텐더가 아주 모범을 보이시는군. 그것도 세계 챔피언이.”
“아침까지 달리셨대요. 다들 안 놓아줬다고···.”
“바텐더들이 더 하구만. 참.”
달라진 건 많은 귀국길이다.
우선, 떠날 때는 긴장감이 역력했던 이들의 모습이 여유가 가득해진 것이 큰 차이일 것이고.
두 번째로는 이들의 짐이, 조금 더 무거워졌다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정환은 수화물로 가득 붙인 기념품과 선물에 이어, 품에 꼭 안은 작은 트로피를 우욱! 거리는 와중에도 놓지 않고 있다.
트로피에는 ‘World Class Champion.’이라는 글자가 여전히 번들거리고 있다.
손님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마음도, 진심을 잔에 담는 법도. 이제는 얻을 걸 전부 얻은 그였지만.
여전히 트로피는 놓칠 수 없는 기념품이다.
- Ladies and gentlemen, this is your captain speaking.
비행기는 점점 고도를 낮추며 익숙한 땅에 근접해 간다. 멀리서 보이는 건 익숙한 땅에 그리운 땅.
비행기는 무사히 그 땅에 안착한 후 세계 챔피언을 밖으로 모셨다.
대회에서 주어진 티켓이 제법 고급이었기에 편안히 날아온 일행들이다.
일행들은 주어지는 짐을 챙긴 후, 서둘러 입국장에 들어선다. 원래 가까워질수록 걸음이 빨라지는 게 귀국길이다.
- 챠아앙.
입국장을 나서는 문이 닫혔다가 열리길 몇 번. 뒤늦게 나오는 명진과 함께 일행은 모두 문을 통과한다.
그러자 마주하는 건.
“오빠!”
“정환아!”
“정환 씨!”
“얌마! 차정환!”
“사장님! 여기요! 여기!”
“환아!”
반가운 목소리들.
누군가, 정환을 맞이하기 위해, 이곳 먼 곳까지 나선 것이다. 정환은 익숙한 목소리들을 단번에 알아본다.
사랑스럽게, 또 봄바람같이.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들려오는 모히토처럼 상큼한 시은의 외침과.
낮지만 부드럽게 들려오는 싱가폴 슬링같은 목소리의 기준, 그리고 파리지앵처럼 우아하지만 날카로운 맛이 있는 재훈.
슬래지 해머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지만 묵직한 느낌이 있는 정우와, 애플 마티니처럼 톡톡 튀어 오르는 윤수의 목소리.
또.
“환아···!”
흔들릴지언정, 뒤섞이진 않는. 본드. 제임스 본드 같은 아버지의 목소리까지.
정환은 자신을 버선발로 마중 나온 이들의 목소리를 잔으로 떠올려 본다.
재밌지만, 아련한. 그리고 바텐더스러운 상상에 그가 자신도 모르게 방싯 웃어 버리고 만다.
정환은 일행 중 홀로 한 발 앞으로 나서 걸음을 멈춘다. 뒤에 선 다른 일행들은 정환의 이런 시간을 위해 한발을 양보했다.
“녀석···!”
“아버지···!”
제일 먼저 다가오는 건 보드카 마티니였다. 세상의 어느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던 그처럼.
정환 역시, 무소의 뿔처럼 나아가 손에는 묵직한 기념품을 챙겨왔다.
늘 지켜보겠다던 그의 시선이 따스하게 정환에게 꽂혔다.
“잘했다. 잘했어. 우리 아들.”
“아버지···. 저. 우승했어요.”
“안다. 다 봤다. 다 봤어. 장하다. 내 아들!”
- 와락!
늘 단정하게 스스로를 절제하던 제임스 본드가 슬쩍 무너진다. 오늘은, 감정이란 것에 조금은 뒤섞일지도 모르는 그였다.
“일로와! 차정환! 짜식!”
“정환아! 이 녀석!”
정환의 아버지가 그를 한번 와락! 끌어안고 나자 연달아 기준과 정우가 다가온다.
장난스레 정환을 끌고 가 여기저기 흔들어 대는 두 사람.
만약 정환이. 아니, 구원을 주는 누군가가. 정환에게 낙하산을 달아주지 않았다면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다른 업계로, 또 구석으로. 내몰리며 이들 역시 추락을 겪었을 수도 있다.
정환의 등에서 펼쳐진 낙하산은, 이렇게 어쩌면 또 다른 이들도 품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저도···.”
늘 이런 자리에는 먼저 자신을 찾더니. 낙하산에 폭! 안겼던 중년의 바텐더가 슬쩍 이들에게 다가섰다.
세 사람의 스승인, 명진이다.
“마스터도 이리 오세요! 아르센의 경사잖아요!”
“윤수. 윤수도 이리와! 얼른!”
“뭡니까! 아르센만 이러기 있습니까? 종로의 경사잖아요!”
“아. 일단 아르센부터!”
바텐더들은 저마다 정환을 한 번씩 얼싸안으며 시간을 보낸다. 정환은 그런 들러붙음이 싫지 않아 이들의 품에서 오갈 뿐이다.
