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잔. 교차점. >
1.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서자, 동남아 국가 특유의 따스한 바람과 그 향기가 솔솔 불어 정환과 일행을 반기는 것만 같았다.
정환은 방콕이라는 도시에, 이제 막 도착했다.
방콕이야 몇 번이고 들른 적은 있다. 그때마다 의도는 달랐지만, 대부분은 휴가.
남들처럼 해 떠 있을 때는 이곳저곳을 관광하고 다녔으며 해가 지고 난 후에 역시 남들처럼 흥겨운 취기에 몸을 맡겨 왔다.
취기를 빌린 곳이, 조금은 특별했지만 말이다.
오가는 사람들, 특히 외국인이 많이 방문한다는 특성은 언제나 칵테일과 바 문화의 성장이라는 결과를 가져오는 법이다.
요코하마도, 상해와 싱가포르도 칵테일로, 또 바로 유명한 이유가 바로 이것.
방콕 역시 이런 점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바 문화가 꽃피는 도시로 유명했기에 정환이 취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곳이었다.
Teens Of Thailand, Tropic Bar, BKK Social Club, Vesper, Bar Mahaniyom 그리고 The Bamboo Bar 등.
아시아 베스트와 업계에서 뜨는 바를 모두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덧 하루가 지나가곤 했었다.
다른 관광객들처럼 유명한 비어 바나 루프탑 바를 가는 것도 좋은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허나, 어찌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겠나.
휴가를 간 바텐더는 곧바로 손님이 되는 법이다. 그것도 자신이 가장 관심 있는 그런 바의 손님이.
그때 교류했던 바텐더들의 얼굴이 정환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조금은 그리운 친구들.
아쉽게도, 이번 여정에서 그들을 만나길 기대할 순 없을 것이다.
‘다들···’
아직은 바텐더가 되지 않았거나 미성년자, 또는 어디인지도 모를 현지 바에서 일하고 있을 터.
몇몇 곳을 제외하고는 아직 간판도 올리지 않은 시절이라, 정환은 겨우 아쉬움을 삼켰다.
익숙한 타국의 향이 불어오니, 그 시절 마셨던 잔들이 스쳐 가는 정환이다.
“덥군. 더워.”
“비행은 괜찮으셨어요?”
“나? 아. 좋았지. 비즈니스라니. 자네 덕에 이런 호사를.”
“당연히 모셔야죠. 도와주러 오신 분들인데. 저, 나름 업계 탑입니다!”
벌이가 요즘은 제법 괜찮다. 상금으로 얻은 돈도 상당하고. 정환은 자신을 위해 동행해준 두 사람에게 아낌없이 비행권을 베풀었다.
당연히, 정환의 비행권은 주최 측에서 보내준 것이고.
본선에 참가하는 모든 비용은 대회가 부담한다. 비행권과 숙박, 그 외 체류비 조금까지.
바텐더로서는 대회 성적에 관한 중압감 외에는 신경 쓸 일이 전혀 없는 것이다.
“자자. 고맙네. 우선 가세. 가. 더워 죽겠네. 저쪽에 기다리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니.”
공항 안이라지만 더위를 못 느낄 정도가 아니다. 이건 이 지역의 특색.
김태현 교수는 그런 더위를 못 견디겠는지 연신 손으로 부채를 부치며 밖으로 걸음을 옮긴다.
입국한 이들을 반기는 현장에는 정환을 환영하는 대회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정환 바텐더님. 맞으시죠? 등록하신 일행은 두 분이네요. 김태현 교수님, 이명진 바텐더님. 모두, 반갑습니다.”
한국인 직원이 반갑게 정환과 일행을 맞으며 그들의 짐을 받아 간다.
오가며 한국 대회에서 스친 적이 있는 얼굴이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시죠. 호텔까지 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호텔까지 픽업도 대회가 책임진다. 고급진 SUV를 얻어탄 이들은 방콕의 도심을 가로지르며 호텔을 향해 달려갔다.
늦지 않은 밤이고 여전히 불빛이 가득한 방콕의 시내. 차들과 오토바이로 가득 찬 풍경이 싫지 않아 정환은 일부러 창문까지 내려봤다.
잠시지만, 대회라는 생각을 잊을 수 있는 때였다.
“짜오프라야강인가?”
하나의 다리를 차가 건너가자, 김태현 교수가 다리 아래에 흐르는 강물을 알아본다.
진한 흙색이 가득하지만 쉬지 않고 힘차게 흐르는, 방콕의 젖줄인 짜오프라야강이다.
서울의 한강처럼, 방콕의 짜오프라야강변 역시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한다.
주변에는 리버뷰를 자랑하는 유명 호텔과 맛집, 그리고 명소까지.
방콕에서 비싸다는 호텔은 대부분 이 강을 끼고 있다.
