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잔. 인피니티 보틀. >
5.
바텐더가 꼭 가지고 있어야 할 역량은 무엇이 있을까.
제법 의미심장해 보이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개별적으로, 또 다르게 나올지도 모른다.
누구는 무엇보다 손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할 수도 있고, 누구는 어떻게든 손님에게 다가가는 붙임성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또 반대로, 조금은 현실적인 답들이 들려 올 수도 있다.
섬세한 손길, 뼈를 깎는 노력, 그리고 술에 대한 지식과 열정, 연습까지.
저마다 다르지만, 어느 것 하나 정답이 아니라 말하기, 애매한 것들이 많은 것이 아마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저 질문에 대한 답은 규격화가 되어 있다. 저 질문이 답을 낼 수 있는 객관적인 질문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애초에 그런 객관적인 지표가 없다면야 어떻게 등수를 나누는 대회를 열 수 있고 또 순위를 발표하는 차트가 있을 수 있겠나.
현실은 조금 냉정하지만, 눈으로 볼 수 있는 지표 같은 것들도 있다는 뜻이다.
가장 대표적인 걸 꼽자면 아무래도 손기술이 먼저 뽑힐 것이다.
스터와 셰이킹, 그리고 탄산을 살리는 것과 얼음을 다루는 것 등.
상반신만을 손님에게 내보이는 바텐더는 언제나 손으로 가장 먼저 손님을 마주한다.
스터는 섬세하고 조심스러워야 하고 셰이킹은 거침없되 계산적이어야 한다.
카빙은 실용적이어야 하고 또 탄산은 변화를 거의 가지지 않게.
말로만 나열해도 복잡하고 어려워 보이는 이런 모든 기술이 한 명의 일류 바텐더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꼭 갖춰야 할 역량일 것이다.
그럼, 손기술만 갖춘다면 바텐더의 역량은 모두 갖춘 것일까. 아마 대부분 바텐더의 답은 아니란 말일 것이다.
다른 이들처럼, 바텐더 역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활약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말이야 엄청 거창해 보이지만 이 역시 실상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다름 아닌 발. 앞서 말한 손과는 조금 다른 개념의 발이, 바텐더에게는 언제나 중요한 역량 중 하나였다.
발이란 말을 해서 무진장 움직이고 활동적인 것처럼 느껴질 순 있다.
허나, 이건 그런 류의 발을 말하는 건 아닌 개념.
여기서 말하는 발이란, 바로 서 있는 자세를 말했다.
윤수가 처음으로 아실에 들어왔을 때 정환은 제일 먼저 가르치길 서 있는 자세부터 가르쳤다.
이건, 손님을 대하는 바텐더의 자세와 관련된 중요한 개념. 바텐더는 손님에게 위압감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서 있는 자세에서부터 손님을 배려한다는 것. 이건, 비단 자세나 발에 관련된 이야기만이 아닌, 손님을 대하는 마음을 포괄적으로 포함하는 역량으로 바텐더에게는 제법 중요한 것들이다.
지나온 나날을 살펴보자면 정환은 이런 면에 있어서 두 개의 역량을 모두 갖춘 바텐더처럼 보였다.
손님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기 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해 왔고 그런 손님에게 내어놓는 잔 역시 부족함이 없지 않았다.
실력이야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우승할 정도니, 더는 말할 것도 없고.
허나, 정말 인정받는 바텐더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역량을 더 보여야 할 필요 역시 없지 않았다.
이건 마지막 요소이자, 바텐더가 같은 바텐더에게 인정받기 위한 마지막 역량.
손과 발에 이은 바텐더의 마지막 역량은 바로.
혀. 즉, 미각이었다.
“시작하시죠.”
시장에서 구매한 재료를 전부 검수받은 정환이 테이블에서 무언가를 섞을 준비를 마친다.
그의 말을 듣고는 옆에서 보조해주던 명진이 하나씩 준비한 것을 정환의 앞으로 내밀었다.