그리고 모두의 축하가 끝날 즈음 정환에게 다가서는 또 다른 한 사람.
정환의 연인이자, 새로운 시작을 알렸던 사람이 그에게 다가온다.
상큼한 모히토 향이 살랑 불어와 그에게 안기는 것만 같다.
“축하해요. 멋졌어요. 정말.”
시은은 작은 꽃다발 하나를 내밀며 정환의 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흐뭇한 풍경들.
잔으로 남은. 낙하산이 없었다면, 남지 못했을 이들이 무언가를 이뤄내고 돌아온 이를 웃으며 반기는 풍경이 정환은 싫지 않았다.
커다란 낙하산이 만들어 낸 하나의 그늘. 그 그늘에는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들어간 모양이다.
정환은 쏟아지는 축하와 장난 사이로 멀리 누군가의 시선을 느껴본다.
보이는 건 바텐더스러운 복장을 갖춘 한 사내의 모습. 정장 바지에 넥타이. 그리고 베스트만을 걸친 사내가 멀리서 정환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아니.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정환은 빠르게 오가는 공항 풍경에 확신할 순 없었다.
그리고 잠시 돌아서자, 더는 알 수 없는 사내의 시선.
다만, 돌아서며 잠시 멈췄던 사내의 입이 그런 말을 뻐끔거리는 것만 같아 정환은 또 밝게 웃는다.
정환이 분명하게 바라본 그의 입은.
‘입에 맞으셨다니, 다행입니다-.’
라는 제법 바텐더스러운 말을 뱉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환은 시선을 거둬 자신과 함께 낙하산 아래에 안긴 이들을 바라봤다.
기나긴 추락과 비행의 끝은, 안전한 착륙이었다.
2.
“자. 이번에 열게 될 2호점의 위치라네. 교육은 자네가 직접 담당할 생각이겠지?”
“물론이죠. 윤수 씨는 본점 매니저 일로도 지금 버거워서요.”
어느덧 월드 클래스 글로벌 대회가 있고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많은 것이 바뀌었다면 바뀌었고, 또 그대로인 건 여전히 그대로일 수 있는 시간.
다만, 정환과 아실, 그리고 종로는 그중에서도 바뀐 축에 속한다는 말이 딱 어울릴 것이다.
“자네야말로 버겁지는 않겠나? 본점 근무에 교육까지. 이거, 보통 사람은 못 할 일이지 않나?”
“전 보통 사람이 아니니까요.”
“아. 그래. 어련하시겠나. 챔피언. 이제 새로운 챔피언이 나오면, 그 칭호도 박탈이네.”
“에이. 아니죠. 김 교수님! 역대 최고의 챔피언! 아직도 해외에서는 그렇게 부르는걸요!”
“크흡. 뭐. 자네는 여전하군. 스승에 대한 그 존경은.”
바뀌지 않을 것만 같은 풍경 속에서 바뀐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
여전히 아실의 재정을 책임지는 건 김태현 교수. 지동철 교수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복귀했지만.
“난 그런 거 모르네. 그저 정환 군이 만드는 잔. 그거면 되니!”
“어허! 돈은 다 가져가면서, 일은 내가 다 하고!”
“아, 투자자를 끌어왔지 않나! 투자자! 야나기! 아니, 그 응? 유정호 대표!”
둘은 여전히 투닥거리며 일을 서로에게 떠넘길 뿐이다.
아실은 김태현 교수의 말처럼 2호점이 문을 연다. 종로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도 아실의 맛을 볼 수 있는 2호점이.
이건, 지동철 교수가 일본에서 친해진 유정호 대표에게 투자금을 끌어온 덕분이다.
옥보단과 파우스트로 남은 그에게서.
두 사람은 투닥거리며 또.
- 대앵-!
사제락을 부딪히며 함께 목을 적셨다.
“야! 야! 챔피언! 나와! 나오라고!”
한창 이야기가 깊어질 무렵, 누군가의 높고 시끌벅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앞치마를 두르고는 거침없이 아실의 마당을 가로질렀다.
“네. 정우 형.”
“저번에 ‘숲’에서 증류한 진 어딨어? 남은 거 있지?”
“그걸 왜 여기서 찾아요?”
“네가 싹 쓸어갔다며! 상도덕도 없는 챔피언 놈아!”
“아니, 아무도 안 써서···!”
“됐고! 내놔! 줘! 안 주면 못 가! 아! 장사 접어! 아실 망해라! 르블랑 만세! 챔피언이 횡포를 부린다! 아! 동네 사람들!”
“동네 사람들 다 사장님 편이거든요!”
정환의 든든한 사형이자, 언제나 장난기가 가득한 정우였다. 바 안에 앉은 손님들은 정우의 성격이 원래 그런 걸 아는지, 다들 웃으며 넘어갈 뿐이다.
“빨리 줘서 보내게. 그래야 내가 르블랑으로 옮기지. 바텐더가 없는 곳에 가서 뭐하겠나. 허허.”
“오늘은 기준 형도 있어요.”
“아, 그럼 주지 말고. 흐흐.”
