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잔. 얽히다. >
3.
“지금부터 쿠즈하라 미즈오 상의 칵테일 시연이 있겠습니다. 다들 화면을 주목해주시길 바랍니다.”
사회자의 웅장한 마이크 소리에도 정환의 신경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저 입을 벌리고는 ‘쿠즈하라 미즈오’라 불린 백발의 노년 바텐더를 바라보는 정환.
정환은 그리움과 함께 놀람, 그리고 당황함이 함께 몰려오는 것만 같았다.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다. 그게 지금은 아니라 이렇게 놀라는 것뿐.
바텐더가 살아가는 바씬이라는 곳이 워낙에 좁지 않나. 이건, 비단 한 국가 내의 바씬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보아도 좁다는 의미가 잘 통할 것이다.
뭐, 새롭게 살아가는 중에도 바텐더라는 길을 택했고 또 이렇게 세계 대회까지 나왔으니 그와는 영영 마주치지 않을 거란 생각은 없었다.
일본 쪽과 연이 닿는다면 먼저 찾아볼 생각도 있었던 정환. 허나, 너무도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너무도 예상하지 못한 전개로 만난 전(前) 스승이 그에게는 놀라울 뿐이다.
‘여전하시네···.’
정정해 보인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말일지도. 지금은 정환과 만나기 전이니까 더 젊어 보이는 게 당연한데도 정환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련하지만 아쉬움은 없다. 그와는 깔끔한 연을 주고받았고 깔끔하게 배웅까지 받으며 연을 마무리했었으니까.
놀라움이 점점 익어가니, 이제는 반가움만이 남는 그였다.
- 턱, 텃, 턱!
정환의 반가운 눈빛을 받은 노인 바텐더의 손이 빠르게 움직인다.
노인이라는 수식어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절도 있는 동작.
그의 동작이, 사소한 곳들에서 이를 바라보는 젊은 바텐더, 정환과 닮아있다.
믹싱 글라스와 진을 준비한 노년의 바텐더는 별다른 멘트도 없이 메이킹을 이어갔다.
재료는 진과 스위트 베르무트, 룩사르도 마라스키노와 앙고스투라 비터.
그리고 마지막으로 얼음이 전부였다.
쿠즈하라 미즈오는 믹싱 글라스에 준비한 재료를 천천히, 그리고 힘차게 바 스푼으로 젓기 시작했다.
행사장 안에 모여 이를 바라보는 관계자들의 눈빛이 이채를 가지기 시작한 건 딱, 이 무렵이었다.
‘핸드 오브 갓···.’
정환 역시 그 모습을 바라보니 서양에서 전 스승을 부르던 하나의 별명이 떠오른다.
일명 핸드 오브 갓. 신의 손.
금주법과 암흑기를 겪으며 사장되었던 여러 바텐딩 기술이 남았던 일본에서 서양으로 다시금 기술을 전파했던 그를, 서양의 바텐더들은 그렇게 부르곤 했다.
정적 속에서, 바 스푼은 얼음을 밀며 원을 그려갔다.
- ······.
조용하다. 분명 바 스푼은 빠르게 얼음과 음료를 휘휘 저어가며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데.
거기에 음료 속에는 작지 않은 크기의 소용돌이마저 그려지고 있음에도.
옆에 놓인 마이크가 무색하게 행사장 안은 정적만이 여전히 존재감을 표하고 있다.
스터에서, 정확히 소리가 지워진 모습이다.
‘저건···.’
그때보다 훨씬 뛰어나다. 정환은 드디어 상황에 맞는 말이 떠올랐다.
분명 소리가 나야함에도 소리는 전혀 보이지 않는 모습.
그 모습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난 후에야.
“wowwwwwwwwww!”
“Fantastic!!!!”
“Hand of god!!”
등의 연호가 연이어 터져 나온다. 미즈오 상은 거기에 보답하듯, 스터를 끝내고는 그대로 스트레이너를 채운 후 음료를 잔에 멋들어지게 부어내기 시작했다.
