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잔. 파도. >
2.
잔잔한 재즈가 흐르며 진한 시가향, 그리고 진득한 술향이 풍겨 온다.
나무로 만든 고즈넉한 문을 앞에 둔 정환은 그리운 향과 소리에 잠시 감상에 빠졌다.
몇 년 전이라 불러야 할까. 아니면, 몇 년 후? 이제는 뭐라 지칭하기도 어려운 시간 개념에 그런 생각은 포기하고 그저 상황만을 떠올려 보는 정환.
회귀하기 전, 방콕이라는 도시를 여행하며 들렸던 이곳, 더 뱀부 바를, 정환은 가만히 서서 추억하고 있다.
1800년대에 문을 열었다니, 역사가 깊다는 방콕에서도 오래된 곳이 이곳 판다린 오리엔탈 호텔이며 더 뱀부 바였다.
특히나 바 씬의 역사 자체가 오래되지 않은 아시아에서는 참으로 귀한 곳.
건물이야 새로 지었다지만, 벌써 역사는 100년이 넘어가는 호텔이고, 또 아시아 베스트와 월드 베스트에도 꾸준히 이름을 올렸던 곳이기에 정환은 매번 이곳을 찾곤 했었다.
오늘은, 조금 다른 이유로 이곳을 찾았지만 말이다.
정환은 조심히 오래된 나무문을 밀고는 바 안으로 들어섰다. 호텔 바답게 홀이 조금 크고 바 테이블 자리는 몇 개 되지 않는 뱀부 바의 안.
오늘 정환은, 이곳에.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러 왔다.
이런 기회를 만들어 준 건 다름 아닌 정환의 현재라 부를 수 있는 이였다.
새롭게 다시 살게 된 바텐더라는 직업의 인생. 그리고 그런 인생의 스승과 같은 명진이 준 기회.
정환은 앞이 막힌 것만 같은 기분 아래에서, 이곳에 답을 구하러 온 것이다.
쿠즈하라 미즈오라 불리는 바텐더는 한때 정환의 스승이었다. 지금 정환의 사상도 철학도 분명 그의 영향 아래에 있을 터.
또 다른 제자인 사지마 츠바사가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제자는 길이 막힐 때면 스승을 돌아보곤 하는 법이다.
정확히 어떤 답을 듣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 정답을 타인에게 구할 수 있을 리도 없고.
명진에게야 애교를 부리듯 털어놨던 말들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금 곁에 있는 이였기에 가능했던 일.
정환은 그저.
누군가와. 자신이 가려던 길을 먼저 갔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며, 그 속에서 무언가를 배워보고자 할 뿐이다.
바텐더란, 원래 듣고, 또 듣고. 그리고 말하며. 앞에 앉은 사람, 또 서 있는 사람에게 쉼 없이 배우는 이였으니까.
또, 그렇게 배웠으니까.
단지, 정환이 온 이유는 그뿐이었다.
아. 솔직하게 말하자면 다른 생각도 하나 더 없진 않았다. 이곳은 현재로서 엄연히 따져보자면 자신보다 사지마 츠바사의 본진과도 같은 곳.
혹여라도. 우연히라도. 무언가를 알 수만 있다면. 그가 그렇게 된 이유 역시, 조금은 알고 싶은 정환이었다.
정환이 안으로 들어서자 마주하는 건 클래식한 느낌 그대로의 인테리어였다.
초청된 이들로만 구성된 게스트 바텐딩이기에 자리는 빈 곳이 많았고, 여유로운 분위기의 바 안.
그런 바 안을 정환이 잠시 두리번거리자.
“오셨군요.”
젊은 바텐더가 한 명 다가와 정환을 알아본다. 명진이 며칠 전 남겼던 그 예약을, 쿠즈하라 미즈오는 잊지 않고 기다렸던 모양이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차정환입니다.”
“스승님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가시죠. 안내하겠습니다.”
- 차 군. 내 여동생이랑 만나볼래? 어때? 국제결혼? 싫다고? 너 지금 내 동생 무시하냐?
한때는 그런 농담도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던 사이였던 거 같은데.
자신을 안내하는 료스케라는 사형의 등을 보며 정환은 어색해 죽을 맛이다.
이번 생에서는 연이 닿지 않았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은 딱딱한 지금이다.
정환은 그의 안내를 받아, 바 테이블 정중앙에 자리한 상석을 받는다.
정확히 바 테이블의 중심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아. 안녕하세요. 이명진 바텐더님의 제자인···”
“잠시 기다리셔야 합니다.”
“네?”
“아직 앞에 손님이 예약한 시간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곧, 돌아오죠. 주문은 받을 수 있습니다만, 드시면서 기다리시겠습니까? 돌아오기까지, 20분 정도 걸릴 겁니다.”
“부탁···드립니다.”
“주문은?”
“마티니. 비피터로 부탁드립니다.”
“탁월한 선택이군요. 얼음이나 다른 것도 정하시겠습니까? 올리브나 기주를 원하시는 게 있다면 정하실 수 있습니다.”