정우와 기준이 종로에 새로운 가게를 문 열었다. 이름은 아르센2가 아닌 르블랑.
아르센 뤼팽과는 뗄 수 없는 그 이름이 이들의 새 간판이 되었다.
클래식한 실력에 멋들어진 인테리어가 어우러진 르블랑은 요즘 가장 좋은 평을 받는 곳 중 하나였다.
여전히, 아르센의 향기가 남았다며.
“서 부장. 자네 정말, 이 가게에 가본 적이 있다는 말인가?”
문 앞에서는 다른 손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실이라는 곳이 이제는 누구나 아는 가게가 된 만큼, 정환과의 친분은 자랑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것.
누구나 자신이 받는 잔이 최고의 것이길 바라는 마음은 있기에, 아실의 대문을 넘는 이들의 발걸음이 더욱 기뻐진 것만 같다.
환상을 잡아 이를 잔으로 풀라던 전 스승의 말이, 여전히 와닿는 정환이었다.
“아, 그럼요! 보십시오! 차 사장!”
“서 부장님. 오셨군요.”
마당에 드러누운 정우를 넘어 서성훈 부장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어깨가 잔뜩 올라간 것이 정환이 아는 척을 한 게 뿌듯한 모양이다.
“늘 먹던 거로!”
바에서 단골만 할 수 있다는 주문을 남긴 그가 돌아선다.
“오오오!”
“사장님이 부장님 이름을?”
“단골 맞군!”
일행들은 놀라워하며 연신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너무해요. 서 부장님. 일행을 둘이나 데려오면 어떡해요? 안 그래도 손님이 많은 날인데!”
“응?”
두 사람 사이로 한 명의 젊은 여성이 투정 부리듯 말을 이어간다.
이야기를 듣던 두 일행은, 그녀의 목소리가 익숙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유, 유미?”
“가수 유미이이이이이???”
싱어송라이터로 이제 이름을 제법 크게 알린, 스타라 불러도 모자라지 않을 그녀를 서 부장의 일행은 몰라보지 않았다.
그녀의 앞에는 여전한 브랜디 알렉산더가 자리하고 있다.
“쉿. 여기서 떠들면 사장님한테 쫓겨나요! 앉아요! 빨리!”
“크흡. 넵넵! 앉아야죠!”
“브랜디 알렉산더 드실래요? 맛있어요!”
그녀는 바라는 공간의 특색을 그대로 이해한 듯, 현실의 대스타란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누구든 바의 묵직한 문을 들어선 후면, 현실의 존재를 잊을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이다.
또.
이어지는 건 구석에서 홀로 밀리언 달러를 홀짝거리며 안을 지긋이 바라보는 한 노인의 모습.
사람이 많아졌다지만, 늘어난 종로의 많은 바와 여러 배려가 합쳐져 여전히 같은 모습을 지켜가는 아실의 모습이다.
“자자. 메이킹 들어갑시다! 대희 씨가 앞에 주문 들어온 두 잔을 만들고 주하 씨는 한 잔만. 나머지는 내가 만듭니다!”
그리고 또 달라진 건 아실을 호령하는 다른 한 사람의 모습. 이제는 매니저라 불리는 윤수는 어느새 생긴 새로운 두 바텐더를 호령하며 매니저의 몫을 제대로 해낸다.
방송이며 인터뷰며 유명세를 제대로 치러 여기저기 불려다니는 정환이 자리를 비울 때면.
언제나 아실을 지켜온 건 그의 몫이었다.
“사장님도 메이킹 하셔야 해요!”
윤수는 이제, 정환까지 호령할 정도다.
“그럼요!”
정환은 기분 좋게 윤수의 호령에 응하며 안으로 셰이커를 올려든다.
그의 뒤로는 여전한 백바가 든든히 바텐더의 등을 지키고 있다.
그런 백바에 장식된 건.
- World Class Korea Champion.
- World Class Champion.
- Word Best 50 Bar.
라 적힌 세 개의 트로피.
아시아 베스트에서 밀어주겠다던, 그레인 호텔 윤현민 부장의 생각은 정환이 거둔 예상 밖의 성적 덕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대신, 얻은 건 그보다 값진 트로피. 정환의 아실은, 월드 베스트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며 당당히 한국을 대표하는 바가 된 지금이다.
재훈의 ‘숲’도 주용의 ‘봉황당’도. 그리고 다른 바들도. 점차 아시아 베스트 100과 그 외 순위표에 계속해서 언급되는 모양새가.
곧, 아실을 이어 베스트 50에 들 바가 종로에는 늘어날지도 모른다.
정환은 문득 자신이 이룬 것들이 한곳에 모인 지금을 바라봤다.
뿌듯한 감상이 조금 몰려오려던 때.
이런 감상은 언제나.
- 딸랑.
하는 누군가 가게에 들어서는 소리로 깨지곤 한다.
정환은 감상을 깨고 나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늘 그렇듯.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처럼.
“어서 오세요. ‘바’, 아실입니다.”
자신만의 인사를 전해 보는 정환.
그저 누구나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의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