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술은 특별합니다-170화 (170/175)

< 170잔. 바람을 타다. >

4.

“긴자에 가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잔을 만들 준비를 마친 쿠즈하라 미즈오는 이 역시 하나의 과정인 것처럼 손님에게 말을 걸어갔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정환. 무어라 깊게 설명할 순 없지만.

긴자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정환일 것이다.

“알고 계셨군요. 그럼, 긴자의 바가 들어찬 골목의 월세도 알고 계십니까?”

“매우 비싸다고 들었습니다. 월급쟁이 바텐더는 개업을 엄두도 못 낼 정도라고.”

“그렇습니다. 투자자가 없다면, 긴자에서 개업은 꿈도 못 꿀 정도지요. 해서, 때로는 장사가 잘되더라도 쫓겨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올라가는 월세를 감당하기가 벅차다. 뭐, 그런 이유겠죠.”

“월세를 올리면 가격도 올려야 한다는 논리지요. 허나, 그게 쉽지 않은 곳이 바라는 곳입니다.”

“그래서 2년마다 이 건물, 저 건물 옮겨 다니는 메뚜기 바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피식. 분명 그런 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이건 조소가 아닌, 의외의 것을 만났을 때 나오는 자연스러운 소리.

바람 빠지는 쿠즈하라 미즈오의 소리는 외국인이 그런 것도 아냐는 그런 웃음일 것이다.

“잘 아는군요. 맞습니다. 그런 메뚜기 바 중에는 명성을 더러 얻는 곳도 있죠. 명성이 있어도 큰 점포를 얻긴 힘드니 메뚜기 생활을 전전하는 것이고.”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그런 메뚜기 바에서 탄생한 대표적인 한 칵테일이 있습니다. 일본의 칵테일이지요.”

길게 돌아가는 이야기가 나오던 와중, 방향을 묻는 손님에 말에 바텐더는 이 방향이 맞다는 답을 들려준다.

나오는 이야기는 곧 보여줄 잔에 대한 예고. 정환이 때로는 쓰는 방식도 여기서 온 것이다.

“그런 긴자에 한 바가 있었습니다. 지하에는 푸른 정원을 가진 바였죠. 풀 내음이 가득하고 바라보면 기분이 맑아지는. 허나, 2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결국, 다른 건물의 더 작은 곳으로 옮겨야만 했죠.”

“단골 때문에 긴자는 떠나지 못한 거군요.”

“긴자의 바는 긴자에 있을 때야 비로소 의미를 얻기도 합니다. 어쩔 수 없지요. 대신, 긴자 안에만 있다면. 건물을 옮겨도 단골을 지킬 순 있을 겁니다.”

쿠즈하라는 긴자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바텐더와 유려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대화를 이어가는 와중, 손에 쥔 새 술병을 하나씩 열어가는 그였다.

“정원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저도 한 번 정도 들른 기억이 있습니다. 한 번만 봐도 이렇게 기억에 남을 정도니, 다른 이들은 오죽했겠습니까.”

“좋은 공간이었군요. 풍경 역시, 하나의 휴식 거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공간이었습니다. 바텐더도 좋은 바텐더였고. 어느 날 새롭게 옮긴 건물에서 그 바의 오랜 단골이던 손님이 바텐더에게 투정부리듯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뭐라고···?”

정환은 어느새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옛이야기에 빠진 손주처럼 바텐더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점점 기대감이 차는 그였다.

“정원이 보고 싶다고. 푸르던 그때의 그 정원이 보고 싶다고. 그립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그 정원을 보며 마시던 술이 그립다고.”

“······.”

들려오는 이야기는 아련하다. 다만, 바텐더로서 생각해 본다면 조금은 아찔하기도 한 이야기.

바텐더는 만능이 아니다. 모든 걸 들어 줄 수는 없다는 말. 자신의 앞에 앉은 손님이 저런 말을 던졌다면 어떻게 반응했어야 할까.