“올리브는 안 채운 올리브에 소금을 리밍해서 잔 안으로 부탁드립니다. 진과 베르무트의 비율은 8대 2에 얼음은 3분의 1만 채운 채로 스터···.”
“주문, 확인했습니다.”
여전히 꼬장꼬장하다. 이건 변하지 않는 사람의 특징이겠지. 정환은 앞선 손님에 대한 응대가 끝나지 않았다며 다른 이에게 집중하는 모습을 보며 그가 여전함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전해지는 주문은 그에게서 배운 스탠다드 마티니. 정환이 입으로 뱉어간 주문은, 그가 바에서 신입에게 마티니를 가르칠 때면 늘 강조하던 부분들이다.
마치 그걸 아는 듯 뱉어오는 타국의 젊은 바텐더의 주문에, 쿠즈하라 미즈오는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는 다른 손님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른 이와는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며 손은 쉬지 않는 그였다.
정환은 그런 모습이 그리웠던 모습 중 하나여서 이를 싫지 않게 바라봤다.
사실은 지금 이 공간 안의 모든 모습이 그립던 모습 중 하나였다.
쿠즈하라 미즈오라는 바텐더의 바텐딩과 그를 보조하는 여러 젊은 바텐더의 모습들.
그리고 그런 바텐더들의 존재까지.
자신이 딱 처음으로 바텐더란 일을 시작했을 때 마주했던 이들이 모두 모인 공간이니, 어찌 그립지 않을 수가 있겠나.
료스케, 시라이시, 코스케 등. 사형이라 부르던 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앳된 모습을 보니 그 시절이 스치듯 지나가는 정환이다.
- 탓. 탓. 탁.
정환이 한참을 그렇게 바 안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을 때, 쿠즈하라 미즈오는 앞에 앉은 손님과 대화를 이어가며 술을 한 잔 더 만들어 간다.
그가 준비하는 건 정환이 주문한 마티니. 비피터를 기주로 믹싱 글라스에는 술이 3분의 1만 잠길 정도의 얼음을 넣고는 그가 스터할 준비를 마친다.
그리고 펼쳐지는 건.
- ······.
고요하기 그지없는 그의 스터. 스푼은 정확히 믹싱 글라스의 벽을 타고 돌아감에도.
바 안에는 어디에서도 얼음이 잘그락거리는 소리도. 스푼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반대로 그런 침묵이 무색하게, 믹싱 글라스 안의 소용돌이는 크게 요동치며 술을 적절히 섞어가는 모습이다.
‘오히려···’
이전에 정환이 입문했을 때보다 더 뛰어난 것 같다. 정환은 그를 보며 그런 생각을 떠올린다.
당연한 이야기가 아니겠나. 노년의 바텐더는 오늘보다 어제가 한 살이라도 더 어렸을 것이고, 이는 신체의 활발함도 다르다는 걸 의미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젊은 시절의 그는, 대단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보였다.
- 틱.
- 촤아아아아아아악!
스푼이 일시에 움직임을 멈추더니, 이내 스트레이너를 불러온 후, 잔에 술을 담아간다.
기다란 아치를 그리는 노년 바텐더의 모습이 오래전 보았던 바텐딩 고서 속 삽화와 닮아 있는 것만 같은 정환.
마지막으로 올리브를 조심히 소금에 묻혀 잔에 담는 모습까지, 과연 예술이라 불러도 좋을 경지가 쿠즈하라 미즈오의 몸에서 뿜어졌다.
“차 군에게.”
그는 잔을 가볍게 완성하고는 제자에게 이를 가져가라 명한다.
한 명의 손님을 상대할 때는, 오로지 그에게만 집중하는 그였다.
“주문하신 마티니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정환은 옛 스승이 만든 잔을 받아들고는 이를 뜯어본다. 과연 흠잡을 곳이 없는 한 잔의 완벽한 마티니.
향에서는 진한 진의 솔향이 그대로 살아났으며 그 끝을 베르무트 특유의 풍미가 장식한다.
그리고 잔잔히 퍼지는 건 둘의 조화와 감칠맛이 도는 올리브의 미세한 향.
마치, 잔을 마시지 않아도 맛을 전부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그의 스터가 어떤 마법이라도 부린 것만 같다.
향만 맡았을 뿐임에도. 정환의 입가에는 침이 가득 고였다.
정환은 잔을 들고는 조심히 이를 들이켰다. 입에 닿자 무거운 무게감이 짓누르다가도 이내 불어오는 베르무트의 향이 이런 무게를 그대로 가져가 버린다.
그리고 잔잔히 감도는 건 진의 솔향. 마치, 바텐더는 손님을 배려해, ‘마티니가 무겁지요? 스터로 제가 가져가 드리겠습니다. 향만 즐기십시오.’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불어오는 베르무트의 풍미는. ‘즐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맛있는 잔도 있습니다.’라는 기대를 품게 하는 맛.
누군가에게는 별천지 같은 맛이지만, 정환에게는 이 역시, 그리움을 품게 하는 맛이다.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정환의 잔은 전부 비워진 후였다.
“잔은 입에 맞으신지요?”
