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잔. 뒤풀이. >
1.
“축하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축하해요.”
“기대할게요. 응원해요.”
월드 클래스 코리아 파이널 1차 챌린지가 끝난 후. 무대 뒤에서는 정리가 한창이다.
이런 정리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또 다른 정리는 사람과의 정리.
결선 진출자인 정환은 한 자리에 서서 쏟아지는 축하와 함께 답을 건네고 있다.
대회 관계자부터 내빈으로 초청된 사람들까지. 벌써 몇 명과 손을 맞잡았는지 기억도 나질 않을 지경.
업계랑은 관계없는 사회자도 일부러 나서 인사까지 전하고 갔을 정도니, 지나가던 사람과 손을 맞잡은 건 아닐까 고민하는 지경이었다.
그래도 끝을 알 수 없는 이 인사가 드디어 끝을 향해 가는 것만 같다.
“고생하셨습니다. 축하도 드리구요. 예상은 했지만, 여기까지 올라오셨군요.”
얼굴을 아는 이들이 하나씩 등장한 것이다.
심사 위원을 맡았던 백성민 바텐더가 무대 뒤로 나오며 정환에게 악수를 청한다.
정환은 감사히 손을 맞잡고는 그에게 답을 건넸다.
“운이 좋았습니다. 좋게 봐주신 덕도 크구요.”
“마리아주, 구성이 아주 좋았습니다. 특히 페니실린과 버번 밀크 펀치. 그 맛은 잊지 못할 것 같군요. 꼭 다시 마셔보고 싶은 맛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언제든, 아실에 들러주시면 더 나은 맛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그렇죠. 하하. 아실에 가면, 그 맛을 볼 수 있는 거겠죠. 꼭 가야겠군요. 다음에는 조금 더 편하게 서로 이야기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저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럼. 우선은 결선 때 뵙죠.”
결선이 아직 치러지지 않았기에 많은 대화를 나눌 수는 없다. 오늘은 딱 여기까지.
백성민 바텐더는 그런 느낌으로 정환을 따스하게 한번 훑고는 가던 길에 나섰다.
그가 뒤로 또 반가운 얼굴이 내려온다.
“차정환 바텐더님.”
이번 챌린지에 과제로 나왔던 요리를 만든 연상규 셰프였다.
“셰프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주 감명 깊었어요.”
“마지막에는 조금 건방을 떨었습니다. 대회라서···.”
“하하하. 그런 걸 이해 못 할 정도로 보입니까? 내가? 걱정하지 말아요. 오히려 그 덕에 더 감명이 깊었을 정도니까.”
“부끄럽습니다.”
“승자가 쑥스러워해서야 다른 사람들 면이 서겠습니까? 즐기셔야지요.”
승리를 쟁취한 이는 권리도 누리지만 의무 역시 함께 가져간다.
많은 대회를 거친 연상규 셰프는 정환의 어깨를 조금 펴주며 잘게 토닥였다.
승자는 담대해야 할 의무 역시 있었다.
“나누고 싶은 말씀은 많습니다. 서로 생산적인 이야기도 또, 사업적인 이야기도 많이 나눌 수 있겠죠. 하지만, 잠시 미루겠습니다. 아직 바텐더님의 시간은 남았으니까요.”
“이야기라면 어떤···?”
“차차 해봅시다. 대회가 끝나고 마무리가 될 즈음. 종로에 한 번 들리겠습니다. 아. 먼저 우리 가게를 찾아주셔도 좋죠. 제가 한 번 대접하겠습니다.”
대화를 적당히 마무리한 연상규 셰프는 정환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서둘러 품에 둔 자신의 명함도 함께 건네는 정환. 연상규 셰프는 한참을 기쁘게 그 명함을 내려다보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곧 봅시다. 아. 조금 더 걸리려나요? 어쨌든.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가볍게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였다.
“여기 계셨네요.”
이제는 무대 뒤로 찾아오는 이들이 점점 줄어간다. 정환이 그런 생각에 조금 방심하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은 불편할 수 있는, 함께 마리아주 챌린지를 수행한 이창혁 바텐더였다.
“창혁 씨.”
“축하합니다. 좋은 승부였어요.”
“감사합니다. 저 역시 덕분에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
그는 아무런 시기심 없이 정환의 승리를 축하하는 말을 전한다. 마리아주 챌린지에서 1, 2위를 끝까지 다퉜던 둘이 이렇게 마주했다.
“정말요?”
“네?”
“글쎄요. 대회 중에는 몰랐죠. 사실 그렇잖아요? 자기 잔에 집중하기도 바쁜데 누가 남의 잔까지 보겠어요? 실은, 방금 챌린지를 녹화한 영상을 보고 오는 길입니다. 제가 자극이 되었다는 말은···”
공감하기 힘들다. 창혁은 별다른 악의 없이 그저 씁쓸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아뇨. 정말요. 좋은 승부였어요.”
