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잔. 버킷리스트. >
3.
“플라스틱 바구니···같네요? 다들 왜 저기에 저렇게 고개를 박고 있을까요?”
묻는 말에 답이 아닌 되물음이 나온다. 이건 물음을 들은 이도 답을 모를 때 나오는 전형적인 모습.
정환의 물음을 들은 성용 역시, 저 바스켓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어 보였다.
그는 휴대폰을 올려 들고는 초록색 검색창을 열었다.
“한 번 찾아보죠, 뭐. 뭐라고 쳐야 할까요?”
“아뇨. 이럴 때는.”
그럴 필요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정환. 정환은 그대로 몸을 움직여 저들이 앉아 있는 펍을 향해 나아갔다.
때로는 가만히 앉아 검색해 보는 것보다는 직접 부딪혀 보는 게 나을 것이다.
“어, 어? 어디 가세요?”
성용은 그런 정환을 멀리서 바라보다, 마지못해 따라나선다. 두 사람은 잠시, 옆 가게로 향했다.
“메뉴 좀 볼 수 있을까요?”
대부분 이런 노상에 준비된 공간은 서서 읽을 수 있는 메뉴판이 있는 법이다.
이를 가져다주는 종업원의 앞에서 조용히 주류 쪽 메뉴를 읽어보는 정환이다.
“흠.”
천천히 맥주와 위스키, 리큐르, 그리고 샷이라 적힌 글을 지나니 나오는 건 칵테일 세션.
몇 개의 유명한 칵테일이 적혀 있고는 그 아래에 정환이 찾는 것으로 보이는 메뉴가 이름을 나타낸다.
이름은 생각보다, 직관적으로 보였다.
“생솜 버킷? 그게 이름인가요?”
“그렇게 보이네요. 옆에는 타이 위스키 버킷이라고도 하네요.”
“보자. 들어간 건 간단해 보이는데요. 콜라, 레드불, 그리고 위스키인가요?”
“아뇨. 정확히는 럼일 겁니다. 이 병이, 재료인 것처럼 보여서요.”
술에 관심이 없는 이들이라면 럼과 위스키를 크게 구분하지 않는다.
둘 모두 브라운 스피릿이고 겉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 않나.
전문적으로 주류를 다루는 것이 아닌 이런 펍에서는 가끔은 이렇게 주먹구구식 설명이 이어지기도 한다.
정환은 재료를 전시하듯 놓인 버킷을 살펴보며 안에 든 술병을 들어 올렸다.
Sangsom. 이라 적힌 술병이 하나 정환의 손에 잡혔다.
‘Thailand Traditional Rum.’
라벨을 돌려가며 병을 유심히 살피는 정환. 대부분이 태국어로 적혀 있어 읽을 순 없었지만, 영어로 적힌 설명은 간단한 저 말이 전부였다.
태국의 전통 방식으로 만든 럼이란 글. 열대에서 자라는 사탕수수를 증류한 럼으로 이를 오크통에 숙성한 것처럼 보였다.
“Hey!”
정환이 한참을 유심히 그 병과 버킷을 바라보고 있자. 노점 안에서 즐겁게 술을 마시던 한 무리의 여행자들이 정환을 불러본다.
이들은 술병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정환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정환이 그들을 돌아보자.
“마셔 볼래요?”
권해지는 건, 마침 바라보고 있던 그 플라스틱 버킷이다.
“이걸요?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죠! 여긴 카오산 로드니까요! 궁금한 거 다 해봐야죠!”
관광지에는 관광지만의 바이브가 있다. 다른 곳에서야 이런 모습이 흔하지 않을지 몰라도.
그게 젊음의 거리라 불리는, 또 여행자의 성지라 불리는 여기라면.
때로는 이런 모습도 허용되는 것이다.
“드셔보시죠.”
정환은 성용과 잠시 눈을 맞추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버킷을 받아드는 정환. 받아든 버킷 안에는 얼음과 뒤섞인 술, 콜라, 그리고 레드불로 보이는 음료가 가득했다.
전형적인 펀치 스타일이, 바로 이런 식이다.
‘역시 파티에는 펀치가 최고지.’
누군가 바텐더로서 이를 고안한 건 아니겠지만. 자연스레 파티 분위기에 어울리는 칵테일이 고안된 거라.
이 역시 하나의 칵테일 문화라. 정환은 신기한 눈으로 이를 감상했다.
풍기는 향기는 그저 달기만 했다.