조금은 답이 보이지 않는 정환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요. 여기서 어떻게 뚝딱하고 정원을 가져오겠습니까. 푸른 숲을 가져올까요? 허허. 더 무리로 보이는군요.”

“난감했겠군요.”

“그런 부탁을 받아서요?”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일 거 같습니다.”

- 씨익.

쿠즈하라 미즈오는 정환의 답이 싫지 않아 짙게 웃어 보인다. 이명진이라는 한국의 바텐더가 이토록 부러울 수 없는 순간이다.

“아마, 그때의 바텐더도 그랬을 겁니다. 해서, 고민했겠지요. 그리고,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답을 찾기로 했습니다.”

“할 수 있는 거라면···?”

“잔을 만드는 것. 손님에게 잔을 대접하는 것. 바텐더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겠지요.”

“그럼, 지금 만드시는 잔이 그때···?”

“맞습니다. 1981년. 일본의 한 바에서 만들어진 술입니다. 푸르른 숲을. 정원을 떠오르게 하는 한 잔.”

쿠즈하라 미즈오는 손에 든 초록색 술병에서 술을 따라 잔에 담는다.

그리고 무언가 수상해 보이는 다른 음료와 함께 잔을 채워가는 그.

얼음과 술, 그리고 수상한 액체가 전부인 잔에는 불로 살짝 그을린 솔잎이 함께 담겨 나왔다.

별다른 메이킹도 없이 얼음만 한 번 들썩이고는 손님에게 이를 밀어내는 그였다.

“이름은 아시겠지요?”

“조엽수림(照葉樹林)···.”

“맞습니다. 잔의 이름은 조엽수림. 이게, 제 답입니다.”

!

정환은 멀뚱히 자신의 앞에 나온 잔을 바라봤다. 녹차 리큐르에 우롱차를 섞어 얼음과 함께 나온 것이 전부인 칵테일이 바로 조엽수림.

1980년대 일본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 속에 이런 스토리가 숨어 있을 줄은 몰랐던 그였다.

그래도.

이야기는 거창하지만 잔이 너무 단출하지 않나. 정환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드셔보시지요.”

바텐더는 잔을 권한다. 정환은 마지못해 잔을 들고는 그대로 이를 입으로 가져갔다.

‘흠.’

완벽하다. 떠오르는 건 다른 무엇보다 사지마 츠바사 같은 감상.

간단한 빌드지만 비율과 가니쉬에서 오는 노즈가 약하지 않아 잔이 얼마나 완벽하게 만들어진 것인지를 표했다.

그리고 드는 생각은.

‘숲···’

숲을 거닐고 있다는 작은 착각. 한 잔의 술을 마셨을 뿐인데도, 강하게 풍겨오는 풀 내음에 정환은 순간 그런 착각마저 하고 말았다.

과연 숲을 그리는 손님에게 낼 수 있는 최고의 잔이라. 그렇게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이는 한 잔이었다.

“이건···.”

“그려지십니까?”

“숲. 숲에 온 것만 같네요. 정말로. 그런 착각이···.”

“왜 손님이 없는 이곳에 와 있냐고 츠바사 놈이 물었다고 하셨지요? 그 물음에 대한 제 답은 이것입니다. 손님이 원하는 걸 보여준다. 결국에는 잔 속에 환상을 담아 파는 것이 바텐더의 일. 평범한 잔이라면, 굳이 바텐더가 만들 필요 따위는 없을 겁니다. 손님은 바텐더의 태도, 또 바의 분위기. 그리고 그 바라는 공간 속에 담긴 이야기. 그리고 잔이 담은 이야기까지. 그 모든 걸 즐기러 바라는 곳에 오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펼쳐지는 건 장황한 바텐더의 설명. 그는 자신의 철학이 녹은 이야기를 덤덤히 들려주기 시작했다.

“왜 손님이 없는 이곳에 있냐구요? 그야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손님은 최고가 주는 잔을 원하니까. 바텐더가 담을 수 있는 이야기가 늘어날수록 잔은 풍부해집니다. 누가 최고의 잔을 마다합니까? 최고라 불리는 이가 만든 그런 잔을! 그런 환상이 손님을 만족시킨다는 걸 모른다는 말입니까! 츠바사 놈은 아직도 그런 헛소리를!”