- 촤아아아아아악! 차아-악!
길게 폭포를 그리며 잔에 쏟아지는 한 줄기의 술. 그 술은 바텐더의 의도에 의해 한순간 차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갈무리되며 잔에 온전히 담겨 온다.
‘마르티네즈’라 불리는 클래식한 칵테일의 완성이었다.
미즈오 상은 그대로 멈추지 않고 셰이커를 다시금 잡는다. 이번에 보여줄 칵테일은 김렛.
셰이커를 올려 든 그는.
- 살각! 살각! 살가가각!
하는 일정한 소리를 내며 모두의 머리에 하나의 심상을 박아 넣어 버린다.
강변에 자리한 지금의 호텔. 유리 옆으로 보이는 강에서는 그런 소리가 들려올 리가 없음에도.
이들의 귀에는 선명하게 파도치는 소리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제야, 테이블 위에서 제 역할을 다 해내는 마이크였다.
- 짝짝짝짝짝!
- 휘이이이이이익!
- Bravo!
하는 관객석의 우레와 같은 환호 속에서 바텐딩을 마무리하는 미즈오 상.
정환은 미즈오 상의 고개가 몇 번 관객석을 향하기 전, 서둘러 행사장을 빠져나왔다.
4.
해외라서 드는 생각일 수는 있지만, 언제나 그렇다. 지나간 여행을 회상할 때면 드는 건 그때가 그립다는 생각.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지나간 그 순간을 회상하며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하곤 한다.
물론, 그때로. 또 그 장소로 돌아가도.
그때의 그 감정이 그대로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과연 그때로 돌아가면 어떨까. 라고 누가 직접적으로 묻는다면, 정환의 답은 단호하게 그때와 새롭게 방문했을 때는 다르다는 답일 것이다.
그 여행과 그때가 좋았던 건 어디까지나 그 순간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때 즐겼던 그 여행지도, 그때 즐겼던 그 시간도. 다시 돌아간다면 상황도 순간도 모두 달라짐을, 정환은 모르지 않았다.
비단 한 여행지나 해외만이 아닌 과거로의 여행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건, 정환이 그런 여행을 해봤기에 확언할 수 있는 일.
정환은 과거로 돌아온 후에도.
한 번도 지난 삶과 같은 순간을 보낸 기억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지금의 순간은 조금 특별할지도 모른다.
이 역시 과거의 삶과는 다른 순간이지만 나름의 과거를 대면할 수도 있는 순간.
지금 정환은 웅성거리며 환호하는 소리가 가득하던 행사장을 빠져나와 뒤쪽에 자리한 대기실 쪽 복도에 서 있다.
무대에 올랐던 이들이, 꼭 지나가야 하는 그 자리에.
‘미즈오 상.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네.’
그립긴 했다. 아련한 건 아니었지만. 무대에서 보여준 것처럼 그렇게 정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고.
정환은 그렇게 전 스승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도 지금 가장 자신이 사랑하는 길인 이 바텐더라는 길을 처음 걸을 때 옆을 지켰던 그 사람을.
정환은 다시금 마주해 보려 한다.
서로에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무언가를 해보려는 것, 또 새롭게 인연을 만들려는 건 아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정환도 왜 여기로 왔는지 잘 모르는 눈치다.
우선은 한번 보기라도 하자. 정환은 그런 생각에 조용히 과거를 마주하려 기다리고 있다.
대기실의 문이 보이는 복도의 코너에서, 정환이 몸을 기대고 전 스승을 기다리고 있던 때.
“聞きたくない! 今すぐ消えて!”
익숙한 노인의 걸걸한 고함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듣기 싫으니 당장 꺼지라는 말. 그리고 이내 연속해서 들리는 소리는.
- 콰앙!
하는 거칠게 문을 닫는 소리. 정환은 깜짝 놀라며 그 소리가 난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려본다.
자신이 기다리던 이들이 있던 곳이, 정환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문을 나서는 이는.
‘츠바사 상?’
