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잔. 훨훨. >
5.
“이러지 마십시오···.”
정환은 한 때 모든 걸 배웠던 스승의 너무도 작아 보이는 모습에 얼른 그를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들려주는 하나의 결심.
“꼭 이겨보겠습니다.”
이건, 스승과 제자로서 나누는 두 번째 다짐일 것이다. 현재와 과거. 두 시간의 스승께 같은 약속을 내보이는 정환.
결국에는 맞닿아 있는 두 사람의 가르침이다.
“신의 손이니 뭐니 하는 말로 불리지만 이 쿠즈하라 미즈오도 결국에는 반쪽짜리 바텐더일 뿐입니다.”
!
“아닙니다! 스승···. 아니. 쿠즈하라 상을 누가 감히 그렇게 부를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절대요.”
“아닙니다. 이건, 오래된, 그리고 낡은 생각이었습니다. 이렇게 살다가는 결국에는 반쪽짜리 바텐더로 끝낼 수밖에 없을 거라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정환은 속에 가득 들어차는 생각을 양껏 목으로 뿜어보려 했다.
하지만.
“바텐더란, 결국에는 앞서 말한 것처럼 경험이 중요한 이들입니다. 이런 말이 부끄럽지만···, 실패를 경험한 적이 없는 저는 반쪽짜리가 맞습니다.”
“······.”
전해지는 고해 성사에 전 제자는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오늘의 만남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쪽으로 흘러가는 것만 같은 기분.
답을 구하러 왔다가 부탁을 받고 가질 않나. 이전 생에서는 듣지 못했던 스승의 고해를 듣질 않나.
여러모로 예상이 여럿 빗나가는 하루다.
“당시만 해도 바텐더가 되기 쉽던 시절이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시절이었고, 운이 좋게 좋은 가게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었죠. 이후로도 탄탄대로. 도쿄 회관을 지나 긴자의 명문까지. 그렇게 10여 년을 실패 없이 지내다 보니 주변에서는 저를 신의 손이라 부릅디다. 손에 남은 건 적당한 부와 명성. 덕분에 자식들과 가족들도 부족할 게 없었고. 이후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더할 나위 없었지요.”
“실패가 없었다는 걸 그런 식으로 말씀하다니요···. 오히려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차 군은 실패에서 무언가를 배운 적은 없습니까? 또, 실패했기에 느낄 수만 있는 감정은요?”
“그야 물론 있지만···”
다 가진 당신이 그걸 부러워하냐. 정환은 저 꼬장꼬장한 노인네가 또 욕심을 부리는 건가 하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하지만.
“바텐더기에 그런 걸지도 모르지요. 예.”
이어지는 쿠즈하라 미즈오의 말이 그런 뜻이 아님을 표해본다.
“바텐더가 아니었다면, 실패를 부러워하는 만용도 저지르지 않을 겁니다. 다만, 바텐더는 그래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네?”
“바에는 누가 온다고 생각합니까?”
“모두. 모두가 오는 곳이 바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모두. 모두가 오는 곳이죠. 때로는 기쁜 사람. 또 때로는 실패를 맞이해 슬프고 축 저진 사람까지! 바텐더의 앞에 앉는 사람은 언제나 정해져 있지 않은 법입니다.”
바에는 모두가 찾아온다. 바에 오는 이는 언제나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이다.
때로는 기분이 좋아 광대가 승천한 사람부터 때로는 현실의 비사에 쫓겨 어깨가 축 처진 사람까지.
저마다 바를 찾는 이유는 다른 법이다. 그저 변하지 않는 것은, 그런 바를 지키는 바텐더뿐일 것이다.
쿠즈하라 미즈오의 나오는 깊은 말 역시, 이번에도 손님에 닿아 있다.
“기쁨에 흥겨워 가벼운 발걸음으로 바를 찾는 손님에게는 저 역시 같이 기쁨을 나누며 잔을 건넬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공감도 가능하겠지요. 허나. 실패란 비사를 만나 슬픔에 젖은 손님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저는 모릅니다. 해서, 반쪽짜리라는 겁니다.”
“꼭 알아야만 위로를 전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도 쿠즈하라 상께서는 잘 해오시지 않았습니까?”
“공감했습니다. 예. 그런 분들에게도. 허나, 그게 진실로 공감한 것인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스스로 알지 못한다는 걸 인식할 정도니, 듣는 분들께는 어땠을지···.”
쿠즈하라 미즈오는 잔뜩 깊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위로 올려든다.
복잡한 심경이 감싸는 그의 모습이 지금 뱉어오는 말들이 진심임을 증명하는 것만 같았다.
