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술은 특별합니다-154화 (154/175)

< 154잔. 고공을 향해. >

5.

“잘 마시겠습니다!”

새롭게 날개가 돋아나고 시간이 조금 흐른 어느 때.

이제는 방콕까지 출국할 날이 며칠 남지 않았음에도. 정환은 여전히 종로의 작은 바, 아실을 지키며 평범히 하루를 보내고 있다.

아. 평범하다는 말은 조금 안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사장님! 사장님 메이킹 주문으로 5잔 더요! 프렌치 마티니, 로지타, 에스프레소 마티니, 김렛, 김렛입니다!”

“다, 다섯 잔이요? 화, 확인!”

아실은, 어느 때보다, 분주한 나날이기도 했으니까.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하고는 확실히 이곳을 찾는 손님이 늘었다.

아니, 늘었다는 말보다는 폭발했다는 말이 더 어울릴 터.

바씬에서 있었던 크지만 작은 대회의 소식. 하지만,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을 누군가 가졌다는 말은, 씬에 관심이 없는 이들이라도 한 번쯤은 이곳을 돌아보게 만들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비단 아실만이 아닌 종로가 풍성해졌다는 말이 어울릴지도 모른다.

당장 아실 앞 골목만 나가보아도, 이전보다는 두 배는 넘게 늘어난 사람이 삼삼오오 모여 종로의 골목골목을 누비고 있다.

숲과 봉황당이 없었다면, 아실만으로는 감당이 안 될 지경임이 분명해 보였다.

거기에 새롭게 문을 열 예정인 유동경 바텐더의 새 가게, ‘바 셰이커’가 미리 가오픈으로 서둘러 문을 열어 준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종로에는 이제, 손님이 발을 붙일 수 있는 가게가 4개가 된 것이다.

하나의 거리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숫자였다.

- 차카착! 차카착! 차카착!

거기에 또 늘어난 건 정환을 콕 집어 잔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들.

누구나 자신이 마실 잔을, 최고가 만들어 주는 걸 원하고 있었다.

정환은 현시점 국내 최고의 바텐더라 공인된 사람.

얼마 후면 세계 대회로 자리를 비운다는 소식까지 접한 손님들은, 몰려들기 바쁜 와중이다.

“와! 이게 챔피언이 만든 잔이구나!”

“역시! 사장님, 대박이에요!”

“우승자는 다르네요. 오길 잘했다!”

몸은 고단하다. 그래도 들려오는 손님들의 만족하는 말이면 언제나 다시금 충전되는 사람들이 바텐더.

정환은 밝게 웃으며 잔을 즐기는 손님들의 모습에 얼른 두 개의 셰이커를 동시에 들어 올렸다.

대회가 아닌 바에서는 잘 보여주지 않는 모습이지만, 오늘은 특별 서비스다.

“자! 두 개 동시에 갑니다!”

- 와아아아아아!

“대회에서 본 거다!”

“대회 봤어? 어디서?”

“유튜브에서! 조회수가 벌써 100만이야!”

“대박. 빨리 링크 좀!”

시윤과 펼친 한판의 승부는 인터넷에서 소소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반인들에게는 바텐더들의 대결이 별거 없을 거라 여겼는데. 또 이걸 새롭게 보는 이들의 눈에는 제법 흥미가 있었던 모양이다.

한바탕 바쁜 정환의 하루는, 2부 영업이 끝을 달려가는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화제가 되어 몰린 손님들은 대부분 이른 시간에 찾는 법이다.

“어휴. 힘드셨겠어요. 괜찮아요?”

늦은 시간, 주변의 분위기를 살피다가 겨우 자리를 잡고 들어온 단골들은 바쁜 시간을 보내는 정환을 위로했다.

“좋은 일이죠. 이것도 장산데. 장사하는 사람이 바쁜 걸 싫어해서야 쓰나요.”

“그렇긴 해도···. 곧 출국이시잖아요? 연습도 하셔야 할 테고···.”

“손님 앞에서 잔을 만드는 게 최고의 연습이죠. 실전 연습!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환은 손님에게 받는 따뜻한 위로가 싫지 않아 애써 강한 척을 해본다.

양팔을 굽히며 근육을 자랑하는 척하는 정환의 모습이 과장되어 우스꽝스럽다.

“직원을 더 뽑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도 대회에 다녀온 후에는 그렇게 하려구요.”