이번 대회에서 정환과 마주할 일본 대회 우승자, 사지마 츠바사 바텐더.
다른 수식어로 꾸미자면, 정환의 사형이었던 사람이다.
- 저벅. 저벅. 저벅.
거칠게 몸을 흔들며 걸어 나오던 그가 코너를 돌자, 이내 정환과 마주한다.
그의 얼굴에는, 들려오던 노성에 담긴 것과 비슷한 노기가 담겨 있다.
‘츠바사 상?’
뭘까. 이 상황은. 정환은 슬쩍 당황하며 발을 한발 뒤로 물렸다.
그러자.
“차정환 바텐더?”
!
정환을 알아보는 그의 말. 그는 정환을 알아본 후에야 얼굴에서 씩씩거리던 노기를 가라앉히고는 정환이 알던 평범한 표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절···아시나요?”
자연스럽게. 처음 들렸던 말이 일본어가 아님에도. 정환은 자연스레 일본어를 뱉으며 당황한 어투를 들려준다.
나온 말은, 절대 의도한 말은 아니었다.
“한국 대회 우승자, 차정환 바텐더 아닌가요?”
들은 말이 틀린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정확히 자신을 알아보는 말.
정환은 여전히 놀란 표정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국 결승전 영상을 봤습니다. 굉장하더군요. 전, 아실지 모르겠지만, 일본 대회 우승자인 사지마 츠바사라고 합니다.”
“아.”
그제야. 자신을 아는 이유가 자신과 다름을 아는 정환. 정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애써 이해한 척하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손을 먼저 내민 건 사지마 쪽이었다.
“차정환이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 기쁩니다.”
정환은 조금 어색하지만, 의미심장한 말로 그에게 다시금 인사를 전한다.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과거의 연을 만난게 기쁜 건 거짓이 아닌 정환이다.
반대로 이번에 고개가 갸웃거리는 건 사지마 쪽이다. 보통은 이런 자리에서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라고 하지 않나.
조금은 다른 인사가 어색한 그였다.
“···저도 기쁘군요. 저를 아시는 모양이니.”
“일본 결승 영상은 저도 당연히 봤습니다. 대단하셨습니다.”
“그랬나요? 더 기쁘게 해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적당히 처음 보는 것 같은 이들의 대화를 주고받는 둘. 둘 사이에는 이전 관계처럼 조금은 어색한 기운이 맴돈다.
함께 일한 경험은 없지만, 같은 범주에 묶이는 이들 사이의 그런 어색함이.
머쓱하게 서로를 보던 중, 먼저 입을 여는 건 사지마였다.
“영상을 보곤 알았습니다. 차정환 바텐더는 저랑 비슷한 잔을 추구하는 분이라는 걸요.”
“네?”
“아시지 않습니까? 고루한···”
무언가 정환과 사이에서 연결점을 찾은 듯 의미심장한 말을 꺼내려던 사지마.
허나, 그의 말은 이내 곧 끼어드는 다른 목소리 때문에 완결 지어지지 못한다.
- 콰앙!
“아직도 거기 있는 거냐!”
들려오는 건 익숙한 노인의 노성과 문을 여는 소리. 노인은 잔뜩 화가 낀 표정으로 문 앞에 서서 정환과 대화 중인 사지마를 노려보고 있다.
사지마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과 정환의 스승을 노려본다.
“···가려던 길입니다.”
“썩 꺼지거라! 꼴도 보기 싫으니!”
“제 갈 길은 알아서 가겠습니다! 두고 보시죠! 곧 스승님도 제 말이 옳았음을 인정하게 되실 테니!”
날카롭게 오가는 두 사람 사이의 거친 말들. 정환은 이를 모두 알아들으면서도 애써 모르는 척 사지마에게만 시선을 집중했다.
사지마는 그런 스승과 사이에서 눈싸움을 한판 벌이더니, 이내 먼저 시선을 거둔다.
그리고.
“오늘은···, 대화를 나눌 적기가 아니군요. 곧 다시 뵙겠죠. 그때는 깊은 대화를 나누시죠.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럼, 이만.”