정환의 앞에는 뚜껑이 열린 럼들이 차례대로 그 향을 뽐내고 있다.
“캡을 다들 열어 둔 건가요? 검수받는 동안?”
“흠. 에어링을 시키는 거지. 술이 공기와 부딪히며 조금 순해지는 과정이지.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할 걸세. 그래서···”
지금 하려는 걸 준비하고 있다. 강성용 주임과 함께 두 사람을 지켜보던 김태현 교수는 자신이 아는 범위에서 설명을 아끼지 않는다.
전부 아는 건 아니다. 두 사람을 바텐더의 역량으로 쫓기에는 김태현 교수는 조금 많이 모자랐으니까.
허나, 보이는 것만으로 감탄을 표하며 설명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정환은 그런 두 사람의 눈앞에서 예상 밖의 물건을 꺼내온다. 술과 바텐딩에 대해 잘 몰라도, 성용은 정환의 손에 들린 물건을 알아보는 눈치다.
“디캔터···?”
디캔터. 흔히 와인을 다룰 때나 볼 수 있는 그 모습을 한 물건이 정환의 손에 들렸다.
정환은 그대로 준비한 여러 개의 럼을 하나씩, 다른 디캔터에 넣고는 잠시 숨을 고른다.
약 세 개의 디캔터에 세 개의 럼이 차례대로 담겼다.
“디캔팅을 하려는 건가요? 와인처럼?”
“비슷은 하네만, 완전히 같은 류는 아닐 걸세. 일단 스피릿도 티켄터라는 개념은 있으니. 저렇게 와인 디캔터처럼은 잘 쓰지 않지만 말일세.”
“저걸 하면 술맛이 더 좋아지는 건가요? 와인은 그런 거로 알고 있는데···”
“흠. 실상을 이야기하자면, 디캔팅을 한다고 해서 와인의 맛이 극적으로 변하고 그런 건 아니라네. 연구 결과야 가지각색이지만, 대부분 맛의 변화에는 회의적이지.”
“네? 그게 더 맛있어지는 과정이 아니었다는 말씀이세요?”
“디캔팅 자체가 원래는 병을 옮겨 담는 과정만을 말하는 걸세. 그러면서 침전물을 걸러내는 것이고. 한국에서야 와전되었지만.”
“그럼 바텐더님은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냐. 침전물도 없는데. 성용의 얼굴에는 그런 의문이 아린다.
“향. 향 때문일 걸세. 공기와 마찰을 시키면 본래의 향이 살아나고 알콜이 줄어드는 건 사실이니까. 그게 맛의 극적인 차이는 몰고 오지 못해도 본연의 맛을 보려면, 가끔은 꼭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네. 숨겨진 맛을 찾는 것이지. 정환 군은 아마 블렌딩에 앞서···”
럼의 진정한 맛을 혀로 느껴보고 직접 블렌딩할 계산을 마치려는 것이다.
김태현 교수는 상상으로도 불가능한 영역에 감히 말을 전부 마치지 못한다.
블렌딩이라는 영역은 가끔은 바텐더에게 허락되지 않는 영역이기도 하다.
블렌더라는 직업이 따로 있을 정도니까.
다만, 블렌딩까지 가능한 바텐더라면 이는 초일류임을 증명하는 반증일 터.
정환은 세계 무대에서, 자신이 가진 이런 역량을 숨기지 않을 생각이다.
“된 것 같습니다.”
적당히 뚫린 유리병 사이로 알콜향이 날아가자 정환이 디캔터를 잡는다.
그리고 이리저리 흔들어가며 공기와 마찰시켜주는 정환. 명진은 정환의 움직임을 보며 남은 디캔터를 그의 움직임과 같게 하며 도움을 주고 있다.
허공에서 춤을 추는 갈색 액체가 마치 와인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리고 몇 번의 움직임이 멎자, 정환은 그대로 디캔터에 든 술을 다른 병으로 옮겨간다.