“이야. 그럼, 윤수 씨는 이제 신입 아니네요?”

“일이 그렇게 되나요? 섭섭한데요!”

손님과 정답게 대화를 주고받는 정환. 그러다 나온 이야기에 옆에서 다른 일을 하던 윤수가 깜짝 놀라며 참전한다.

이제는 이곳의 신입이 아니라니. 조금은 시원섭섭해지려 한다.

“아니죠. 신입.이제 새로운 사람이 오면···. 윤수 씨는 승진해야죠.”

“스, 승진이요?”

“흠. 매니저. 매니저가 어떨까요? 이제는 충분할 것도 같은데.”

“아니요! 전 아직 부족합니다! 예! 암요!”

매니저라는 말이 나오자 윤수는 찾아오는 부담감에 서둘러 양손을 내젓는다.

손님과 정환은 그 모습이 귀여워 크게 웃는 표정이다.

“괜찮아요. 제가 못할 사람 시킬 사람인가요? 제가 없는 동안 잘 해주셨잖아요. 앞으로도 잘 해주실 거고.”

“그래도···.”

“후배들 들어오면, 그런 모습 보이면 안 돼요. 알죠?”

“무, 물론이죠! 제가 확실히! 교육하겠습니다!”

“무리해서 교육하는 것도 안 되구요.”

“당연하죠! 친절하게!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만사가 형통이다. 요즘은 그런 말이 딱 어울리는 것만 같다.

“이야. 그나저나 세계 대회라니. 이렇게 가까이 있는 사장님인데, 또 그 생각하니까, 왜인지 저 멀리 있는 사람 같아요.”

“제가요? 아니에요. 그냥 평범한 바텐더인걸요.”

“하여튼. 겸손하시다니까.”

대화를 나누던 중 손님은 문득 앞에 서 있는 바텐더가 대단한 사람이란 말을 꺼낸다.

이렇게 봤을 때야 평범한 동네 바텐더지만, 국가대표이고 또 세계 대회 참가자가 아닌가.

실력도 좋고 뛰어난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새삼 정환이 다시 보이는 그였다.

“부러워요. 참. 젊으신데. 세계 대회 우승까지 하면, 바텐더로서 이룰 수 있는 건 전부 이루시는 거잖아요?”

그는 턱을 괴고 백바를 바라보던 중 무심결에 부럽다는 말을 던진다.

그의 말처럼, 아직 20대 초반인 사람치고는, 제법 많은 걸 이룬 정환이다.

“그···렇죠.”

바텐더로서 이룰 수 있는 걸 모두 이룬다라.

정환은 그저 웃으며 그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겼다.

옆에서 지켜보던 윤수는.

정환의 저 웃음이 왜인지 쓰게만 보여 조금은 고개를 갸웃한 날이었다.

6.

“다녀올게요. 이제 공항에 도착했어요. 네네. 여기서 만나야죠. 가게, 잘 부탁드려요.”

- 걱정하지 마세요! 숲이랑 봉황당, 그리고 셰이커에서 매일 사람을 보내주기로 했으니까요! 정우 형이랑 기준 형도 들려서 도와주신다고 했어요! 마음 편하게! 걱정 없이 다녀오세요!

“윤수 씨 덕분에 힘이 나네요. 좋은 소식. 전해드릴게요.”

- 네! 사장님! 파이팅입니다!

“도착하면, 또 연락할게요. 고마워요.”

- 네엡!

- 뚝.

힘찬 윤수의 답과 함께 전화가 끊긴다. 그제야 스마트폰을 내려두는 정환.

양손에 들린 캐리어와 묵직한 짐가방이 그의 손을 무겁게만 했다.

“여기네! 여기!”

터미널에 들어서자 선글라스에 꽃무늬 남방을 걸친 중년인이 열심히 손을 흔든다.

반바지가 아직은 추울 법도 하거늘. 들뜬 사내는 복장에서부터 그 마음이 묻어 나왔다.

“김 교수님.”

“늦지 않게 왔군. 잘했네. 잘했어. 수속은 저쪽에서. 아. 오시면, 같이 할 텐가?”

“같이 하시죠. 기다렸다가.”

“그러지. 암. 허허. 자네 덕에 이런 행사에도 다 가보고. 허허. 고맙네! 정환 군!”

“제가 뭘요. 가서 해주실 일들 때문에 죄송할 뿐이죠.”

