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잔. 누구에게나 날개는 있다. >
1.
- 베스트 서브?
- 자유주제라니···. 미쳤군.
- 박 터지겠는데? 이러면 결과는···.
- 아. 아무도 모르지. 누가 될지.
- 예선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게 이런 말이었군.
- 야. 배당이 어떻게 돼?
- 에라이. 아무나 이겨라!
‘The Best.’라는 짧은 문장이 화면을 채우자, 이내 장내는 술렁거림으로 가득 찬다.
제일 먼저 반응이 온 곳은 관중석. 대부분이 업계에 빠삭한 이들로 채워진 관중석은 화면을 장식하는 문장이 무얼 뜻하는 것인지 바로 알아보는 눈치다.
“완전 작정하고 과제를 내버렸군.”
“심각한 건가요?”
“암. 심각하지. 이건, 말 그대로 판을 깔아줄 테니 제대로 한 판 붙어보란 말이 아닌가.”
다음으로는 선수와 관계된 이들의 반응이 술렁거린다. 화면을 지켜보던 김태현 교수는 걱정 섞인 한탄을. 강성용 주임은 잘 모르겠다는 표정과 의문을.
그리고 명진은 걱정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무대를 바라봤다.
모든 역량을 쏟아내 한 판을 붙는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일 수 있다.
다만, 여기에 모든 걸 거는 사람들. 예컨대, 자신이 믿는 무언가를 거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패배를 경험한 이에게는, 적잖은 충격이 될 것도 사실일 것이다.
“스승님. 사형이 진다면···”
충격이 크지 않을까요. 특별 초청석에서 제자들과 무대를 지켜보던 쿠즈하라 미즈오의 옆에 앉은 다른 제자도 걱정스레 사지마 츠바사를 걱정해 본다.
“두어라. 진다면, 그건 그거대로. 놈에게도 거름이 될 터이니.”
쿠즈하라 미즈오는 그저 무거운 얼굴로 제자와 제자 옆에 선 다른 바텐더를 바라볼 뿐이다.
이런 과제가 나온 것에는 이번 대회에 참가한 바텐더들의 영향도 없진 않아 보였다.
이건, 어디서 들려온 말이 아닌 관계자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한 하나의 합리적 의심.
과제가 나온 것도 그렇고, 자리의 배치 역시 그런 의심을 짙게 만들었다.
마치, 주최 측은 이번 대회에서 가장 격렬하게 격돌 중인 두 사람이 누구인지 안다는 것처럼.
정환과 사지마 츠바사의 자리를 딱 붙은 정중앙에 그대로 이웃하게 배치해 두었다.
두 사람의 싸움을 대회 측에서도 본격적으로 붙여보려는 모양이다.
두 사람의 사정이야 무엇이든 결국 주최 측은 자극적인 걸 원하고 그에 따라 관심을 받길 원한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국가성과 예선 수석과 차석이라는 두 사람의 프로필은, 이런 주최 측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한 판 붙으라고 판을 제대로 깔아주는군요.”
붙은 부스에서, 바로 옆자리에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사지마 츠바사가 정환에게 말을 붙여온다.
정환은 슬쩍 눈빛만 옆으로 보내 그를 바라봤다.
“그렇네요.”
이전보다는 다분히 차분해진 정환의 어투. 여유까지 느껴지는 말이 들려오자, 사지마 츠바사는 짐짓 놀란 눈치다.
“달관인가요?”
“무엇을 말씀이죠?”
“사람이···변한 것 같아서.”
“그게 무슨 문제라도?”
“그런 건···. 아닙니다만. 최선을 다해서 승부를 봤으면 한다는 건 변함이 없습니다. 혹여라도 포기하고 달려드는 상대라면 김이 빠지니.”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 어느 때보다. 진심이니까요. 사지마 바텐더도 최선을 다 해주시길 바랍니다.”
사지마 츠바사는 괜스레 한 번 정환을 떠봤다가는 돌아오는 말에 또 한 번 당황을 금치 못한다.
손님에 크게 집중하진 않는다. 다만, 바텐더기에 자연스레 배울 수 있는 기술은 분명 있었다.
사람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를 읽는 것.
바텐더로서 적지 않은 경력의 사지마 츠바사는 지금 자신의 옆에 선 이가 풍기는 분위기가 이틀 전과는 사뭇 다름을 모르지 않았다.