“맞습니다. 짜오프라야강. 그리고 저기 보이는 커다란 건물이, 이번 대회가 열릴 호텔이죠. 물론, 묶으시게 될 곳도 저쪽입니다. 제일 좋은 로열 스위트 룸. 참가자들께는 일괄적으로 그 방이 제공될 겁니다.”
“세 명이 자기에 좁지는 않겠죠?”
“좁다구요? 하하. 설마요.”
“정환 군. 저기 보이는 호텔은···, 그 아이콘즈 호텔 방콕이라는 곳이네. 이 주변에서는 가장 좋은 곳이지. 그리고 거기 로열 스위트는···아마 네다섯 명도 잘 수 있을 거네. 아닙니까?”
“맞습니다. 역시 호텔맨 출신은 다르시군요, 교수님. 네다섯도 충분할 겁니다.”
“크흡. 뭐. 이 정도야.”
“부대시설도 전부 이용 가능할 거고, 또 호텔 바 역시 카드키를 보여주시면 무제한으로 즐길 수 있습니다. 비용은, 전부 회사가 부담합니다.”
업계에서 가장 큰 대회인 만큼 그 값을 톡톡히 해낸다. 아직 대회까지는 3일의 여유가 있기에 정환은 그 모든 걸 즐겨보려 했다.
하지만.
“뭐, 사실 호텔 바야 즐기실 시간도 없으시겠지만요.”
정환을 안내하던 직원은 조금 다른, 더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그의 말에 정환의 눈이 번뜩인다. 정환은 직감적으로 무언가가 있음을 알아챈 것이다.
직원은 그런 정환의 눈빛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대회 전까지 매일 전야제 같은 행사가 홀에서 열릴 겁니다. 신제품부터 한정판까지. 우리 회사가 제품군에 대한 쇼케이스가 쉬지 않고 예정되어 있죠. 대회 참가자들은 당연히 초청되는 자리구요. 물론, 거절하시고 다른 걸 하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대회 주최 차원에서 여러 행사가 있을 거란 말. 바텐더들이 모이는 가장 큰 대회인 만큼, 대회를 주최한 주류 회사는 이 시간을 그대로 보내지 않을 모양이다.
바에서는 수많은 주류가 소비된다. 이는 일반적인 소비자가 소비하는 술병의 수와는 비교할 수 없을 터.
거기에 유행을 선도하는 바가 있다면 너나 할 것 없이 그곳에서 쓰는 술들을 따라 쓰기도 하니.
그런 유행을 선도하는 바텐더들이 모인 이 자리가, 주류 회사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하나의 제품 설명회 자리인 것이다.
일반적인 소비자의 관심이 크지 않은 이 대회에, 주류 회사가 이처럼 막대한 돈을 쓰는 이유는 다름 아닌 바로 이 때문이었다.
직원의 말처럼, 당연히 강요되는 자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럴 리가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설마요!”
앞서 말했지만, 참새는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법. 셋은 동시에 목청을 높였다.
이들은, 모두. 바와 술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이들이다.
전, 현직 바텐더로 구성된 일행들. 이들에게 남들이 접하지 못한 술을 특별히 볼 수 있는 그런 자리는, 절대 거절할 이유가 없는 자리일 것이다.
더욱 높아진 기대감과 함께 이들의 차량이 아이콘즈 방콕 호텔에 닿는다.
짜오프라야강가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휘황찬란하게 지어진 고급스러운 건물이 이들을 품었다.
2.
“가실까요?”
“얼른 가시죠.”
“아까부터 기다렸네.”
방콕에 도착한 첫날. 방에 들어가 짐을 전부 풀고 겨우 몸에 쌓인 여독을 풀어낸 이들이 서둘러 몸을 일으킨다.
나이가 제법 있는 동행들인 만큼, 시간이 필요할 거라 여겼는데.
김태현 교수와 명진은 정환보다 먼저 준비를 마치고는 거실에 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회에서 제공한 방은 김태현 교수의 말처럼 전혀 비좁지가 않았다.
적당한 거실 하나에 침실이 두 개인 커다란 방. 정환은 컨디션 조절을 위해 홀로 방을 쓰고, 김태현 교수와 명진이 함께 방을 쓰기로 했다.
“다들 안 피곤하세요?”
“피곤할 리가! 가세! 첫날 행사부터 놓치면 큰일이니.”
“첫날 행사가 뭐였죠? 아. 진이었군요. 얼른 가봅시다.”
두 사람은 여독이란 말을 잊은 것처럼 쌩쌩하게 움직였다.
“···가시죠.”
데려오지 않았다면, 큰일이 났을 것 같은 두 사람이다.
뭐, 새로운 술과 바텐더가 모인다는 건 정환에게도 흥미로운 일이다.