“예끼! 이 사람아. 투자자가 그 정도도 못 할까. 흐흐. 요즘 통장에 찍히는 돈을 보면···. 흐흐. 복잡한 건 내게 맡기고 자네는 대회에 집중하게나!”

정환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김태현 교수. 업계에 잔뼈가 굵은 그는 이번 대회에 정환의 매니저로 동행한다.

세계 대회는 단순히 기량만을 겨루는 곳이 아니다. 세계의 수많은 업계 관계자들이 1년에 한 번 모두 모이는 가장 큰 행사가 바로 월드 클래스 월드 파이널.

주류 회사부터 해외의 다른 바까지. 만나는 순간 오가는 이야기는 곧 사업이 되기에, 정환은 대회에 집중하기 위해 이렇게 김태현 교수를 친히 모셨다.

업계 경험도 많고, 또 금전적으로 투자자라는 위치까지 가진 그는, 정환의 주변에서 이런 일을 맡아줄 사람 중 가장 적임자였다.

인사를 마친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아 또 다른 사람을 한 명 더 기다린다.

이들은 일행이 더 있는 걸까.

잠시의 시간이 흐르자, 저 멀리서 나타나는 신형을 보며 정환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세 사람 정도의 무리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마스터!”

“야. 우리도 있거든?”

정환의 스승인 명진과 정우, 그리고 기준이었다.

“마중 오신 거예요?”

“너 말고 마스터. 인마.”

“에이. 저도 볼 겸 오셨으면서.”

“당연하지. 정우 형은 그냥 하는 말이야. 무시해.”

명진 역시 정환과 동행한다. 아쉽지만 정우와 기준은 아니고. 두 사람은 아직 업장에 묶인 이들이다.

어디든 해외 원정을 나간다면 코치진이 필요하다. 이건, 실력이나 기술적인 문제만이 아닌 멘탈에도 관련된 문제.

세계 대회라는 중요한 대회인 만큼, 정환이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명진이 대표로 함께하게 되었다.

굳이 직책을 정하자면, 멘탈 코치쯤 될 것이다.

“제자들 덕분에 이런 호사도 누리는군요.”

“같이 가주셔서 든든할 뿐입니다. 마스터.”

“제가 뭘 할 게 있나요. 가르친 것도 없고. 그저 정환 씨가 열심히 해준 덕이죠.”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얼마나 힘이 되는데요.”

“염치없지만, 그럼 이참에 한 번 눈감고 따라가 보겠습니다. 허허.”

세 사람은 함께 카운터로 가 수속을 마치고는 게이트에 들어갈 준비를 끝냈다.

이제 저 문으로 들어간 후면, 정환은 세계라는 무대에 닿게 된다.

정우와 기준은 이들을 배웅하려 게이트 앞까지 따라왔다.

“잘 다녀와라. 일 하나 크게 벌이고 와. 수습은 형이 해줄게.”

“진짜죠? 형만 믿고 사고 칩니다?”

“아이고. 제발.”

“이번엔 진짜야. 우리 믿고 사고 쳐도 되니까. 마음껏 날뛰고 와.”

또 장난스레 인사를 건네는 것만 같던 정우. 허나, 이번에는 옆에서 정환의 편을 들어주던 기준이 정우와 함께한다.

이런 경우는, 무언가 말속에 뼈가 있음을 정환은 모르지 않았다.

“···왜들 그러세요? 무섭게?”

“기억나지? 마스터가 아르센을 정리할 때 하셨던 말씀.”

“기억···하죠. 대부분.”

“나랑 정우 형 다른 가게 보내면서 하신 말씀도.”

!

정환은 기준이 조금 상세하게 설명을 풀어주고 나서야 말을 이해한다.

정환이 기억하기로, 명진이 이들을 다른 가게에 보내면서 했던 말은.

- 2년. 2년은 그곳을 떠나지 않길 권고합니다.

라는 간단한 말.

반대로 말하자면, 2년 후라면. 이들은 자유롭게 개업이나 이직을 해도 좋다는 말이었다.

남들이라면 콧방귀도 뀌지 않을 권고일지 모른다. 허나, 의좋은 아르센이라면 이건 다른 문제.

정우와 기준은, 명진의 저 말을 어길 생각 따위 해본 적이 없었다.

“아직···시간이 더 남지 않았나요?”