정환에게 짧은 인사만을 남기고 휙-. 자리를 피하는 사지마. 정환은 답도 들려주지 못하고는 홀로 복도에 남아 대기실에서 나서는 이들을 바라봤다.
노성이 들려왔던 대기실에서는 노인을 중앙에 둔 채 몇 명의 젊은 바텐더들이 함께 걸어 나오고 있었다.
‘료스케 형, 시라이시 형, 우에하라, 코스케까지···!’
정환은 그들을 모르지 않았다.
앞서 지나간 사지마 츠바사와는 달리 정환과 살을 비비며 함께 바 안을 누볐던 사형들.
누구는 나이가 정환보다 많았고 누구는 어린, 그리고 한 명은 동갑인 이들이 저마다 더 어린 모습으로 스승과 함께 정환을 향해 걸어왔다.
그 시절의 과거가, 정환을 향해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뭐라도 말을 걸어볼까. 그런 고민도 잠시. 정환은 지금 자신의 존재가 저들에게 얼마나 갑작스러울지를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일면식도 없는 이다. 대회를 나온 사지마라면 몰라도 저들은 그럴 터.
정환은 이미 한번 저들과 보낸 시간을 다시금 떠올리며, 지금은 그저 저들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한다.
이제는 정환에게도, 또 다른 순간이. 또 다른 이들도 있으니까.
- 스윽.
과거가 스치듯, 지금의 정환의 옆을 지나쳤다. 정환은 곁눈질로 자신을 지나치는 스승과 사형들을 바라볼 뿐이다.
이 정도면. 이 정도면 충분하다며.
하지만.
- 툭.
갑작스레 정환을 지나치다 멈추는 일본인 바텐더 일행들. 정확히 말하자면 정환의 앞에서 멈춘 건 아니다.
이들이 멈춘 건 일행이 정환을 반쯤 지나던 때. 막내 라인이 정확히 정환의 옆을 지나던 즈음이다.
그리고 이들의 선두에서 이들을 멈추게 한 건 당연히 쿠즈하라.
그는 복도에서 만난 누군가를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 전의 노기와는 달리, 밝고 반가운 표정이 걸려 있다.
“리 상!”
반가운 목소리로 손까지 앞으로 뻗으며 마주친 이를 바라보는 쿠즈하라 미즈오.
그의 앞에는.
“오랜만입니다. 쿠즈하라 상.”
익숙한. 그리고 현재의.
정환의 스승인 명진이 자리하고 있다.
정환의 과거와 현재가, 반갑게 손을 마주 잡았다.
***
1. 마르티네즈(Martinez).
(진 + 스위트 베르무트 + 룩사르도 마라스키노 + 비터스)
- 마티니의 원형이란 의심을 강하게 받고 있는 마르티네즈입니다.
- 여전히 추측입니다만, Martinez를 기록하던 중 z가 빠진 채 기록된 Martine이 마티니의 어원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학계의 점심입니다.
- 그런 의심에 걸맞게 재료 역시 마티니와 비슷하긴 합니다. 정확히는 마티니와 맨해튼의 중간. 그 정도로 보는 시선이 많습니다.
- 첫 기록은 마티니보다 당연히 오래되었습니다. 1880년대에 이미 등장한 칵테일이며 마티니는 1900년대가 되어서야 이름을 처음 알리죠.
- 맛은 뭐랄까요, 다양한 향이 나는 마티니? 마티니 자체가 깔끔하고 직선적이며 독한 맛이라면 마르티네즈는 조금 더 즐길 거리는 많지만 맛은 덜 깔끔한 느낌입니다.
- 비단 마티니와의 관계성이 아니라도 마르티네즈만을 찾는 분도 많습니다. 전, 술이 약해서요 ㅠㅠ..힘든 칵테일입니다.
- 레시피는 IBA 표준을 참고하였습니다. 바리에이션이 많은 칵테일이라 개별 바텐더분의 성향에 따라 레시피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