정환 역시 그런 자리는 지나칠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호텔에 거창하게 마련된 홀로 향했다. 오가며 보이는 이들은 대부분 바텐더들.
몇몇은 이름 정도는 들어본 이들이며, 몇몇은 아주 유명한 이들이다.
“오. 저 친구는 뉴욕 윌도프 아스토리아의 헤드 바텐더가 아닌가! 저긴, 상해 만다린 오리엔탈의 매니저고!”
“아. 저 친구는 파리에서 제가 만났던 바텐더군요! 실력이 예사롭지 않더니, 역시나! 저긴, 런던에서 유명한···!”
김 교수와 명진은 눈이 돌아가며 주변을 둘러보기 바쁘다. 정환은 딱히 첫날은 이들에게 도움받을 일이 없기에 이들을 보내주려 한다.
“다녀오시죠. 편하게 돌아다니시면서 둘러들 보세요. 전 괜찮아요.”
“아, 아닐세. 이런. 추태를 보였군. 자네 매니저로 온 건데···. 크흡.”
“저도 익숙한 얼굴이 보여 놀랐습니다. 이런 자리는 처음이라···.”
바씬에서 변방이라 불리는 한국 바텐더라면 이런 자리가 더욱 낯선 게 당연하다.
나름 호텔맨 출신이고, 또 일본 출신인 바텐더들이지만. 이들은 이런 자리가 신기할 뿐이다.
여긴, 아무 바텐더나 초대받는 곳은 아니니까.
“정말 괜찮아요. 필요한 일이 생기면 제가 바로 부를게요! 정말요! 저 이런 건 철저합니다! 마스터도요!”
“그, 그런가? 마스터, 그럼···?”
“꼭 불러주세요.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당연하죠. 편히들 보고 계세요.”
대부분 사업이나 협업에 관한 이야기는 한 번 정도 챌린지가 오간 후에야 시작된다.
제아무리 대회 성적을 거둔 바텐더라도 눈으로 한 번 정도는 그의 실력을 봐야 하지 않나.
오늘은 그런 챌린지가 없는 그저 첫째 날. 오늘은 두 사람의 도움이 없어도 될 정환이다.
“정말 괜찮아요. 저도 편하게 돌아보려구요. 제가 두 분 모시고 다니면 더 힘들지 않을까요?”
자신을 걱정하는 두 사람의 마음이야 알고 있다. 부담 주지 않으려는 마음과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마음도 알고 있고.
해서, 정환은 애써 자신을 이유로 대며 이들을 보내주기로 했다.
정말로, 이런 자리에서는 혼자가 더 편하기도 하고.
“그럼, 그렇게 하세. 언제든 연락하게나.”
두 사람은 정환이 그런 말을 꺼내고 나서야 걸음을 돌린다. 자유롭게 행사장을 돌아다니며 여러 바텐더와 교류하기 시작하는 두 사람이다.
정환 역시 자유롭게 행사장 안을 돌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 들린 곳은 새로운 진을 시음하는 곳.
정환은 하나씩 새로운 시제품을 시음하며 적당한 취기에 몸을 맡겼다.
들려오는 대화도 나쁘지 않고, 바텐더들끼리 모여있다는 이 자리가 주는 느낌이 왜인지 포근하게만 느껴졌다.
- 와아아아.
큰 행사장 안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들려온다. 그 소리를 듣고는 시선을 옮겨보는 정환.
그의 눈에, 행사장 중앙에 자리한 무대와 큰 화면이 들어오며 무언가 다른 이벤트가 생겼음이 들어 온다.
아무래도 제법 거물급 바텐더가 신제품을 이용한 칵테일을 시연하는 모양이다.
‘누구지?’
이런 곳에서, 또 신제품을 아무에게나 맡길 일은 없다. 이를 아는 정환은 등장할 바텐더가 왜인지 자신이 아는 사람일 것만 같다.
자신이 알 정도로 유명한 인물. 그런 인물을 여기서 본다는 생각에 정환은 흥미가 맺힌 눈으로 무대 앞까지 다가섰다.
주변에는 칵테일 시연을 구경하러 몰려온 이들이 가득했다.
정환이 인파를 뚫는 동안 초청된 바텐더는 입장을 마쳤다. 사람들 사이에서 이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정환.
정환은 두 줄이나 되는 두터운 인의 장벽을 뚫고 나서야 겨우 무대 앞에 닿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무대를 확인하는 그.
!!
무대에서 여러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드는 한 바텐더의 모습을 보자, 정환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쩍! 벌리고 만다.
무대 위에는 백발과 주름이 가득한 키 작은 한 동양인 바텐더가 연신 손을 흔들며 호응에 응하고 있었다.
어딘가 익숙하고 그리운 얼굴.
정환은 그를 모르지 않았다.
그는.
정환의 전(前) 스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