정환은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눈빛으로 창혁에게 이를 전했다.
이번 챌린지에서 그래도 정환을 끝까지 쫓아왔던 이는 2번 부스의 창혁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쫓아오지 않는다면 선두는 언제고, 방만해지고 만다. 정환은 이 이창혁이라는 바텐더의 실력이 나쁘지 않음을 절대 모르지 않았다.
“뭐. 그렇다면 다행이죠. 축하해요. 꼭 우승해주세요. 어디에 가서 우승자한테 졌다는 말이라도 해야죠. 아. 이 말은 여기서 조금 그런가?”
창혁은 계속해서 축하의 말을 전하다 슬쩍 뒤를 돌아본다. 그의 뒤에는 한 명의 사람이 더 있어 조용히 둘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정환보다 먼저 결선에 진출한, 오시윤 바텐더였다.
“전 괜찮습니다.”
“뭐, 어쨌든. 두 사람 모두 파이팅입니다. 전 이만 자리를 피해드리죠.”
“벌써 가시게요?”
“패자는 말이 없는 법이에요. 어디 조용한 바에 가서 한잔해야죠. 고독하게. 또, 그런 재미가 있잖아요. 걱정하지 마요. 결선까지는 보고 내려갈 거니까. 작별은 그때 해요.”
창혁은 시윤을 앞으로 밀며 눈을 찡긋하고는 여유롭게 자리를 빠져나간다.
정환의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보이려 노력하는 그였지만, 옮기는 걸음이 무겁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결선에서 마주할 두 바텐더, 오시윤과 차정환만이 남아 있다.
“···축하드립니다. 인사는 한번 나눴었죠?”
먼저 입을 연 건 오시윤 바텐더였다.
“기억하셨군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되네요.”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부산에서 바 야흐로를 운영 중인 오시윤입니다.”
“종로에서 아실을 운영 중인 차정환입니다.”
일전에는 칵테일 파티 챌린지 도중에 만났던 것이기에 둘은 정식으로 이렇게 다시 인사를 나눈다.
둘 사이에는 자그마한 명함이 서로를 오갔다.
“오늘 보여주신 모습···.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투 핸드 셰이킹.”
“건방지지만, 한번 따라 해보고 싶었습니다. 저도 일전에 보여주셨던 모습이 참 인상적이어서요.”
“그런가요? 창혁 씨께 듣기로는 대략적인 제 이력은 아신다고 하시던데요.”
“미국에서 유학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일본과 중국에도 잠시 있으셨고.”
“맞습니다. 국내파는 아니죠. 정환 씨도 그렇게 보이던데···. 아닌가요?”
보는 눈이 제법 날카롭다. 셰이킹과 재료를 다루는 솜씨 끝에 묻은 일본의 색을 오시윤 바텐더는 한 번에 알아본 것 같다.
“스승님께서 일본 출신이십니다. 긴자에 계셨었죠.”
“흠. 그래서 그런 거였군요. 어쩐지···.”
이럴 때는 정환의 스승인 명진이 언제나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준다.
“오시윤 바텐더님은 일본보다는 미국 쪽 색이 강하실 텐데, 한 번에 알아보시는군요.”
“정확히는 저도 일본 쪽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미국에야 오래 있었지만, 제대로 배운 건 일본이었죠. 바텐딩의 원류를 찾아 미국으로 갔었지만···, 제대로 된 게 남은 건 일본이었으니까요.”
일본의 바 문화는 당연하게도 미국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요코하마 개항 시기를 기준으로 들여왔던 일본의 바 문화도 실상은 미국의 것.
허나, 일본의 개항 후 미국은 금주법이라는 바텐딩의 암흑기를 겪었기에 그간 쌓았던 수많은 기술과 연구가 모두 재로 돌아가고 말았다.
반대로 금주법이 없었던 일본은 당시 미국에게 물려받은 기술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얼음을 다듬는 것부터 섬세한 스터와 셰이킹에 미세한 변화를 주는 것까지.
그리고 손님을 대하는 접객의 태도까지.
흔히들 잘 모르는 이들이 일본스럽다고 부르는 바의 모습은 실상은 오래전 사라진, 미국의 로스트 테크놀로지인 것이다.
긴자에서 일하며 오래된 바텐더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정환은 이를 모르지 않았다.
“금주법이 여러모로 안 좋은 영향을 끼치긴 했죠. 제대로 배우신 분을 이렇게 뵙는군요. 영광입니다.”
이는 바텐더들도 때로는 잘 모르는 영역이기에 정환은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반가웠다.
“어쨌든, 결선에서는 저희 둘 뿐이겠군요. 원 없이 놀아봤으면 좋겠습니다. 차정환 바텐더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직접 그런 말을 뱉은 적은 없다. 다만, 행동으로 또 눈빛으로 강하게 그런 메시지를 전했을 뿐.