- 꿀꺽.
늘 새로운 칵테일을 보면 군침과 함께 걱정도 몰려온다. 처음 느끼는 맛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불안함도 있으니까.
정환은 크게 숨을 한 번 고르고는 그대로 버킷에 든 음료를 들이켰다.
빨대가 아닌, 그대로 플라스틱 버킷에 입을 대고 이를 마셔 보는 정환이다.
- 호르르르륵.
시원하다. 더운 날씨 덕에 제일 처음 느껴지는 감상은 그것일 터.
얼음이 가득 들어 있고 탄산인 콜라까지 함께하니, 첫맛에서 느껴지는 청량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다음으로 치고 오는 건 달콤한 향. 이건 콜라의 것보다는 조금 더 산미가 가미된.
그러니까 레드불의 것으로 보이는 단맛이었다.
레몬과 사과, 그리고 파인애플이 지배하는 향이 바로 레드불과 비슷한 맛으로 이건 탄산이 빠진 원조 레드불. 즉, 태국 고유의 레드불이었다.
레드불이란 제품이 서양 출신 같지만, 실상은 태국에서 출발을 알린 것.
조금 더 깊게 들어가자면 그 출발 역시 일본이지만, 어쨌든 브랜드의 권리는 태국에 있다는 말을 정환은 들은 적이 있다.
태국의 레드불은 탄산이 들어있지 않아 한국의 박카스와 비슷한 맛이었다.
칵테일에 빠질 수 없는 과일 맛을 이 레드불이 채워주는 것만 같았다.
‘크으.’
여기까지만 본다면 그저 음료수처럼도 느껴질 맛이다. 허나, 점점 음료를 음미할수록 치고 오르는 건 하나의 알콜 부즈.
생각보다 약하지 않은 날 것의 알콜향이 그대로 정환의 입안을 채우며 막힌 코를 뚫는 것만 같았다.
입안을 가득 채우는 걸 보니, 럼은 럼인 모양이다.
“후우우.”
길게 불어보는 작은 잔향. 섬세하고 달콤하게 남은 잔향 역시 럼의 것 그대로였다.
생각보다는 투박하지만, 그래도 잘 만들어진 럼임은 분명했다.
“Good?”
“Good!”
재밌게 웃으며 맛을 물어오는 여행자들을 향해 정환은 엄지를 척 들어 보인다.
그들은 그 모습이 재밌어 크게 웃고는 정환과 포옹하고 짧은 악수를 나눈다.
잠시지만, 대회 때문이 아닌 여행으로 이곳에 온 것만 같은 정환이었다.
“괜찮으셨나요?”
“저걸 샀으면 해요. 저 술.”
괜찮냐는 질문에 곧바로 다른 답이 나온다. 나온 건 정말 괜찮았다는 증거.
정환은 ‘Sangsom’이라 적힌 술을 가리키며 이를 반드시 사가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괜찮으시겠어요?”
성용은 조금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여준다.
“술은 꼭 한 종류 이상 주최사 측의 술이 들어가야 할 텐데요···.”
엄연히 주최사가 정해진 대회고 그 주최사는 대회에 사용되는 주류를 주관한다.
거기에 지금 정환이 택한 건 칵테일의 중심, 기주인 럼. 기주를 정해두고 겉에는 다른 술을 더해 맛을 가미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대부분은 기주 외의 다른 종류를 마켓에서 구해오는 게 마켓 투어에서는 일반적이다.
정환은 그 일반적인 길을, 조금 돌아서 가려는 것이고.
성용의 물음을 들은 정환이 잠시 턱을 잡고 고민에 빠진다. 고개까지 까딱거리는 모습이, 딱 무언가 맛을 계산할 때 나오는 정환 특유의 자세였다.
“될 것 같아요.”
!
“네?”
“주최사의 술도 쓰고 이 술도 쓰는 거요. 가능할 거 같아요.”
“저, 정말이세요?”
“흠, 몇 개를 더하긴 할 거지만, 분명 주최사의 술을 주로 쓸 수 있을 거 같아서요.”
“그럼, 괜찮을 겁니다! 한 종류 이상만 쓴다면요!”
“예산은 괜찮은 거죠?”
“잠시만요!”
술의 가격은 예상하기 쉽지가 않다. 서둘러 주인을 찾아가 술병의 가격을 물어오는 성용.
주인의 가격을 듣더니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 그였다.
“어, 엄청 싼데요!”
“얼마인가요?”