라벨도 아무런 장식도 없는 병. 그런 병에 담긴 술의 향이 진하게 풍겨져 멀찍이 서 있는 김 교수와 강 주임에게도 닿을 정도였다.
“제대로군. 성공이야.”
“잘···된 건가요?”
“향만 봐서는 그렇네. 아까도 말했지만, 아직은 맛에 변화를 주는 과정이 아닐세. 그저 향을 살려 정환 군이 제대로 그 향을 느껴보는 과정인 거지. 그리고 진짜는···”
이제 시작이다. 그런 그의 설명에 맞춰 정환이 하나씩 술병에 담긴 럼들을 맛보기 시작했다.
골드 럼 몇 종과 화이트 럼 몇 종을 동시에 맛보는 정환. 디캔팅이 잘 먹혀 한 잔으로도 충분한 럼들이, 바텐더의 세 번째 역량인 혀와 마주했다.
- 끄덕끄덕.
럼이라는 하나의 종류로 묶인 술이라면 우선적으로 통일되는 맛이 있다.
그리고 거기서 미세한 차이를 주는 것이 제품군 사이의 차별화.
이걸 혀로 느끼는 것까지는 술을 제법 마셔봤다면 누구나 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허나, 그걸 마시고 새롭게 재조합하는 건 조금 다른 차원의 영역이다.
이건, 술에 대한 이해와 블렌딩에 대한 경험, 그리고 자신의 혀끝 미각에 대한 자신감이 없다면.
감히 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술에 대한 이해야 더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감은 늘 가진 것이고.
거기에 다른 이들은 모르지만, 정환은 블렌딩에 대한 경험 역시 가지고 있다.
블렌딩이란 여러 제조사의 술을 섞어 하나의 통일성 있는 맛을 가지게 하는 것인데, 바텐더가 어디서 이런 경험을 얻었을까.
답은 간단했다.
오히려, 바텐더기에 가능했을 일.
쉽게 생각하면 정해진 공식에 따라 다른 술을 섞는 게 바텐더일 수는 있지만, 바텐더는 때로는 이렇게 같은 주종을 한곳에 모으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건, 멋들어진 영역과는 조금 다른. 그러니까, 어쩌면 현실적인 영역에서 터득한 기술일지도 모른다.
각 바에는, 그러니까 개인이 운영하는 바에는 인피니티 보틀이라는 병들이 있다.
이건 해당 바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병들.
주로 보틀로 판매가 되는 위스키의 경우가 많을 것이다.
보틀로 주문한 후 키핑 기간이 지나도록 찾아가지 않은 위스키, 또 재료로 쓰는 위스키지만 양이 애매하게 남은 위스키 등.
바에는 어정쩡하게 남는 양의 위스키가 제법 되기 때문이다.
바텐더로서 이런 술을 팔수도 없지만 그냥 버리기도 아까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바텐더들은 이럴 때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 이를 한 병에 모아 새로운 술을 만들곤 했다.
물론, 판매용이 아닌 단골에게 나가는 서비스나 자신이 공부하며 맛보는 용으로.
주종을 아예 다른 것으로 바꾸는 건 아니다. 다만, 남은 술을 섞을 때도 맛을 봐가며 섞는 것이 하나의 규칙.
그런 과정을 반복하면, 자연스레 바텐더에게도 블렌딩의 노하우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짧지 않은 경력을 가진 정환이니 어떠했겠나. 여러 업장을 지내며 그곳에서 갈고 닦은 것이 이런 블렌딩 실력.
정환은 그때 쌓은 실력을, 이번에는 럼에서 풀어보고자 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거침없이 큰 병을 가져와 그곳에 다른 럼들을 붓기 시작했다.
‘골드 럼은 이 정도. 이제 화이트 럼으로.’
여러 개의 골드 럼으로 풍미를 잡고 화이트 럼으로 깔끔함을 더한다. 그리고 거기서 중심이 될 술은 카오산 로드에서 가져온 쌩솜이라는 태국 전통 럼.
적당히 맛이 잡힌 술에 마지막으로 더해지는 건 바로 그 쌩솜이다.