그리고 잔이 비워지자 다가오는 건 그토록 기다렸던 쿠즈하라 미즈오 바텐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잔을 즐기느라 20분이 훌쩍 지나버린 정환이었다.
“아. 네. 아주 맛있습니다.”
“맛있어야 하는 게 당연합니다. 바텐더가 만든 잔이니.”
바텐더가 만든 잔이니 맛있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건 정환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말.
정환은 절대 손님에게 맛있냐는 말을 물은 적은 없다. 바텐더가 만든 잔은 맛있어야 하는 게 당연한 법.
그저 그가 묻는 건. 입에 맞냐는 말.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 말이 입에 익은 이유는, 다름 아닌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저 노년의 바텐더 덕분이었다.
“역시 그런가요.”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늦었지만, 다시 인사 올립니다. 뱀부 바에서 게스트 바텐딩을 하게 된 바텐더, 쿠즈하라 미즈오입니다.”
정론처럼 나오는 말에 짙게 웃어 보이는 정환. 그런 정환을 향해 쿠즈하라 미즈오는 깊게 고개 숙이며 재차 인사를 전한다.
자식뻘, 어쩌면 손주에 가까운 뻘의 후배에게 고개를 깊게 숙이는 노년 바텐더의 모습이 부담스럽기 그지없다.
“이러지 않으셔도···”
“손님이 직업의 무엇이든 상관은 없습니다. 바텐더 앞에 앉았다면 그저 손님. 찾아주셔, 감사할 뿐입니다.”
초청받은 자리다. 그것도 지인 찬스를 써서 억지로 끼워 넣어 받은 초청.
그럼에도 앞에 앉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손님에게 이렇게 고개를 숙일 수 있는 바텐더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정환은 다시금. 어떻게 이런 스승 아래에 사지마 츠바사 같은 바텐더가 나올 수 있는지 의문이 아렸다.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명진 바텐더님의 제자, 바텐더 차정환이라고 합니다.”
“부디 편하게 즐겨주십시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조금 형식적인 인사가 오간다. 같은 업계 사람끼리 서로 배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바텐더의 말.
주문의 자유를 주는 하나의 해제 신호다.
“감사합니다. 스승님께서, 많이 배워오라 하셨습니다.”
“허허. 리 상께서 재미난 말씀을 하셨군요. 이미 리 상께 많은 걸 배우고 계실 텐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스승님께서는 다르게 생각하시는 모양이세요.”
“겸손한 분입니다. 자신의 실력도 인성도 반 이상을 안 쳐주는 엄격한 분이고.”
“두 분께서는 어떻게?”
“젊었던 시절, 일하던 가게가 이웃했었습니다. 옆 가게라 경쟁도 하고 협력도 했었지요. 그때, 저보다 한참 어리지만, 눈빛도 또 손님을 향한 열정도 살아있던 그를 만났습니다. 적잖은 충격이었죠. 실력도 만만치 않고. 대부분의 바텐더가 한량이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허허. 그립군요.”
“그런 거였군요.”
“좋은 스승을 두셨습니다. 가시던 길로 쭉 따라가시면, 정진하실 수 있을 겁니다.”
쿠즈하라 미즈오는 엄격한 모습을 지우고는 명진을 잔뜩 추켜올려 준다.
빈 말하는 성격이 아닌 꼬장꼬장한 노인네인 걸 모르는 이는 없기에.
그의 말이 진심인 걸 모두가 알 수 있을 것이다.
“파도가 아니라 파도가 향하는 곳을 보고 향해 가라. 그런 말씀이시군요.”
“허어. 바쇼를 아시는 겁니까?”
정환이 쿠즈하라가 인용한 하나의 구절을 그대로 읊어보자, 노년의 바텐더가 놀란 표정을 지어본다.
이는 일본의 하이쿠의 한 구절을 인용한 말로, 정환 역시 정우에게 해줬던 말이기도 했다.
그 유명한 일본의 하이쿠 시인, 바쇼의 한 구절이었다.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했습니다.”
“그런. 리 상과는 천생연분이군요. 허허. 바쇼를. 허허.”
노년의 바텐더는 타국 젊은이의 아는 척이 싫지 않아 보였다.
그는 정환은 물잔이 빈 걸 보고는 물을 따르며 허허 웃음소리를 감추지 않는다.
하지만.
“다만, 가끔은 그런 파도를 거슬러 가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입니다.”
다음으로 나오는 건 조금 의미심장한 젊은 손님의 말.
- 뚝.
자연스레 흐르던 물줄기는 어느새 움직임을 멈추고 만다. 이는, 물줄기를 뿌리던 이의 손이 멈춘 것이다.
물줄기를 만들어 가던 노년의 바텐더는 시선을 들어 앞에 앉은 손님을 바라봤다.
앞서 손님이 그의 인용구를 알아봤다면. 이제는 그가, 손님의 말에 숨은 뜻을 알아볼 차례인 것이다.
그는 물을 뿜던 주전자를 내려두고는 조금 무거운 표정으로 손님 앞에 선다.
그리고 나오는 묵직한 이름은.
“츠바사 놈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환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그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