오시윤 바텐더는 그저 정환에게 보낸 메시지를 잘 받았노라. 나도 같은 생각이노라.
그런 말을 전하고 싶어 이렇게 무대 뒤까지 찾아온 거로 보였다.
그의 답을 들은 정환은 하고픈 말이 잘 전해져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기쁩니다. 재밌게, 한번 놀아보시죠.”
“물론입니다. 또한, 절대 지지도 않을 겁니다. 저도 꼭 이기고 싶은 이유는 있으니까요.”
“같은 심정이군요. 양보 없이. 기대하게 하겠습니다.”
둘 사이에는 온화하지만 팽팽한 기운이 서서히 오간다. 서로에 대한 예의는 지키면서 투지를 불태우는 두 사람.
서로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자리한 기 싸움은 아니다.
이건, 그저 한 사람의 바텐더로서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자신들의 신념 같은 것들.
손님 앞에서야 누구보다 겸손한 이들이 바텐더지만, 또 그 뒷면에서는 누구보다 자신의 잔과 실력에 자부심이 가득한 이들이 바로 바텐더라는 이들이다.
눈앞에 서 있는 상대의 실력은 다른 누구보다 인정하지만. 그게 나보다 나을 거란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 둘이다.
“다음 주에 뵙죠. 그때는 무대에서. 우선 오늘은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축하, 감사합니다. 기다려 주신 것도.”
- 꼬옥.
마지막으로 맞잡은 두 손에는 조금 강한 힘이 실려 있었던 것 같다.
둘은 그렇게 눈빛을 한 번 더 주고받은 후 서로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걷는지 서로가 알 수 없지만. 둘은 일주일 후 같은 곳에서 만날 운명일 뿐이다.
2.
“사장님의 결승 진출을 축하하며, 건배!”
- 와아아아아아!
- 축하드려요오오오오!
- 우승 갑시다!!
“다들 이렇게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뒤풀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죠. 오늘 마시는 것들은 모두!”
- 오오오오오오!
“제가 쏘겠습니다!”
- 와아아아아아!
- 팡! 팡!
함성과 함께 시끄러운 박수 소리. 그리고 샴페인 터지는 소리가 고즈넉한 한옥을 채운다.
여기는 한 파티의 현장일까. 아쉽게도 그런 건 아니다.
여긴, 조용하고 또 고상한 분위기로 유명한 바. 다만, 앞에 붙는 수식어가 조금은 과하지 않는 종로에 있는 바, 아실이었다.
아실은 오늘, 축제 분위기를 한껏 머금고 있다.
마리아주가 끝나고 뒤풀이를 가지자는 말은 관계자를 비롯해 여러 바텐더의 입에서도 나왔다.
허나, 최종 승자였던 정환은 고개를 절레 저었을 뿐. 승자가 없는 뒤풀이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 자리는 가볍게 취소되고, 정환은 그대로 발을 돌려 아실로 향했다.
아실에는, 단골들이 정환을 기다리며 소식 역시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바텐더가 있어야 할 곳은 역시 이곳이다. 정환은 자신을 위해 다 함께 모여 결과를 기다렸던 이들에게 환호성이 모자라지 않을 소식을 들려줬다.
“결선이라니요! 우리나라에서 딱 두 명뿐인 결선이라뇨!”
“역시 우리 사장님은 정말···!”
결선 진출에 성공했다는 것.
손님과 윤수, 그리고 정환이 있는 아실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다.
바텐더의 성공을 손님이 축하하고 또 응원한다. 들리는 것 자체로도 감사한 이 말이 어떤 고급스러운 술자리보다 더 보람찬 뒤풀이 자리임을 정환은 모르지 않았다.
해서, 오늘은.
정환이 쏘는 날이다.
“오늘은 마음껏 드세요!”
- 딸랑!
“잠깐! 우리도!”
“안 늦었죠? BYOB로 몇 병 챙겨는 왔는데!”
그리고 더 해지는 건 재훈과 주용이라는 종로의 다른 바텐더들. 이들은 장사마저 조금 미뤄두고는 정환을 축하하러 왔다.
“옆집 사장님들?”
“장사들 안 하세요?”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요! 저도 마셔야죠! 매니저분께 맡기고 왔어요!”
“달립시다! 제가 좋은 술로 챙겨왔어요! 나도 오늘은 땡땡입니다!”
“좋습니다! 다들 달립시다!”
손님과 바텐더, 또 옆집의 바텐더가 한 곳에 뭉쳐 파티가 벌어지는 아실.
아실의 떠들썩함은 오늘 제법 늦은 시간까지 이어질 것만 같다.
문득, 우승이라도 하면 어떻게 될까.
지켜보던 윤수는 그날을 홀로 그려볼 뿐이다.