어떤 럼을 만들든 중심에는 쌩솜의 향을 남기고 싶었다. 이건 쌩솜이라 칭하는 술이 가지는 특유의 허브향 때문일 터.
과하지는 않게, 적당히 풍미를 더한다면, 이는 분명 지역색을 입히기 좋을 것이다.
정환은 디캔팅을 마친 후 혀로 확인한 여러 술맛을 계산하며 자신만의 ‘인피니티 보틀’을 만들어 갔다.
중간중간 맛을 봐가며 입을 오물거리기도 하고 또 놓았던 술병을 다시 잡기도 하며 한잔의 칵테일이 아닌 술을 만들어 가는 정환.
이 모든 건 바텐더의 마지막 역량인 미각에 의존한 것이다.
“휴우.”
그렇게 한참을 술병과 시름하던 정환이 이제야 겨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낸다.
나지막하게 나오는 한숨이 그가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는지를 증명하는 것만 같았다.
“다 된 건가?”
“성공인가요?”
멀리서 지켜보던 두 사람이 서둘러 말을 묻는다. 그저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는 사람은 명진 뿐.
정환은 그런 명진과 두 사람에게.
“맛을 한번 봐 주시죠. 두 분도 마셔보세요.”
자신이 직접 블렌딩한 럼을 한 잔씩 건넸다. 색상은 화이트 럼이 섞였음에도 진한 브라운 계열이다.
“이리 줘보게!”
“감사히!”
김 교수와 강 주임은 서둘러 잔을 들고는 입으로 가져간다. 독할 수도 있는 럼을 그대로 때려 박는 두 사람.
이내 타는 듯한 강함이 이들의 목을 때리고 내려갔다. 도수는 적당히 맞춰진 것만 같이 보였다.
그리고.
- 후우우.
- 후우우우우.
뱉어보는 짙은 잔향. 잔잔하면서도 아릿한. 그리고 마지막에는 알 수 없는 복합적인 향이 가득한 럼의 피니쉬가 이들의 입안을 채운다.
“비, 비슷해요! 근데, 조금 다른데? 뭐랄까요···. 이건···”
“훨씬 고급진 맛이군.”
“마, 맞습니다!”
그리고 나오는 건 긍정적인 답변들. 쌩솜을 맛본 이들의 입에서는 나쁘지 않은 반응이 나온다.
그리고.
- 호륵.
명진마저 정환이 만든 술을 한 번에 들이켜 보자.
!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그의 미간. 이건, 블렌딩이라는 걸 처음 시도한 이가 낼 수 없는 맛임을 명진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모든 걸 끌어안고 가는 제자지만. 언제나 예상 불가능한 이가 이 차정환이라는 제자다.
“성공이군요. 축하합니다.”
명진은 이번에도 그저.
축하와 함께 인자한 표정을 보낼 뿐이다.
“이제 시작하면 되겠군요. 보자, 시간이···.”
어느덧 다른 바텐더들도 돌아올 때가 다되었다. 명진이 그말을 하려 하자, 이내 행사장의 입구 쪽에서는 여러 개의 발소리가 들려온다.
검수를 마친 다른 바텐더들이 하나씩 복귀하는 것이다.
“정환 씨, 준비는 다 되셨겠죠?”
“네. 이제 바로 메이킹에 들어가면 됩니다.”
“올라가 있겠습니다. 끝내고 뵙죠. 다녀오세요.”
“화이팅이네, 정환 군! 아자!”
“첫 챌린지니, 너무 부담가지지 마세요!”
그에 맞춰 다른 팀원들은 이제 테이블을 비워준다. 정환은 홀로 자리에 남아 들어오는 바텐더들을 조심히 살폈다.
저마다 각양각색의 재료를 꺼내 가며 자신이 상상하는 잔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정환 역시 그런 그들의 호흡을 한 번 느끼고는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켓 투어 챌린지가 이제야 칵테일과 접점을 만들어 가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