“300ml가 140바트니까, 5600원 정도겠네요. 700ml는 270바트, 10800원 정도구요. 예산은 400바트 정도 있습니다.”
“그럼, 700ml로 하죠.”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커다란 현지 술인 Sangsom을 한 병 품에 안고는 다시금 자신들의 식당으로 돌아갔다.
고급스럽지는 않아도 잘 포장된 박스에서 계속 눈을 떼지 못했던 정환이다.
연이어 팟타이가 나오고 짧은 식사를 시작하는 둘. 식사를 이어가며, 성용은 무엇이 더 필요한지를 물어간다.
아직 시간은 제법 남은 이들이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아까 보셨던 버킷에 든 레드불이라던가요.”
“아뇨. 레드불 같은 음료는 맛이 강해서 칵테일에 적합하진 않아요. 집에서 간단히 만들어 먹기에는 좋겠지만요.”
“그런가요? 콜라도 그럼?”
“그렇죠. 맛이야 좋지만 늘 아는 맛이 나오기 때문이죠. 뭘 만들어도 버번 콕, 럼 콕. 그런 맛 이상을 내기가 쉽지 않거든요.”
“어렵네요. 칵테일의 세계는 역시.”
“그래도 나름 재밌어요.”
“그럼, 바로 돌아가면 되겠네요. 시간은 조금 남는데, 더 둘러보고 싶은 곳이라도?”
“아뇨. 바로 가시죠. 아. 과일만 조금 더 사서요. 그리고 들어가서는 시간이 조금 필요할 거 같아요. 만들고 싶은 것들이 있는데, 이게 시간이 조금 필요하거든요.”
향후 일정을 조율하는 성용의 말에 정환은 의미심장한 말을 뱉어간다.
칵테일을 하나 준비하는 게 뭐 그렇게 오래 걸린다고.
아직은 말을 전해 듣는 성용으로서는 알 수 없는 영역이었다.
두 사람은 말을 마치고는 조용히 팟타이만을 입으로 가져갔다.
기사의 추천이 딱 들어맞아 맛이 좋은 팟타이였다.
4.
“아. 저기 오는군요. 여기네! 여기!”
식사를 끝낸 정환과 성용이 호텔로 복귀했다.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보고는 손을 흔드는 김태현 교수.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그는, 돌아오고 있다는 정환의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시간이, 제법 많이 남았었기 때문이다.
“벌써 돌아오다니. 자네, 괜찮은 건가?”
“네. 안에서 작업할 시간이 조금 필요해서요. 다른 사람들은 어떤가요?”
“정환 씨가 제일 처음으로 돌아왔습니다. 다들 아직. 돌아오진 않았죠.”
“그런가요. 그렇게 볼 게 많으려나···.”
“재료야 무궁무진하지. 언뜻 듣기로는 음식을 이용하기로 한 팀도 많다고 들었네. 다들 이런저런 것들 때문에 바쁜 거지.”
“흠. 분자 칵테일이려나요. 어렵게들 가네요.”
“자네는 뭘 준비했나?”
분명 정환이라면 예사롭지 않은 걸 들고 왔겠지. 김태현 교수는 다른 이들이 준비하는 내용을 듣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정환을 향해 기대를 숨기지 않는다.
그의 눈에 양손이 가득한 두 사람 모습이 들어와 더욱 올라가는 기대감이다.
하지만.
“과일에, 이건 뭔가?”
기대는 언제나 높을수록 실망이 크다. 정환이 가져온 것을 본 그의 표정이 당황을 금치 못한다.
그리고.
“쌩솜? 자네, 설마 쌩솜을 사 온 건가?”
“이걸 아세요?”
“알다마다! 태국의 싸구려 럼주가 아닌가!”
“럼이야, 늘 저렴한 술이었죠.”
“그중에서도 특히 저렴하다는 말이네! 이건 고작 만원 돈이 전부인 술이 아닌가! 여기 이 많은···”
고급 주류를 두고 왜 하필 이런 걸 가져왔냐. 김태현 교수는 차마 말을 전부 뱉어내지 못한다.
“제가 한 번 봐도 될까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을 삼킨 김 교수의 옆에서 명진이 쌩솜을 받아 든다.
그리고 이를 조금 전 정환처럼 유심히 살펴보는 명진.
“마스터도 아는 술인가요?”
“아뇨. 저도 처음 봅니다. 사탕수수 럼에, 태운 오크로 5년을 숙성했군요.”