아르센이 문을 닫고 1년이 훌쩍 지났다. 이제 돌아오는 달을 맞이하면 1년하고 5개월에서 6개월쯤.

벌써 그런 시간이 지났나, 하는 감상이 이들을 스친다.

“반년 정도 남았더라고. 그건 다 채울 생각이야. 근데, 미리 준비해야지.”

“준비라면?”

“정우 형이랑 같이 개업할 생각이야.”

“긴장해라. 큰 거 온다.”

!

“두 분이요?”

이건 생각보다 크다. 정우의 말처럼, 큰 게 밀려온 것만 같은 정환.

“마스터도. 투자자로 함께 하실 거야.”

“어, 그럼 저는···”

두 사람이 새로운 가게를 연다는 말에 기대감과 자신이 없어 조금은 서운함이 밀려오는 그였다.

정환은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조그맣게 자신도 낄 자리가 없냐는 투로 말을 물으려 했다.

하지만.

“종로로 갈 거야.”

!

“음. 종로지. 암.”

“그러면 너도 함께하는 거잖아? 마스터가 투자하고 나랑 정우 형이 운영하고, 또 네가 만든 골목에서 함께 일하고.”

기준은 이미 정환도 그 속에 들어 있음을 알려준다. 대회를 준비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제야 이를 알려주는 두 사람이다.

“형들···”

“그러니까, 편하게 다녀오고 개업 선물 준비하라 이 말이다. 이번 주부터 종로에 가게 건물도 알아보고 인테리어랑 이것저것 우린 준비하고 있을 거니까. 6개월 후면 딱! 바로 종로에 혜성처럼 등장하기 위해! 알겠냐?”

“다녀오면, 다시 같이 일하자. 가끔은 서로 가게도 오가고. 그럼 됐지?”

“전 무조건 좋아요! 대찬성! 제가 도울 거라도···!”

“없어, 인마. 트로피나 하나 더 따와서 손님이나 좀 끌어 와라. 응? 우리 망하면 2대가 같이 굶어 죽는 거야. 마스터랑 우리. 알지? 나 혼자 안 죽는다? 2대에 너도 포함이야. 막내.”

“그럼요!”

“됐다. 이제 가라. 할 말은 다 전했다. 어때? 힘 나지?”

“엄청요!”

그 어느 말보다 돌아올 날을 기대하게 만드는 말이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정환은 대회 걱정으로 가득하던 머리가 일시에 비워지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형들은 그런 정환의 머리에 다른 생각을 넣기 위해 부러 이때 말을 꺼낸 건지도 모른다.

“여긴 우리가 준비하고 있을게. 다녀와서 보자. 마스터 잘 모시고.”

“마스터! 무리하시면 안 돼요! 김 교수님. 마스터 잘 좀 부탁드립니다.”

“허허. 마스터야 하실 일이 있나. 이 사람들. 나보고는 잘 다녀오란 말도 하지 않고···. 부탁이라도 해줘서 고맙네!”

김태현 교수의 작은 투정을 마지막으로 이들은 작별을 고한다. 서서히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는 세 사람의 모습.

세 사람은 이내 게이트로 향하는 여러 사람과 합쳐지며 점점 멀어지고 있다.

남은 이들은 떠나는 이들의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두 개의 평범한 어깨 사이로 조금은 무겁게 굽은 어깨가 하나 자리하고 있다.

정우는 그 모습이 보기 싫어, 한 발 앞으로 나서 본다.

그리고.

“야! 챔피언!”

누군가를 불러보는 한마디.

큰 목청이 울리자, 게이트를 향해 걷던 이들 중 단 한 사람만이 멈춰 뒤를 돌아본다.

이들 중 챔피언이라는 칭호를 가진 이는.

정환이 유일했다.

돌아본 곳에 선 정우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이거면 됐다는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

네가 누군지 다시 생각해라. 당당해라. 쫄지마라. 챔피언답게 걸어라.

숨겨진 말은 많지만, 굳이 입으로 할 필요는 없었다.

정환은 그제야 주변을 한번 돌아보더니 못 말리겠다는 듯 웃어 보인다.

정우가 하고픈 말은 전부 전해진 것으로 보였다.

정환도 정우의 박자에 맞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다시 뒤를 돌아가던 길을 가는 정환.

그의 어깨가 조금 전과는 달리 넓게 펴져 있다.

커다란 날개가 잘 어울리는, 널따란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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