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잔. 바람의 편. >
1.
또 졌다.
강하게만 남는 인상은 한 가지 생각뿐. 정환은 마주한 현실을 떠올리며, 무거운 어깨를 들고는 방으로 향했다.
이미 결승에 올라가는 것이 확정된 사람치고는 무거운 그의 어깨였다.
아직은 마지막 챌린지인 스피드 런 챌린지가 한창 진행 중인 상황.
다들 누가 최후의 8인에 이름을 올릴지 궁금해하며 남은 챌린지에 관심을 쏟는 동안도.
정환은 감히 그 챌린지가 펼쳐지는 무대를 바라보지 못했다.
‘조금만 더 빨랐다면···’
5분 대의 벽이 깨질 뻔했다. 만약 그랬다면, 이는 정말이지 따라갈 의지조차 잃었을 정도.
손님을 위한다는 대의가 담기지 않은 챌린지가 스피드 런이기는 했지만.
정환은 빠르게, 또 완벽하게. 그렇게 잔을 만들어 내는 이들의 실력이 손님에게 인정받는 걸 모르지 않았다.
‘어쩌면···’
손님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건 정말이지 완벽한 잔을 만들어 내는 이들인 건 아닐까.
정환의 한숨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심연으로 그를 이끌어 갈 때.
- 툭.
거실에 힘 없이 앉은 정환의 앞으로 누군가 그림자를 드리우며 다가왔다.
그림자의 움직임에서부터 조심스러움과 인자함이 가득 묻은, 명진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좋아해야 할 순간일 거다. 아니, 불과 며칠 전이었다면 정환은 물론 좋아했을 거고.
세계 무대가 가지는 무거움보다는 그 자체를 즐기는 이가 정환이었음을 모르지 않은 명진은, 제자의 변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직 아무것도 들은 것이 없음에도, 정환은 무언가 고장이 났다는 걸 말이다.
“마스터···.”
“방금 들려 온 김 교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결승 진출자가 확정되었다더군요. 정환 씨 역시, 당당하게 그곳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런가요···.”
“기뻐하지 않는군요. 설마···, 다시 그 건방이 온 건 아니겠죠?”
“그건 아닙니다. 다만···.”
“털어놔 보세요. 이럴 때 쓰려고 이 늙은이를 이곳까지 데려온 게 아닙니까. 다른 건 몰라도, 듣는 건 자신이 있으니.”
명진은 평소처럼 정환에게 다가와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 다른 건 몰라도. 답을 알지는 못해도.
바텐더는 무언가를 듣는 것에 있어서는 최고의 선수들이다.
“한 잔, 하시겠습니까?”
명진은 자리에서 일어서 스위트 룸 거실에 마련된 아일랜드 식탁 쪽으로 향한다.
마치 바 테이블처럼 보이는 자그마한 아일랜드 식탁.
그 위에는 바텐더의 연습을 위해 주최사에서 마련한 여러 술병과 도구가 자리를 빛내고 있다.
명진은 조금 안쪽. 그러니까, 바텐더의 자리에 자리를 잡고 서 있다.
“무리하시는···”
그래, 이럴 때를 위해 명진을 모신 건 맞았다. 다만, 그저 함께 하는 것만으로 든든한 사람이기에 모신 것도 사실.
점점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지만, 그는 아직 바 도구를 다시 잡을 정도의 몸 상태가 아니다.
이전 한국 대회 전에도, 그는 정환에게 딱 한 잔을 만들고는 몸을 휘청거렸다.
이를 아는 정환은 당장에 자신보다 그의 몸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칵테일은 무리일 겁니다. 미안하지만요. 날도 덥고, 타국에 있다 보니, 컨디션이 좋진 않아요. 아마, 만들더라도 제맛을 내질 못하겠죠. 대신, 잔술 정도는 어떻습니까? 가끔은 샷으로 때리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들려오는 답은 객관적이다. 누구보다 자신이 만들 잔에 대한 맛을 제일 잘 아는 건 명진.
명진은 지금 누군가에게 멋들어진 한 잔을 만들어줄 몸 상태는 아니었다.
대신, 그는 조금 장난스러운 단어와 행동을 곁들이며 정환에게 잔술을 권한다.
정환은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나 명진의 앞으로 향했다.
“참. 못 이겨요. 마스터는.”
바에서 바텐더가 파는 건 칵테일만이 아니다. 어쩌면, 더 중점이 되는 것도 칵테일이 아닐지도.
바텐더가 파는 건 공간이자, 하나의 휴식 시간. 다른 누군가 듣는다면 눈을 번뜩이며 발작할지 모를 이 말이지만.