“···뭐. 그렇다면야. 말씀드렸듯, 최선을 다해 절 이겨보시죠.”
그는 큰 승부를 앞두고는 작은 말로 대화를 끝내려 했다. 하지만.
“아뇨.”
!
정환의 이어지는 말이 고개를 돌리려던 그를 붙잡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
“사지마 바텐더를 이기겠다는 생각으로 임하진 않을 겁니다. 그저 최고의 한 잔. 누군가를 위해 만들어 가는 그 잔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생각이 변한 정환의 다짐 한 마디. 사지마는 그런 정환을 세차게 노려보고는 고개를 휙! 하고 돌려 버린다.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하게 저 바텐더는 자신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만 같다.
“두고 봅시다.”
할 수 있는 건 자신도 결의를 다지는 게 전부였다.
“지금부터 자유롭게 메이킹에 들어가시면 됩니다! 수단과 방법은 자유! 어떤 형식이든 다 허락되는 과제가 파이널입니다! 참가자는 직접 잔을 만들고 완성 후, 잔의 이름을 알려주시면 됩니다! 부저를 누르십시오! 카메라가 참가자를 찾아갈 것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진행자의 거친 외침으로 종결된다. 그리고 시작에 점점 다가가는 결승전.
진행자는.
“지금부터! 대망의 결승전! 메이킹을 시작합니다아아아아!”
우렁찬 외침으로 결승전의 막이 올랐음을 선포한다. 그와 동시에 여러 바텐더의 손이 웅장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 타타타타타탓!
- 치킥! 치킥!
- 화아아아아아아!
자유주제라는 과제 덕에 바빠지는 건 바텐더들. 바텐더로 살아온 세월이 적지 않은 이들이기에 저마다 비장의 한 수 정도는 가슴에 품고 있었던 이들이다.
그런 이들에게 놀 수 있는 하나의 판을 선사해주는 대회.
누구는 그저 경험을 위해, 누구는 자신이 상상으로만 그리던 메이킹의 시험을 위해.
그리고 누구는 믿는 것을 위해. 바텐더들은 저마다 속에 숨겨둔 비장의 한 수를 꺼내 들기 시작했다.
화려한 메이킹 기교가 차례대로 무대를 장식했다.
“아! 태국 바텐더의 훈연이 시작되는군요! 처음부터 잔에 향을 입혀 칵테일을 만들어 갈 모양입니다!”
“말씀드린 순간! 잔에 시럽으로 코팅을 입히는 프랑스 바텐더! 푸드 칵테일인가요?”
“와우! 믿을 수가 없습니다! 상해 바텐더는 벌써 메이킹을 끝내가고 있습니다!”
“속도가 중요한 주제가 아닌데, 조금 더 신중할 필요가 있지 않나요? 아.”
“미국의 제이미 로스가 분자 칵테일을 시도하네요! 젤리피케이션을 통해 입자감을 주려 하는 모양인데요!”
“믿을 수가 없군요! 브라질 바텐더, 가니쉬로 용설란을 택했습니다! 과연, 브라질입니다!”
결승전은 다이나믹하게 중계되기 시작한다. 이건, 주최 측에서는 올 한 해 마지막으로 관심을 끌어모을 수 있는 최고의 장.
그에 걸맞게, 주최 측은 중계진까지 투입하며 대회의 열기를 끌어 올리는 것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입담이 좋기로 유명한 바텐더와 스포츠 아나운서의 중계가 장내와 방송을 타고는 관중에게 흘러갔다.
덕분에 열기가 더 뜨겁게 타오르는 대회장이었다.
“아. 사지마 츠바사 바텐더가 움직입니다!”
그리고 이런 중계진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는 건 사지마 츠바사의 움직임.
사지마 츠바사는 오랜 시간 준비한 사람처럼 절도 있는 동작으로 자신이 그린 잔을 만들어 갔다.
잔에는 리밍도 되어 있고 만드는 방식은 셰이킹. 다만, 색은 처음 보는 오묘한 색을 지닌 것이 그의 시그니처로 보였다.
“색이 정말 오묘하네요! 아! 하얀색에 또 무슨 기교를 부리는 거죠? 색이 변합니다! 잔에도 무언가를 한 것만 같은데요!”
중계진은 그런 사지마의 모습을 보며 목청을 잔뜩 높였다. 이번 대회를 지켜보는 이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는 건 그였으니까.