“정확하십니다. 맛은 투박해요. 하지만, 특유의 향이 살아 있어서요. 콜라와 레드불을 섞은 칵테일을 마셔봤는데, 특유의 허브향이 좋아서 데려왔습니다.”
“조금, 마신 상태군요.”
명진은 이내 술병이 조금 비어있음을 알게 된다. 딱 몇 잔 분량이 비워진 술이다.
“니트로 맛도 보고···”
“에어링도 조금 시키고. 맞나요?”
- 씨익.
역시 꾼은 속이기 쉽지 않다. 정환은 자신의 의도를 그대로 찌르고 오는 명진을 보며 입가를 밝게 찢었다.
에어링이란 공기와 술이 마주하는 시간을 늘려 알콜향을 상당 부분 날아가게 만드는 것을 말했다.
처음에는 투박하고 알콜 부즈가 강한 술이라도, 일정 시간을 이렇게 에어링 시킨 후에는 맛이 훨씬 부드러워지는 법이다.
처음 뚜껑을 따고 마셨을 때는 별로였던 술이, 한참을 지난 후 다시 마셨을 때 더 맛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기주로 쓰지만, 이건 기주가 아니란 말이군요.”
“역시, 마스터는 못 속이겠네요.”
“나 원 참! 두 사람 전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니, 강 주임. 이거 나만 이해가 안 되는 건가?”
“포기하면 편하세요. 전 아까부터 포깁니다.”
“허! 참!”
수재와 천재의 대화는 여러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범인은 감히 따라가기 힘든 대화다.
“좋군요. 서두르죠. 시간이 얼마 없을 겁니다.”
명진은 그대로 정환의 의도를 전부 알았다는 듯 그에게 길을 내어준다.
언제나 든든한 그의 응원이다.
“지금 바로 시작할 건가?”
“재료 검수만 받은 후에요. 바로 들어갈 겁니다.”
“맛이 변하지는 않겠나? 기다렸다가 제출 전에 만드는 것이···”
“아뇨. 조금 다른 걸 해보려구요.”
“다른 거라? 뭘?”
김태현 교수는 이제야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기대하는 표정을 짓는다.
이제는 조금 따라가 보고 싶은 범인의 마음. 그의 마음을 이해한 듯 정환은.
“블렌딩을 할 겁니다.”
자신이 지금부터 시작할 일을 그에게 알려줬다.
***
1. Sangsom.
- 태국을 대표하는 럼, 쌩솜입니다! 일명, 태국의 소주라고도 불리죠.
- 가격도 저렴하고 도수도 높습니다 40도 입니다!
- 럼콕으로 많이들 마시죠! 그리고 작중 언급한 버킷도 많이 마십니다!
- 태국내 시장 70퍼센트를 장악한 브랜드입니다. 어마어마합니다.
- 사실 색상은 순수 숙성 색상은 아닙니다. 카라멜이 성분표에 조금 들어가 있습니다.
- Rumrating 이라는 사이트에 의하면 평점은 10점 만점 중 4.5점입니다. 반전은 골드 럼의 대명사인 캡틴 모건도 4.5점이라는 점이죠.
- 일반 럼과 다른 맛이 피니쉬에 있긴 합니다. 허브라고 하는데, 무언인지는 아무리 찾아도 알 수가 없습니다. (내 두 시간 돌려내!)
- 전 태국에 지낼 당시 정말 좋아했습니다. 하나 두고 나이트캡으로 콜라랑 쏴악-! 크흑. 땡기네요!
2. Sangsom Bucket(Lao Tung).
- 생솜 버킷입니다! 현지어로는 라오텅! 이라고 한다네요 :) 현지인 피셜이지만 구글리에는 안 나옵니다. 반만 믿어주세요.
- 맛은 예. 건강을 주고 맛과 취기를 받아오는 거래랄까요? 허허. 맛은 최곱니다.
- 요즘은 코시국이라 조금 줄어든 것 같긴 해 보였습니다만. 곧 부활하지 않으려나요.
- 이게 전부 한 병씩 때려 박는 거지만 나름 계산하면 비율이 있습니다. 그건 다음 화에.. ㅠㅠ
- 집에서 만들어 보시는 것도 추천합니다! 전형적인 홈파티를 위한 펀치 스타일이죠!
- 혹, 태국을 가신다면 잘 만들어진 칵테일도 좋지만 이런 투박한 맛도 한 번 보시길 강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