적어도 이곳에 있는 두 바텐더는 그렇게 늘 믿고 있는 이들이다.
정환은 바깥쪽 자리에 몸을 앉히고는 명진이 내미는 술을 받아 든다.
무엇인지 모른다. 아니, 딱히 중요하지도 않고. 그저 누군가와 한 잔을 마신다는 것.
이게 축배인지 위로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술과 자리는.
“실은 사지마 츠바사 바텐더와 언쟁이 있었습니다.”
속에 든 이야기를 저절로 불러내기 마련이다.
“듣긴 했습니다. 식당에서 한 차례 다퉜다죠? 정환 씨답지 않은 일이군요. 누군가와 직접적으로 언쟁을 나눌 사람은 아닌 줄 알았는데.”
“참을 수가 없는 말이라서요···.”
참을 수가 없는 말. 정환은 그간 들은 말을 이렇게 일축한다. 이전 생에서 자신이 배움을 받았던 스승도, 또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스승도.
거기에 자신과 연이 닿은 모든 바텐더들도. 함께 믿으며 나아가는 길을 부정하는 말을 들었으니 오죽하겠나.
명진은 직접적인 말을 묻지는 않고, 차분히 들으며 장단을 맞춰갔다.
몇 개의 서두를 깔던 정환은 어느새 술술, 그날의 일을 명진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흠···. 그런 일이 있었군요. 사지마 츠바사. 쿠즈하라 상의 제자에게 그런.”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게 부정 당한 것만 같고!”
“이해합니다. 자신이 가진 생각과 반대되는 인물을 만나면 그런 감정이 들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정환 씨가 이렇게 투지에 불타고 있었군요.”
“하지만···. 거기까지인걸요. 이미 네 번이나···.”
“아직 파이널이 남았을 텐데요.”
“솔직히, 이제는 자신감이 줄어들기도 합니다.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스스로도 조금은 긴가민가할 정도고···.”
“흠. 늘 자신에 넘치던 정환 씨가 이런 반응이라니. 심각한 문제군요.”
“마스터라면···. 어떨 거 같으세요?”
“저, 말씀인가요?”
“네. 제가 아는 분 중에 손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잔을 만드는 최고의 바텐더는 마스터세요. 빈말이 아니구요. 그런 마스터라면···”
어떻게. 도대체 저 사지마 츠바사라는 바텐더를 어떻게 상대하겠냐.
또 무얼 해야, 또 무엇이 지금 자신에게 부족한가. 정환은 모든 감정을 저 말 뒤에 담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저는 모릅니다.”
!
돌아오는 명진의 답은 단호하고 의외의 답. 언제나 물으면 답이 나오는 기계인 것처럼만 보였던 명진의 입이, 이번에는 사뭇 다른 말을 들려준다.
정환은 잠시 벙찐 표정을 지으며 잔만을 만지작거렸다.
“우리 잠시 기억을 예전으로 돌려볼까요?”
“네?”
“아르센.”
!
“아르센이 문을 닫기로 이야기를 나눴던 날을 기억하십니까?”
“잊을 수가 없죠. 다들 얼마나 놀랐었는데요.”
“그때, 정우 씨가 제게 크게 혼나기도 했었죠. 그건요?”
“기억나요. 떼를 쓰다가 호통을 듣고는 깜짝 놀랐었죠.”
“그때, 제가 한 말을 기억하시나요?”
“음···.”
뭐였더라. 정환은 차분히 머릿속을 뒤집으며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 갔다.
조금은 느리게만 다가오는 그 날의 기억.
- 바텐더는 현장에서 손님과 부딪히며 모든 걸 배우는 직업입니다. 현장을 뛰지도 않는 사람에게 무언갈 배우려는 마음가짐이라면 당장 바텐더를 그만두세요!
정환은 이내 노기가 가득했던 익숙하지 않은 명진의 음성이 떠듬떠듬 떠오르기 시작한다.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쫙 돋는 모습이었다.
“현장을 뛰지 않는 바텐더에게 무언가를 배울 마음가짐은 버려라. 저는 그렇게 말했었습니다.”
“네···. 그러셨었죠. 기억···. 납니다.”
“그럼,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도, 아시겠지요?”
“오늘은, 화를 안 내시는 건가요?”
“글쎄요. 결승 진출이라는 칭찬할 일도 있으니, 한 번은 넘어가도록 하죠.”
“······.”
혼났다. 말이야 인자했고, 오가는 고성이야 없었지만 크게 혼난 것만 같다.
정환은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일만 터지면 쪼르르륵 달려와 일러바치던 아이처럼.
정환은 부끄러움이 몰려온다.