카메라가 또 한 번 움직인다. 자연스레 사지마의 옆으로 이동하는 중계 카메라.
당연히 카메라가 향한 곳은, 사지마와 이번 대회에서 큰 스토리를 담당하는 정환의 부스였다.
하지만.
“어엇! 뭡니까! 한국의 차정환 바텐더!”
카메라가 정환을 비추자, 중계진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카메라에 모습을 나타낸 정환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습니다!”
여전히 눈을 감고는 아무런 움직임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 제약이 있는 과제는 아니다.
빠르게 만들어 낸다고 가산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전략적으로 심사를 보는 이들의 혀가 쌩쌩할 때 맛보게 하겠다는 전략을 세울 순 있지만, 이 역시 임시방편일 터.
그가 가만히 있는 이유를,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중계진이다.
“포기···한 걸까요?”
“그러긴 너무 아쉬운데요! 지금까지 사지마 츠바사에 이어 차석을 수성해 온 차정환 바텐더입니다! 이건, 전략이 아닐지!”
어떻게든 가라앉을 수 있는 분위기를 살려보려는 중계진들. 카메라는 그런 중계진의 성화를 느꼈는지 서둘러 다른 곳을 비춘다.
카메라가 이동한 후에도. 여전히. 눈을 감고는 미동이 없는 정환이다.
정환은 카메라가 자신의 뒷사람 둘을 더 비춘 후에야 눈을 뜨고는 자신의 옆에 선 바텐더들을 바라봤다.
- 타타타타탓!
- 살각! 살각! 살각!- 또르르르륵. 또르르르륵!
듣기 좋은 소리와 함께 열정을 가득 담은 현장이 다가온다. 누군가는 잔 자체를 위해, 또 누군가는 그를 마실 사람을 위해. 최고라 불리는 한 잔을 완성하기 위해 열중인 모습.
정환은 그런 모습을 한 번 훑고는 이내 하나의 모습을 그려본다.
‘누가 될까.’
저 잔을 마실 사람은 누가 될까. 그런 재미난 상상을 해보는 정환.
그런 상상은 오래 지나지 않아, 결국 하나의 결론에 닿고 만다.
‘모두.’
모두. 즉, 누구나가 바로 그 답일 터. 바텐더가 있다면, 누구나 그의 앞에 앉아 저 잔을 마실 수 있다.
이건, 간단하면서도. 정환이 한참을 돌아서야 닿을 수 있던 답이었다.
그렇다면, 바텐더는 잔에 무엇을 담아야 할까. 누구나 즐길 수 있고, 누구나 위로할 수 있는 그런 잔.
아마, 정환은 그걸 답으로 정하고 싶을 것이다.
바에는 누구나 찾아온다. 그렇다면, 누구나 쉴 수 있는 공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통하는 잔이 하나는 있어야 할 터.
정환은 자신이 만들 잔에 대한 윤곽이 점점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높이 날아오르는 이. 그리고 한없이 추락하는 이.’
기분 좋은 일을 만나 누구보다 기분 좋게 날아오르는 이에게도. 또, 비사를 만나 한없이 추락하는 이에게도.
그 모두에게. 누구에게나. 바텐더가 건넬 수 있을 한 잔.
그런 잔을 그려가는 정환의 머릿속에는 누군가의 모습이 점점 선명해진다.
한없이 추락하던 자신에게. 잔을 건넸던 그 바텐더의 모습이.
그리고 그런 모습이 선명해지자 움직이는 정환의 손.
‘그래, 이거라면.’
정환은 그대로 몇 개의 재료를 챙겨 이를 셰이커에 넣고는 계량하기 시작했다.
메이킹을 촬영하던 카메라는, 갑작스러운 정환의 움직임에 어떤 재료가 셰이커로 향하는지를 놓쳐버리고 만다.
- 타, 탓!
어느덧 계량이 끝나고는 뚜껑이 닫혀버리는 정환의 셰이커. 잔을 하나 준비해둔 정환은 그대로 셰이커를 올려 들고는 이를 흔들 준비를 마친다.
자세를 잡은 그의 눈에 하나의 선명한 이미지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요동치는 이미지는.
‘파도.’
파도.
이상적인 모습이라 불리는 바로 그 파도였다.
파도는 아래와 위를 모두 담은 하나의 움직임이다. 그런 움직임에 담을 진심은 누구에게나 닿길 바란다는 것.
담을 마음까지 모두 정하자. 이내 그의 셰이커가 선명한 소리를 울리기 시작했다.