“부럽습니다. 차 군이. 젊었을 때 겪을 수 있는 실패와 시련. 이를 겪고 난 후라면, 차 군은 더 멋진 바텐더가 될 수 있겠지요. 그를 바탕으로 진심으로 손님에게 다가갈 수 있는.”
“···쿠즈하라 상···.”
“다만, 기대도 됩니다.”
!
“만약 차 군께서 츠바사 놈을 이겨준다면. 그래서 츠바사와 저에게도 이런 실패가 하나의 경험이 된다면.”
!
“저는 더 나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노년에 무르익은 바텐더의 입에서 기대감이 터져 나온다. 들려진 고개에서 보이는 건 회한과 함께 비치는 작은 설렘.
그는, 아직. 더 나아갈 자신의 길을 기대하는 사람처럼만 보였다.
“그때는 진실로 다가갈 수 있겠지요. 손님께. 기쁜 마음으로 고공을 향해 떠오르는 손님과 같이 나는 법을 이제까지 익혔다면, 이제는 한없이 추락하는 손님께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할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차 군은, 저보다 먼저 그 길을 가는 사람일 겁니다. 부럽습니다.”
“함께 나는 법과 함께 떨어지는 법···.”
정환은 노년의 바텐더가 슬며시 던져오는 시구 같은 말들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긴다.
어쩌면, 저 말이. 바텐더가 해야 할 일에 대한 모든 것을 담은 함축적인 말일 지도 모른다.
‘함께···.’
“함께 떨어지더라도, 떨어져 본 사람이라면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허허. 말하고 보니, 늙은이가 허공에 뜬 이야기를 쭉 풀어 놓았군요. 죄송합니다.”
‘바텐더가 해줄 수 있는 일.’
답이 없자, 민망하게 웃어 보이는 노년의 바텐더 앞에서 손님은 잠시 턱을 들고 심상에 빠진다.
그리고 흐릿하게 정환의 머리에 보이는 누군가의 모습.
잘 기억이 나진 않는다. 다만, 깔끔했고, 건조했지만 무언가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스치는 정환.
대화는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받았던 위로는 잔일 터. 정환의 심상이 사람에게서 잔으로 그렇게 천천히 옮겨져 갔다.
앞에 선 바텐더는 잠시 한 발을 뒤로 물리고는 손님의 명상을 방해하지 않는다.
지금 함께하는 바텐더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전부일 것이다.
- 철써어억! 철써어어억!
홀로 빠진 감상 속에서 들려오는 건 한 바텐더가 만들어 가는 잔 속의 셰이킹 소리.
저기에는 무엇이 담겼을까. 완벽에 가까운 파도 소리가 귓가를 때릴 때.
여전히 선명해지지 않는 감상 속에서 정환이 슬쩍 눈을 뜬다.
감상과는 반대로, 훨씬 선명해진 것만 같은 머릿속이다.
“무언가, 떠오른 모양이군요.”
“조금. 조금 머리가 시원해진 느낌입니다. 오래도록 잊었던 게 떠오른 것도 같구요.”
“다행입니다. 잡념으로 가득 찬 머리를 비울 수 있었다는 것. 그것 역시 하나의 진일보일 겁니다.”
“오늘의 담론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허허. 그저, 잔을 건넬 뿐. 바텐더는 속으로만. 속으로만 의미를 둘 뿐입니다.”
“그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쿠즈하라 미즈오는 분위기가 한층 달라진 정환을 보며 잠시 말을 멈췄다.
같은 태도로, 잠시의 감상을 거쳤을 뿐임에도. 사람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다.
“무언가···. 제대로 스쳤군요. 잘 알지는 못하지만 때로는 그런 기분을 받는 이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허허. 바의 신이라도, 다녀간 겁니까?”
“글쎄요. 예. 그런 거 같습니다. 신. 그런 말 밖에는 설명이 불가능하죠.”
“흠. 어쩌면 한 번 정도는 늙은이에게도 스쳐주진 않을까. 그런 상상도 했습니다만, 선택은 결국 젊은 바텐더군요. 아니. 어쩌면, 제게도 스친 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제자와 관련해 말년에라도 실패를 선물 받았으니.”
“저도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바에 신이 있다면 주는 건 시련이나 실패는 아닐 겁니다.”
“시련이 아니라?”
“기회. 기회를 주는 거라. 전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모든 걸 바꿀 수 있는, 그런 기회요. 그 사람뿐이 아니라 주변의 다른 바텐더들에게도 기회를 주는, 그런. 어쩌면, 잔으로 주실지도 모르죠.”
“기회를 준다라. 거기에 잔으로. 과연. 그럼, 바의 신은 바텐더의 모습이려나요?”
“날개가 달린 모습은 아닐 겁니다. 대신, 날 수 있게는 해줄 겁니다. 그 역시, 잔으로.”