“조언은 닿을 수 있는 영역이 있고, 닿지 못하는 영역도 있습니다. 지금, 그 부분은 제가 감히 조언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떼를 쓰셨군요. 이기는 방법이라니.”
말이야 거창하게 포장했지만, 실상은 이기는 법을 알려달라는 말이었다.
이에 나오는 점잖은 스승의 가르침. 정환은 얼굴만 붉게 물들어 간다.
지금 잔에 담긴 술이 제법 독주인 것만 같다.
“또한, 제가 답을 할 수 없는 이유는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네?”
“이쪽 분야에서는 제가 최고라고 하셨나요?”
“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랑은 생각이 다르시군요.”
“네···?”
조용하지만 크게 혼을 낸 탓일까. 명진은 원래도 무겁진 않았지만, 명진은 슬쩍 표정을 풀고는 정환을 바라본다.
슬쩍 장난기도 서린 표정이, 정환을 다독이는 것만 같다.
“다른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 문제에 어쩌면 답을 알고 있을 사람을 알기 때문이죠. 아직 현역에 있고. 또, 이쪽 분야에서는 저보다 전문가인 사람을.”
“그런 사람이···?”
있긴 있냐. 정환은 제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나오지 않는 답에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자, 그럴 줄 알았다며 웃어 보이는 명진.
명진은 그런 정환을 위해 작은 종이에 무언가를 휘갈겨가기 시작한다.
영어로 적힌, 하나의 주소처럼 보였다.
“전야제 때 기억하시나요? 그때 잡아둔 예약이 하나 있을 텐데요.”
“아! 그거라면 분명 쿠즈하라 상의···! 그럼?”
“이 주소로 가보세요. 여전히 현역에서, 손님을 위한 바텐딩으로 최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물론, 조금 더 깊게 들어가자면, 이 문제에 대해 더 깊은 관련이 있는 사람이겠지만요. 현장을 떠난 제가 실질적으로 건넬 수 있는 조언은 없습니다. 힘내라. 할 수 있다. 그런 허공을 떠다니는 소리야 할 수 있겠지만···, 그건 조언은 아니죠. 다만, 조언으로 가는 길.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것 같군요.”
“마스터···.”
“실은 처음부터 정환 씨에게 가르칠 수 있었던 게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처음 아르센에 왔을 때부터. 그때부터 그랬을지도 모르죠. 이유야 알 수 없지만.”
“많은 걸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그런가요? 기쁘군요. 진심입니다.”
가르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게 스승으로서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정환은 알고 있다.
이건 자존심의 문제고, 더 나아가 스스로 존재에 대한 의심일 수 있으니까.
허나, 이를 스스로 깨우친 자는 그로 인해 오히려 제자를 가르칠 수 있게 된다.
명진의 따스한 가르침이 정환을 품는다. 역시, 그와 함께 오길 잘한 것만 같다.
“내일부터는 쉬는 날이군요. 다녀오세요. 저녁 10시 이후에는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겁니다.”
“······.”
정환은 명진이 건넨 종이를 받고는 쉽게 답하지 못한다. 스승이 아닌 다른 이에게. 그것도 전 스승이자 현재 라이벌의 스승에게 조언을 구하러 가는 길이 편치만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가. 이 이명진이가. 건넨 겁니다.”
명진은 그런 정환의 마음마저 자신이 품고 간다. 무게를 덜어주는 그런 말로.
철저하게 속을 들여다보인 것만 같은 정환이다.
“네. 마스터. 다녀···오겠습니다.”
정환은 그제야, 종이를 손에 꽉 쥐며 명진을 똑바로 바라보고 답을 전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명진의 제자로서 다녀오겠다고.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하나 당부만 해두죠.”
“어떤?”
“다녀온 후에는 꼭 이기세요.”
!
“이건, 할까 말까, 많은 고민을 한 말입니다만. 꼭 이기세요. 손님을 생각하지 않는 바텐더보다야, 정환 씨가 저 타이틀에는 더 어울리는 사람이니.”
답으로 가는 길을 제시하고, 길을 걷는 이에게 응원을 아끼지 않는다.
정환은 마지막에 나온 명진의 말이 어느 때보다 가깝게만 느껴져 고개를 끄덕인다.
스승의 말이니, 어길 수가 있나. 어디를 가서든, 답을 찾아, 명진의 말을 지켜보고 싶다.
“한 잔, 더 할까요?”
“좋아요. 마스터는 드시지 마시고요.”
“흠. 한 잔 정도는···.”
“그래도, 안 됩니다!”
“하.”
챌린지가 시작되고는, 정환이 가장 밝게 웃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