들려오는 소리는.
- 철써어억! 철써어어억! 철써어어어어어억!
눈가에 맺힌 이미지. 그대로였다.
“잡아! 당장! 사운드 최대로 올리고!”
바텐더 출신의 무대 감독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무엇을 얼마나 넣었는지 놓친 것이 희대의 실수.
나중에야 계량을 공개한다지만, 바텐더는 가끔 무대 위에서와 내려온 계량이 다르기도 한 법이다.
그는, 역사적인 순간을 놓친 것만 같아 이후의 순간은 절대 놓치지 않으려 한다.
들려오는 저 소리를 모르는 그가 아니었다.
“파도···!”
정통 바텐더는 아니지만, 분명 파도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다. 김태현 교수는 음향 장비를 타고 들려오는 정환의 셰이킹 소리에 입을 쩍 벌리고 만다.
누구보다 그의 잔을 많이 받아보았다 여겼거늘. 이건, 처음 듣는 소리다.
그리고.
“아아. 좋은 소리입니다. 좋은···.”
고개를 들고 눈을 감은 채 제자가 울려오는 청명한 파도 소리를 감상하는 명진의 모습.
명진은 마치 오케스트라를 감상하는 이들처럼 경건한 자세로 정환의 소리에 집중한다.
이건, 앞줄에 앉은 쿠즈하라 미즈오도 마찬가지.
“다들 집중하거라. 저게! 저 모습이! 진짜 신의 손일 테니!”
그는, 제자들에게 호통 같은 당부만 하나를 전하고는 그대로 정환의 손에 집중했다.
파도는 기쁨을 가져오고, 또 슬픔은 쓸어 가는 바텐더의 이상향일 것이다.
“······.”
잔을 마무리하던 사지마 츠바사 역시, 정환이 들려주는 소리에 잠시 정신을 팔고 만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해.
그런 말을 계속 중얼거리며 자신의 잔을 마무리하는 그였다.
- 철썩! 툭.
무언가를 거칠게 쓸고 가던 정환의 셰이커가 일시에 셰이킹을 멈춘다.
그리고.
- 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래로 뿜어지는 영롱한 빛깔의 한 액체. 조명을 받아 여러 빛이 중첩되어 더욱 빛나 보이는 물줄기가 길게 늘어지며 잔으로 쏟아졌다.
빛. 말 그대로 빛이 쏟아지는 것만 같은 모습이다.
- 차아아악!
끝을 향해 달리던 빛이 누군가의 손에서 일시에 광채를 끊어낸다. 당연히 손의 주인공은 바텐더.
정환은 잔을 가득 채운 영롱한 액체를 잠시 내려보고는 주변을 살핀다.
그리고 아무런 가니쉬도 없이 그대로 잔을 앞으로 내밀며 부저를 울리는 정환.
- 삐이이익!
부저가 울리자, 이내 카메라와 함께 심사 위원들이 정환의 앞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빠른 심사를 위한 그들의 움직임. 그리고 이들은.
“차정환 바텐더. 잔은 제출 완료되었고, 이제부터는 어떤 메이킹도 불가합니다. 오리지널 칵테일인가요? 잔의 이름은요?”
형식적인 안내와 함께 잔의 이름을 묻는다. 질문에도 잠시 답이 없는 정환.
이건, 정해진 이름이 없는 정환만의 오리지널일 것이다.
아직 이름은 없는 걸까. 답이 나오는 게 늦어진다. 그리고 잠시 기다려달란 표시를 하고는 또 한 번 눈을 감아보는 정환.
‘고공을 나는 이에게는 순간을 더 즐길 수 있게. 한없이 추락하는 이에게는 바닥을 차고 다시 한번 날아오를 기회를.’
정환은 잔의 이름을 생각하며 자신이 잔에 담은 진심을 또 한 번 떠올려 본다.
그러자 선명하게 떠오르는 잔의 이름.
정환은 눈을 뜨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카메라와 심사 위원. 그리고 관객석을 향해 이를 말해보려 한다.
“잔의 이름은···”
이제야 담을 수 있었던 진심. 자신도 모든 걸 겪어 보았기에 만들 수 있었던 이 잔의 이름을 덤덤히 뱉어가는 정환.
그의 입에서 나온 잔의 이름은.
“파라슈트(Parachute).”
기회를 주는 누군가의 것과 같은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