명쾌하고, 또 울분이 조금 담긴, 노년 바텐더의 말이 정환의 가슴에 걸린 무언가를 쓸고만 간다.

속이 한결, 후련해지는 것만 같았다.

“또한.”

정환의 표정이 점점 밝아지는 와중에도 쿠즈하라 미즈오는 말을 멈추지 않는다.

마치, 마지막으로 제자와 마주한 것처럼 모든 걸 전수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모습.

그럴 리가 없음에도. 정환은 왜인지 그렇게만 보여 그의 말과 몸짓에 집중을 기했다.

그는 빈 셰이커에 얼음과 물을 채우고는 이를 들어 올린다. 그의 모습이 딱. 아르센에 처음 왔던 정환의 모습과 닮아있다.

“바텐더는 잔 속에 상상을 담을 줄 알아야 합니다. 최고로 완숙한 셰이킹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까?”

“파도···. 파도가 치는 것처럼 셰이커 속이 그려지는 소리를 내는 셰이킹이라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파도.”

당연히. 이런 이야기를 들은 건 지금 앞에 서 있는 바텐더로부터였다.

그런 바텐더는 술이 아닌 물이 든 셰이커를 갑작스레 흔들기 시작했다.

- 살각! 살각! 살각!

“이런 셰이킹과.”

- 치키칙! 치키칙!

“이런 셰이킹.”

- 챠카착! 챠카착!

“그리고 이런 셰이킹까지. 모두가 어떻게 다르겠습니까?”

“······.”

전부 같다. 이건 바텐더이기에 확신할 수 있는 말. 자세는 스냅과 스트로크, 트위스트까지 일절 변하지 않았음에도 저마다 다른 소리를 만들어 가는 그의 셰이킹이었다.

“바텐더가 무엇을 상상하며 잔을 만드냐. 결국에는 그 차이입니다. 무엇을 담을 수 있느냐는 결국 마음가짐의 문제. 진실로 잔에 담고자 하는 건 결국 속에서 우러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속에도 없는 마음이 잔 속에 담길 거라 믿깁니까?”

“그런 말은···”

“허황된 이야기로 들립니까?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 철쓰어억! 철쓰어억!

정환이 조금은 현실적인 이야기를 가져오려 하자 쿠즈하라 미즈오는 그대로 색다른 셰이킹을 보여준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는.

‘파도···!’

완벽에 가깝다는 그 셰이킹 소리. 완전한 파도의 소리는 아니다. 다만, 파도에 가까운 소리가 점점 정환을 덮치려는 것만 같았다.

“이번에도 자세가 달랐습니까? 기교는요?”

“···같았습니다. 분명.”

“허나, 이번에도 소리는 달라졌지요. 내용물도 그럴 것이고. 결국은 무언가를 담고자 상상이 중요한 것입니다. 기술은 기본입니다. 기술은 한계가 있지만. 상상력은. 그 한계가 없는 법입니다. 이게, 지금 차 군을 답으로 데려갈 유일한 답일 겁니다.”

그래, 마음가짐이 중요한 건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게 이렇게 기술로 인정받는 바텐더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던 정환.

정환은 당당하게 뱉어가는 전 스승의 담론에 생각이 깊어지는 눈빛이다.

“진심으로 손님을 위하는 마음을 잔에 담아보세요.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잔을 만드세요. 지금의 당신은 머리에 잡념이 너무 가득합니다. 누군가를 이기겠다는 마음. 그런 마음이 잔에 담기면, 그건 결국 맛에도 영향을 미치기 마련입니다. 사지마 츠바사를 이기고 싶습니까? 그를 잊으십시오. 손님을 위한 잔에 그는 없습니다. 반대로. 그의 완벽한 잔 속에는 손님이 없습니다. 해서, 지금 그의 머릿속에도 당신을 이기겠다는 생각보단 완벽한 잔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하겠지요. 이미 완숙한 경지에 오른 두 사람의 차이라면. 그게 전부일 겁니다.”