“마셔보고 싶군요. 그 잔.”
- 씨익.
두 사람은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주고받고는 서로를 바라보며 진하게 웃는다.
언제 또다시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이게 이대로 끝일 수도 있고.
다만, 이번에도. 그에게서는 많은 걸 얻어가는 정환이다.
“가야 할 거 같습니다.”
“시간이 그렇게 되었군요. 오늘의 시간은 만족하십니까?”
“더할 나위 없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진심입니다.”
“저 역시 감사합니다. 속에 든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습니다. 손님 중에도 유독 편한 분들이 있습니다. 마치, 오래 알던 사람처럼. 차 군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익어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명진이나 쿠즈하라 미즈오를 보며 정환은 언제나 고개를 갸웃한다.
어쩌면, 익어가는 중에는 자그마한 육감이라는 게 발달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보는 정환.
정환은 그런 노 바텐더의 말에 답하지 않고 진한 웃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 역시 편안했다는 그런 답으로.
“결승전. 응원하겠습니다. 리 상께도 안부 전해주시길.”
“그러겠습니다.”
쿠즈하라 미즈오는 바 테이블 밖으로 나와 손님을 배웅한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모든 것에 감사했습니다.”
역으로 허리를 바짝 숙여 보이는 정환. 과하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게.
진심을 담는다는 누군가의 말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처럼 정환은 그렇게 작별을 고한다.
이전 생에도, 또 지금의 생에도. 스승 복은 터진 것만 같은 정환.
쿠즈하라 미즈오는 복합적인 의미가 담긴 그런 인사를 받고는 의미심장하게 웃을 뿐이다.
“날아가십시오. 훨훨.”
후련하지만 아련한.
옛 스승과의 이별이었다.
6.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한 해를 대표하는 세계 바텐더 챔피언이 탄생합니다!”
진행자가 바뀐 것만 같다. 무미건조하던 예선전의 진행에 비해 훨씬 활기차고 역동적으로 바뀐 결승전의 진행자 목소리.
생각보다 많은 관중이 모인 무대에서 그는 주변의 분위기를 고조시켜가며 진행을 이어갔다.
그가 진행을 맡은 무대는 다름 아닌 월드 클래스 글로벌의 월드 파이널.
세계 최고의 바텐더를 가리는 바로 그 무대였다.
“총 40개 국가에서 모인 바텐더들 가운데 8인의 바텐더가 이 자리에 섰습니다! 오늘 이들 중 단 한 명만이! 월드 챔피언이라 불리는 타이틀을 가져가게 됩니다!”
웅장한 그의 설명이 이어지자.
- 와아아아아아아아아!
크게 반응하는 방콕의 관중들. 누구는 업계 관계자라서. 누구는 같은 업종이라서.
또 누구는 이쪽 씬에 관심이 깊어서.
마치, 바에 모인 손님처럼 여러 이유로 이곳을 찾은 이들은 곧 결과를 토해낼 결승 무대에 기대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이들의 쏠리는 관심을 그대로 받아내고 있는 이들은 최종 결선에 진출한 8명의 바텐더.
일본, 미국, 영국, 태국, 상하이, 브라질, 프랑스, 그리고 대한민국의 바텐더가 멋들어진 차림새로 무대에 정갈히 서 있다.
쏟아지는 조명에 가려지지 않는 이들의 모습이 거창하기 그지없는 순간이다.
“지금! 그 챔피언을 뽑을 마지막 무대의 과제를 공개하려 합니다! 마지막 무대의 과제는···! 모두 궁금하십니까!??”
- 우우우우우우우.
진행은 적당히 유희를 곁들여 흘러간다. 이미 여러 초청 무대와 주최 측의 브랜드 홍보 시간을 가지며 시간을 끌었던 만큼 관중들의 피로도가 올라가 있는 상황.
진행자는 한 번의 가벼운 장난을 마치고는 그대로 과제를 발표하기로 한다.
“궁금하신 모양이군요! 지금 바로 공개합니다! 세계 챔피언을 뽑을 과제는! 바로 화면을 봐주십시오오오오!!”
길게 끌어내는 목소리와 함께 진행자의 손짓이 커다란 화면을 향한다.
어두운 검정 배경에 극적인 효과가 깔리는 화면. 그에 맞춰 주변에는 웅장한 음악까지 울리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그리고 한 번의 반짝이는 효과와 함께 극에 달한 음악이 꺼지며 나오는 마지막 과제의 정체는.
- The Best.
‘최고’를 뜻하는 간단하고도 짧은 문장. 이는 자유주제로. 또 원없이.
바텐더의 기량을 펼쳐보라는. 딱 결승전에 어울리는 그런 과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