!

“···그래도 되는 건가요?”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가는 겁니다. 그저 손님을 위해. 당신은 그럴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어째서 제가···.”

그런 특별한 사람이냐. 정환은 자신과 이제 두 번밖에 마주하지 않았을 전 스승을 보며 그런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츠바사도. 이 쿠즈하라 미즈오도. 겪어보지 못한 실패를 아는 바텐더이니까.”

!

쿠즈하라의 입에서는 조금 더 큰 이야기가 나오고 만다. 이건 또 뭘까. 명진과 비슷하게 풍기는 향기에 정환은 눈빛을 어디 둘지 모르는 눈치다.

허나.

“츠바사 놈이 결국에는 차 군에게 하나의 실패를 줬을 겁니다. 뜻하는 바를 이루려는 이에게 그와는 전혀 다른 사상을 가진 이가 벽이 된다는 건 실패라 부를 만 한 일이지요. 손님에게 꾸중을 들은 따위의 일이 아니라.”

쿠즈하라는 이번에도 아슬하게 빗겨 간 이야기를 뱉으며 정환의 걱정을 무로 돌린다.

“바닥을 기지 않고 날아오르는 건 없습니다. 손님을 진정으로 위한다면, 손님처럼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바텐더가 최고의 바텐더겠지요. 이런 실패의 경험은. 분명 좋은 거름이 될 겁니다.”

“그건···, 츠바사 바텐더도 같은 입장 아닐까요? 우린 실패가 아니라 불러도 그는 앞에 있었던 일을 실패라 생각할 텐데요.”

그래, 생각은 상대적인 게 아닌가. 정환은 이내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는 쿠즈하라의 말에 반문했다.

쿠즈하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을 뿐이다.

“녀석은 자신을 실패했다고 여기지 않을 겁니다. 진정 그걸 실패라 받아들일 수 있는 녀석이었다면 그런 태도로 나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저 부족이었다고. 과정이었다고. 그늘에서 자란 어린 시절처럼 그렇게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을 뿐이겠지요.”

“······.”

누구보다 제자를 잘 아는 이는 분명 스승일 것이다. 특히나 이렇게 정이 많은 이라면 더더욱.

정환은 뱉어오는 냉정한 말 속에 담긴 쿠즈하라의 속마음이 보이는 것만 같아 아무런 답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정환에게.

“해서. 이렇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부디, 사지마 츠바사를 이겨주십시오. 그에게 실패를 경험시켜주시길 바랍니다. 이건, 이 쿠즈하라 미즈오에게도 하나의 실패이자 경험일 겁니다. 감히 부탁드립니다.”

직각에 가깝게 허리를 접어오는 노년의 바텐더. 그는 간절하게. 그리고 또 진심으로.

정환에게 자신의 제자를 이겨달란 말을 남긴다. 허리를 접은 그의 모습이 무척이나 작아 보여, 정환의 가슴이 먹먹해지려 했다.

***

{@PIC:}

1. 조엽수림.

(그린티 리큐르 + 우롱차 // + 일본 보드카, 진)

- 1981년 처음 등장한 칵테일, 조엽수림입니다.

- 음..솔직히 고백합니다. 유례는 창작입니다. 실상은 조금 냉정합니다.

- 우롱차가 모델이 새로 나온 걸 기념해 만들어진 상업적인 시작이 출발인 칵테일입니다.

- 각색으로 조금 드라마틱하게 바꿔봤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 향으로 마시는 칵테일이 이런 거겠죠. 반대로 맛은 달콤합니다.

- 매니아틱한 칵테일로 이걸 드시는 분은 정말 이것만 드시더라구요. 입에 맞으면 평생을 못 벗어난다는 말까지!

- 도수가 그리 높진 않기에 가끔은 진이나 보드카를 더해 드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 그때는 일본 진이나 보드카를 쓴다고는 합니다만...집에 있는 재료가 최고의 재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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